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유혹
카이가 테오르를 데리고 파티장으로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반갑군. 테오르네. 수몰의 대마법사라고들 부르지.”
“덴다르트입니다. 이렇게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테오르는 덴다르트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자네 5성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건가?”
“살다 보니 수몰의 대마법사에게 칭찬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조합 마법진을 배우기로 했거든.”
“그래서 직접 왔다고요?”
“그래.”
덴다르트가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 몸으로요?”
“젠장. 그래. 이 몸으로 오느라고 오래 걸렸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번 경매장에 갔을 텐데 말이야.”
덴다르트는 새삼 8성 대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지 두렵다고 여겼다. 덴다르트가 보기에도 지금 그의 마력은 끔찍하게 꼬여 있었으니까.
저런 몸으로 공간 이동을 해왔다는 건가?
“그렇게 보지 말게. 남자한테는 관심이 없으니.”
덴다르트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도 파티에 오셨는데 한잔하시죠?”
“고맙군.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탔는데.”
테오르가 술잔을 받아서 목을 축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색색의 빛을 보며 테오르가 말했다.
“보석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간단한 마법인데도 아름답군. 몇 개 사가도 되겠나?”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가격만 잘 쳐주면 못 드릴 것도 없죠.”
“그런가? 하나에 얼만가?”
“100만 프랑이요.”
“갈 때 20개만 챙겨주게.”
“그러시죠. 그보다 오늘은 즐기시고, 내일부터 시작하죠.”
“그러세나. 그보다 이번 작품은 누가 가지고 갔나?”
“아나벨 성녀가 가지고 갔습니다.”
테오르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5000억 프랑을 질렀는데도 빼앗겼다고?”
“6000억 프랑에 낙찰됐으니까요.”
테오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카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진짜 부자였군. 앞으로 얼마나 더 만들 건가?”
카이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레이스’에서 더는 아티펙트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왜? 대륙의 모든 돈이 굴러 들어오는데?”
“돈은 충분합니다.”
테오르는 잠시 카이를 바라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하긴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건 뭐든 구할 수 있을 것 같군.”
카이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고, 테오르도 그 얘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카이는 마주한 테오르에게 조합 마법진을 가르치기 전에 물었다.
“그보다 그때 싸웠던 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마법사로서 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테오르는 그 말에 인상을 구겼다. 몇 번이나 그 일에 대해 되새겼던 테오르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보는데 지금 당장은 내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다. 특히나 놈은 어째서인지 마법이 통하지 않았어. 마치 그림자 같았지.”
“그림자요?”
“그래. 그림자. 마치 수면에 비친 달의 그림자처럼 놈은 마법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네.”
“거의라는 말은 받기는 했다는 겁니까?”
“마법에 면역은 아니었다는 얘기네. 하지만 내 마법의 영향을 채 1할도 받지 않았지.”
늑대의 신령이 하는 말을 떠올려 보면 놈은 격이 다른 존재다. 그래도 대마법사인 테오르라면 뭔가 놈을 상대할 방법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가 지금도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상대하기 쉽지 않은 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은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놈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 적어도 나는 도울 마음이 있는데.”
“제국을 지키셔야죠.”
“검성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냥 이리 당하고 끝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테오르가 돕는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지간한 이는 도움도 안 될 테니까.
“일단 몸을 회복하시는 것이 먼저일 것 같군요.”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군. 그보다는 조합 마법진을 배울 수 있겠나?”
“그러시죠.”
카이는 순순히 그에게 조합 마법진에 대해서 알려줬다.
“모든 마법을 조합 마법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합 마법진에 사용하는 룬어와 마법진에 대해서 알려드릴 수 있지만 그것으로 원하는 마법 도구를 만드는 것은 오롯이 테오르님의 책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마법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학문은 아니지만, 테오르는 자신을 믿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마법진이라고 해도 결국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좋아. 배워보자고.”
그러나 조합 마법진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안타르시아에서 온 편지 한 통.
그걸 확인한 엘제토 후작은 귀족들과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다.
단순히 편지 한 통이 아니라 국왕의 인장이 같이 왔다. 그러니 이걸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정통한 승계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라 말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허수아비 왕이다. 왕가의 권력은 돈에서 나오는 것. 돈이 없는 그들이 왕권을 강화하려면 까마득한 시간이 필요했다.
“안타르시아의 시장이 직접 전한 편지인 만큼 그녀도 이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타르시아의 시장과 척을 질 수는 없죠.”
카이는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을 만큼 왕국이 굴러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왕가와의 결별이 깔끔하지 않았다는 얘기.
그런 상황에서 7성 대마법사인 안타르시아 시장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 안타르시아의 시장인 메르샤는 대륙 유일의 무역 도시를 손에 쥐고 있는 만큼 좋게 좋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엘티온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하죠. 오히려 그게 더 우리에게는 좋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엘티온 왕자는 어리다. 게다가 검에 대한 재능은 뛰어나지만, 아직 왕으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허수아비로 세우기에 이보다 좋은 왕이 또 있을까?
지금은 왕당파가 알아서 무너진 상황. 왕의 권위를 받쳐줄 귀족이 없는 이상 얼마든지 마음껏 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관식을 준비하죠.”
엘제토 후작의 말에 귀족 연합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티온은 자신의 앞에 선 엘제토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건네준 편지를 읽은 엘티온의 미간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어머니를 찾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엘제토 후작은 턱짓으로 편지 밑에 찍힌 인장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엘디아 여왕의 필체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인정한 것이었고, 그 인장을 찍었다는 것 또한 확인했소. 그러니 그녀의 뜻을 존중해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 좋겠소.”
엘제토 후작은 귀족 연합의 수장인 것과 동시에 왕족의 일원으로 엘티온에게 있어서도 어른이라고 불러야 할 이였다.
엘티온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는 모습에 엘제토 후작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정녕 엘디아 여왕을 찾고 싶거든 왕위를 물려받고 리퍼들을 움직이면 될 일이오.”
엘티온에게는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왕위를 물려받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 그럼 길 일을 잡아 대관식을 준비하겠소.”
엘제토 후작이 떠나자 엘티온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요즘 들어 검에 대한 수련에 성과가 조금씩 나오고 있어 집중하는 중이었는데 왕위를 물려받으란다. 어머니가 선물해 주었던 검마저 전쟁 배상금으로 모두 팔아치워 버리고 남은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사치를 누리기보다는 검을 수련하는 것을 즐겨하던 그에게 왕위란 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귀족 연합이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대신들의 자리를 모두 꿰차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왕국의 대소사를 모두 그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허수아비 왕이 되는 것이 싫어서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신도 왕위를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귀족 연합이 리퍼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리퍼도 예전과 같은 정보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돈이 없어 그들도 인원 감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리퍼들을 귀족 연합에서 고용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
엘티온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왕위를 물려받고, 어머니를 찾는다. 그리고 왕권을 되찾을 생각이다.
이런 허수아비가 아니라 진짜 왕위를.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지.>
엘티온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뒤를 돌아보았다. 방안에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번뜩이는 뱀의 눈이 있었다.
보는 순간 몸이 굳는 사안(蛇眼).
엘티온이 어금니를 깨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그의 눈 깊은 곳에서 푸른 빛이 일렁였다. 엘티온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곧장 몸을 날려 검을 찔렀다.
한 줄기 빛처럼 뻗어 나간 검이 그림자 속 뱀을 찔렀다. 그런데 허공을 찌른 것만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뱀이 엘티온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진정 힘을 원한다면 나를 찾아라. 그리고 이건 선물이다.>
“으읏!”
갑작스러운 통증에 엘티온이 검을 떨어트렸다. 손목을 내려다본 엘티온은 전에 없던 문신이 그려진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문신은 살아 움직였다.
손목에 있던 문신이 어깨를 타고 올라가 가슴까지 전해졌다.
마치 뱀이 피부 속을 기어 다니는 것같은 끔찍한 경험.
엘티온이 가슴팍의 옷을 잡아 뜯었다. 후드득 뜯어져 나간 옷자락 사이로 뱀의 문신이 심장 위에서 움직였다. 뱀의 문신은 둥글게 원을 그리더니 꼬리를 물었다.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형상.
<언제든 나를 찾아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테니.>
엘티온이 고개를 들었을 때 앞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의 그림자만 남아있기에 그곳을 바라보던 엘티온은 떨어진 검을 쥐었다.
마치 꿈만 같았던 순간.
하지만 가슴에 새겨진 문신은 조금 전 일이 실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잠시 문신을 왼손으로 만지던 엘티온은 검을 검집에 되돌리다가 인상을 굳혔다. 그리고는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는 검을 내리그었다.
쉬악.
자신이 휘두르고도 믿지 못할 정도의 검격.
검에 재능이 있다고 하지만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4성의 벽을 단숨에 넘어 버렸다.
엘티온은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가슴에 그려진 문신을 보며 엘티온은 천천히 왼손으로 그 문신을 쓸어내렸다.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힘을 주겠다고 했다. 고작 선물이 이 정도인데 정말로 힘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될까?
6성 기사만 되어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혹 7성 기사가 된다면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유혹.
엘티온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 선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받았던 것. 그러니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지만, 직접 뱀을 찾아 계약하고 힘을 얻게 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니 선물을 이용해서 강해져야 한다.
그리 생각하던 엘티온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옆에 걸려 있던 가운을 집어서 둘렀다. 그리고 돌아보니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리퍼인가?”
여인은 그 물음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
“난 그대를 부른 적이 없다.”
“귀족 연합이 엘디아 여왕 전하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혹시 제가 확인해 봐도 될는지요.”
엘티온은 그 말에 옆에 놓아두었던 편지를 건네줬다. 편지를 확인한 리퍼 여인은 다시 편지를 공손히 엘티온에게 건넸다.
“내가 보기에는 어머니의 필체가 맞았는데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맞습니다.”
“그런가?”
엘티온은 쓴웃음을 짓고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나?”
“여왕 전하께서 적법하게 승계를 원하셨기에 저희가 앞으로 모시고자 찾아뵈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첫 번째 명령이다. 어머니를 찾아와라.”
“여왕 전하를 말입니까?”
“그래. 왕위가 버거우시다면 내가 물려받을 것이나 그래도 직접 뵙고 싶으니 찾아와라.”
여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엘티온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리퍼가 익힌 마력 운용법은 은신에 특화되었다고 들었다. 그 능력은 성급 이상의 은신 능력을 준다고 했는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여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벽을 넘은 것이 아니라 감각 자체가,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 자체가 전과는 수준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엘티온은 가운을 벗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연무장으로 가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벽을 넘고 보니 검을 휘두르는 감각이 달라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는 엘티온의 눈 깊은 곳에서 전과 다르게 호박색 빛이 아른거렸다.
돌싱 후 대마법사-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