094화 신령족
펜리르는 속도도 속도였지만, 지구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대수림에 들어선 이후에는 오히려 더욱 힘이 나는 것인지 속도를 높였다.
둘을 태우고도 이렇게 달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발군이라고 할만했다.
그렇게 펜리르와 달리는 중에 대수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니 늑대들이 몰려왔다.
펜리르에 비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덩치의 늑대가 한 무리의 늑대들을 끌고 왔는데 척 봐도 이건 일반 늑대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늑대들이었다.
펜리르가 살짝 멈추니 비견되는 크기의 늑대가 다가와 카이에게 턱짓했다. 카이가 그리로 옮겨 타니 둘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펜리르에 탔을 때와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면서 카이는 신비로움을 느꼈다. 대수림의 숲에도 쓰러진 나무들이 있는데 그런 나무들을 타 넘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단숨에 나무들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였다.
위아래로 출렁이며 달리는 것이 조금 속이 울렁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 기동성을 얻을 수 있다면 카이도 말대신 이 늑대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펜리르가 길게 하울링했다.
아우우우우.
긴 하울링이 대수림을 훑고 지나가자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그 사이로 반응이 느껴졌다.
카이는 다가오는 기척들을 읽었다.
고작 열 마리 정도였는데 사방을 점하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카이는 고개를 들어 대수림의 높게 뻗은 나무의 가지에 올라탄 이들을 보았다.
주변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처럼 짙은 색의 표범을 탄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창을 들고 있는 자들을 보고 카이가 입을 열기 전에 한 사내가 내려섰다.
나이는 서른을 오가는 것으로 보이는 자였는데 타베시와 비견될 정도의 강자였다.
‘그레이스’의 마지막 경매장에서 대륙의 7성급 이상은 거의 다 보았다고 여겨졌는데 대수림에는 이런 자들이 얼마나 있는 걸까?
단일 세력으로 이만한 강자들이 있을까?
카이가 바라보는 사이에 다가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정찰대장 렌이오. 그대가 신령이 인정한 대륙인이오?”
“카이.”
간단한 소개에 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따라오시오.”
말을 마친 렌이 손짓하자 나뭇가지 위를 달리는 표범들이 멀찍이 흩어져서 짙은 노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대수림에 들어와서 펜리르 덕분인지 어떤 맹수도 만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욱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렌을 따라 이동하면서 카이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주변의 풍광이 변하는 속도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펜리르의 속도가 빨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땅이, 바람이, 숲의 모든 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그렇게 두 시간을 더 달린 끝에야 렌이 저 앞을 보며 말했다.
“도착했소.”
그렇게 도착한 곳은 커다란 넝쿨이 장벽처럼 세워진 곳이었다. 렌이 그 앞에 서며 휘파람을 길게 부니 넝쿨이 좌우로 열렸다.
넝쿨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니 넝쿨이 다시 길을 막았다. 카이는 그런 넝쿨의 좌우에서 지키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세렌티에 비견될 이들은 아니니 비슷한 기운을 지닌 이들이었다. 술사들이 넝쿨을 이용해서 이 도시를 지키고 있는 건가?
“아빠. 저기 봐.”
카이는 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대륙인들의 도시처럼 성벽을 쌓아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집들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있었다.
머리 위로도 수많은 가옥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
카이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세렌티와 타베시가 다가왔다.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카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제사장이나 족장을 만나러 왔다.”
태연한 카이의 말에 타베시는 물론이고 렌도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카이는 담담히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말했다.
“시체를 조종하는 ‘뱀’을 만났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으니 안내해.”
그 말에 렌과 타베시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세렌티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카이는 늑대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 걸었다. 퀸도 펜리르를 타고 따라가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충 세어보아도 수만을 헤아리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모두 대수림에 적응한 이들답게 탄탄한 몸매였다. 남자도 여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당장 무기를 쥐여준다면 대륙의 정병들보다 더 뛰어날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집들보다 월등한 크기의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어떻게 이런 건축물이 가능한지 궁금할 정도로 크고 웅장하게 만든 곳이었다.
족장이나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경계는 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카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세렌티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단 세 명이 앉아있었다. 둘은 명확히 느껴지는데 그 가운데 앉아있는 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 긴 속눈썹의 미녀였다. 건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경지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런 그녀가 가장 상석에 앉아있어서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카이는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카이다.”
단순한 인사에 한쪽에 앉아있는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의 몸은 인간이 저 정도로 근육이 만들어질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이였다.
그런 사내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었다.
쩌엉!
카이는 어차피 마력 보호막을 준비했지만, 그의 앞을 막아선 퀸의 검이 사내의 도끼를 받아냈다. 워낙에 거구의 사내라 그가 가진 도끼는 한 손에 들고 있지만, 일반인이라면 양손 도끼라고 해도 될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데 도끼의 날에 퀸의 검이 반쯤 박혀 있었다.
퀸을 보는 사내의 눈에 이채가 서리더니 그대로 왼쪽 주먹을 날렸다. 퀸은 그 주먹을 뒤로 고개를 젖히면서 피하더니 발을 차올려 검을 도끼에서 뽑아내고는 몸을 회전했다.
스악!
퀸이 휘두른 검에 사내가 마주 도끼를 휘둘렀다.
쾅!
카이는 퀸이 휘두른 검이 공간을 베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내 역시 도끼를 휘둘러 공간을 베었다. 공간을 절단하는 검과 도끼의 참격이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퀸은 카이의 앞까지 물러나서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고, 사내도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카이는 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해보자는 건가?”
카이의 흉흉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사내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흉소를 지었다. 타베시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거친 기세.
그러나 그런 사내는 상석에 앉아있는 여인의 한 마디에 물러났다.
“위훌루 전사장. 신령이 직접 선택한 이에요. 무례는 범하지 마세요.”
위훌루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신령들의 뜻이라고 하나 감히 대족장 앞에서 예를 차리지 않는 자가 아니오?”
“위훌루. 그만해요.”
위훌루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화려한 색색의 깃털로 머리를 꾸미고 있던 여인이 나섰다. 위훌루는 그녀가 한마디하자 입을 꾹 다물고 카이를 노려만 보았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미소를 지은 채 앞으로 나섰다.
“신령족의 제사장을 맡은 마야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군요.”
카이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카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본 카이는 살짝 당황했는데 품고 있는 마력이 큰 것이 아니었음에도 압도되는 것같았다.
만인의 위에 선 이들이나 품을 수 있는 것. 처음 엘토르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이었지만, 경지에 이른 후로는 그런 이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클란드라도 대단하다 여겼었지만, 지금은 그녀조차 태연히 만날 수 있지 않았는가?
사람이 커 보이는 느낌을 오랜만에 받았다.
“신령족을 이끄는 칼리에요.”
카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위훌루를 돌아보았는데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는 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퀸이 먼저 공간을 베었음에도 뒤늦게 공간을 베어서 상쇄해버린 것을 보면 위훌루는 분명 8성에 이른 강자였다.
게다가 제사장이라는 마야도 마력과는 다른 힘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못지않아 보였다.
고작 일족 하나에 8성의 강자가 둘. 7성급도 몇은 있을 테니 이들이 얼마나 강한 이들인지 깨닫는다.
“앉으세요.”
마야가 말하는 사이에 바닥에서 나무가 솟구쳐 그루터기를 만들었다. 카이는 퀸의 손을 잡고 옆에 앉히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칼리도 자리에 앉아서는 입을 열었다.
“‘뱀’을 만났다고요?”
“그래. 카이저라는 7성급 육체 강화자의 시체 안에 들어가 있더군.”
“그런데도 무사하다니 다행이에요.”
카이는 그 말에 당시를 떠올렸다. 카이저의 왼팔 대신 자리하고 있던 검은 뱀은 분명 시간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말은 8성급의 강함을 보여줬다는 것.
7성급 몸에 들어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만한 강자가 마음먹는다면 대륙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카이의 물음에 마야가 손짓하자 펜리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펜리르의 목에 가만히 손을 올리니 펜리르가 입을 열었다.
<‘뱀’을 품을 수 있는 것은 특별한 혈통이 아니라면 최소 7성급 이상은 되어야 하지. 그러나 7성급 이상의 자들이라면 강력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 계약이 아닌 다음에는 품지 못한다. 그러니 시체의 몸을 이용한 것 같군.>
“뭐야? 그럼 7성급 이상의 강자가 죽으면 언제든 그 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꼭 그렇지는 않다. ‘뱀’에게는 아홉 번의 기회밖에 없으니까. 아무 몸에나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중 한 번을 쓰게 한 것만 해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카이가 아니었다면 8성급 강자들이라고 해도 위험했을 터였다. 위력이라면 확실한 칠채마력으로 간신히 날려버릴 수 있었으니까.
어설픈 마법이었다면 그 검은 뱀은 견딜 것만 같았다.
“그럼 ‘뱀’을 앞으로 여덟 번이나 죽여야 한다는 거야?”
<지금까지 ‘뱀’은 여섯 번의 목숨을 썼다. 남은 것은 이제 세 번 정도겠군. 그럼 확실히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놈도 이번 일로 경각심을 가지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다.>
“숨어서 힘을 기를 거란 건가?”
펜리르에 깃든 늑대의 신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뱀’은 우리 중 가장 영악한 영이었다.>
카이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
카이는 순순히 이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칼리, 위훌루, 마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7성 대마법사를 노예로 만들고 또 다른 7성 대마법사를 노예로 만들려고 했지. ‘뱀’의 계획이 뭔지 모르지만, 그 독에 대한 대응법이 없는 이상 쉽사리 넘어가게 될 거야. 대응책이 필요해.”
아나벨 성녀가 나서서 치료하고 있지만, 그녀의 치료도 완치는 시키지 못한다.
7성급도 독에 당하면 해독을 하지 못하니 그 뜻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카이의 말을 들은 늑대의 신령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신지로 와라. ‘뱀’의 독을 치료할 방법을 주마.>
‘뱀’이 위험한 것은 그 독으로 7성급 강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령님!”
그런데 신지로 간다는 것이 가벼운 일은 아닌지 마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가 아니면 ‘뱀’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신지로 데려와라.>
그 말을 끝으로 펜리르에게서 늑대의 신령이 빠져나갔다. 펜리르가 지쳤는지 비척거리며 퀸에게 다가가 그 옆에 바닥에 몸을 눕혔다.
카이는 마야와 위훌루의 시선이 칼리를 향한 것을 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칼리는 카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신지로 가죠.”
“그러지.”
카이도 오랜 시간 늑대를 타고 달려서 지쳤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티. 두 분이 쉴 곳을 마련해드려라.”
“예.”
세렌티가 카이와 퀸을 데리고 나가자 마야는 칼리를 돌아보았다.
“신지는 대족장 밖에 들어가지 못해요. 신령의 초대를 받았으니 카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겠지만, 둘만 그곳에 들여보낼 수는 없어요.”
칼리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신지를 관리하는 것이 우리 혈족의 의무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카이는 신령이 선택한 이야. 그를 조금 더 믿도록 해. 유모.”
마야가 뭔가 더 말하려고 할 때 칼리가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를 믿어.”
돌싱 후 대마법사-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