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싱 후 대마법사-88화 (88/150)
  • 088화 마지막

    성녀 아나벨이 깨어난 엘디아를 살피다가 카이에게 눈짓했다. 아나벨을 따라 밖으로 나온 카이는 그녀와 마주 앉아서 차를 마셨다.

    잠시 말을 고르던 아나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엘디아 여왕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대륙에서 성녀의 손으로 고치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런 아나벨이 직접 확인해 본 결과를 듣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갇힌 것 같아요. 일단 실어증에 자폐증 증상이 함께 보여요.”

    “그렇습니까?”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회복할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요. 오랜 요양이 필요해 보여요.”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제가 듣기로 교국에 괜찮은 수녀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모아서 관리해주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아나벨은 그 말에 살짝 주저했다. 교국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수녀원이 있다. 고위 귀족들이 자신의 가족을 맡기는 수녀원이 있다.

    들어는 갈 수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곳.

    고위 귀족들이 자리를 넘겨받았을 때 보통 이용하는 곳으로 일종의 감옥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들여보내고는 막대한 기부금을 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위 귀족들이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침묵의 수녀원.

    들여보내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들지만, 카이는 이미 어지간한 왕국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는 푼돈일 뿐이었다.

    “수녀원이 있는 것은 맞지만, 아직 일국의 여왕을 받은 적은 없어요.”

    “언제나 처음은 있는 법이죠.”

    아나벨은 카이의 마음이 굳었음을 알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카이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 호의는 제가 꼭 기억하겠습니다.”

    아나벨은 그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식사는 힘들겠죠?”

    “그래 보이네요.”

    “그보다 대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진금화는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1억 프랑짜리 진금화는 제국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어음과 같은 것. 신성 교국에서 그걸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게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신성 교국과 제국은 서로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을 뿐 서로를 견제하고 있엇을 테니까.

    카이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금화는 얼마나 가졌는지 몰라요. 하지만 최대한 모으고 외부로 유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진금화는 큰 거래에서는 좋지만 실제로 그걸 사용하는 거래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진금화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금화로는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6000억 프랑에 낙찰받았으니 100만 프랑짜리 금화로 준비한다고 해도 600,000개가 필요하다.

    “물론이죠.”

    신성 교국은 돈이 넘치도록 많다. 그들의 특제 상품인 포션만 해도 대륙의 히트 상품 중 하나이니까.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터.

    “그럼 제 영지로 보내주세요. 시장의 도움을 받으면 빨리,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죠.”

    카이는 그녀에게 ‘진실’을 건네주었다. 아티펙트의 성능 자체도 사기적이지만, 이것은 카이와의 연결 고리였다. 8성 대마법사와 8성 기사인 검성을 데리고 있는 제국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이와의 연결 고리에 6000억 프랑은 충분히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나벨이 ‘진실’을 받고 신성 교국의 채권을 건넸다. 그녀의 서명이 들어간 6000억 프랑짜리 채권. 돈을 가져와서 교환할 채권을 준 그녀가 돌아가자 카이는 엘디아를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엘디아의 방문 앞에는 메르샤가 팔짱을 낀 채 기대고 서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해.”

    “그러지.”

    카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카이의 태도를 보면서 메르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신의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메르샤가 물었다.

    “왜 숨겼어?”

    “오늘 봐서 짐작한 거 아냐?”

    메르샤는 가만히 카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을 유추해서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그 입으로 들으니 알 수 있었다.

    역시 8성에 오른 놈들 치고 미치지 않은 놈이 없다는 걸.

    7성까지는 그나마 봐줄만 하지만 8성부터는 정말 모두가 미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돈 많고 능력 있는 7성급 대마법사와 다르게 8성급부터는 같은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었으니까.

    길게 한숨을 내쉰 메르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사과는 받아들일게. 대신에 하나만 약속해 줘.”

    “뭘 말이지?”

    “나와 내 도시는 건드리지 마.”

    카이는 메르샤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카이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니야. 메르샤. 내 사과를 받아줬으니 우린 친구다. 나는 필요한 것이 많아. 그리고 그걸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대륙에 오직 너뿐이지.”

    메르샤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잘 아네.”

    “그래. 그러니 앞으로도 우린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 돼. 단 그만 좀 날 유혹하고. 여자라면 질렸으니까.”

    메르샤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좋아. 대신에 내가 네 비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도 돼?”

    “내 비호가 필요해?”

    “혹시 모르니까.”

    카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8성에 오른 지금 대륙에서 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없었다.

    제국도 카이와 적대할 이유는 없었고, 새로운 8성 대마법사가 비호한다고 한다면 메르샤는 그것만으로 수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자였다.

    뱀의 악령과도 싸워야 할 지금 카이는 많은 것을 구하고, 연구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그녀의 도움이 필수였다.

    “친구에게 이름 빌려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진짜다? 무르기 없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샤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친구에게 수수료는 안 받을게.”

    카이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받을 수수료만 해도 무려 1,200억 프랑이었는데 그녀는 그걸 포기했다. 대신 카이와의 친분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든지. 난 일을 마무리 지으러 간다.”

    카이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메르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8성에 오른 자가 저토록 집착하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카이가 지금까지 엘디아를 무너트리기 위해 한 짓들을 떠올린 그녀는 그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하는지를 보았으니까.

    카이는 방으로 들어가 엘디아를 바라보았다. 아나벨 성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흑마법을 연구하면서 영혼에 관해 연구한 바가 있던 카이였기에 지금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가뒀다는 것도 알았다. 말을 잊는 것은 당연했고, 눈은 뜨고 생리 현상을 겪지만 깨어나지 못할 것도 알았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상태.

    카이는 그녀의 앞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가 가방에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펜을 꺼내든 카이가 멋들어지게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유려한 필체는 엘디아의 것. 카이는 편지를 작성하며 말했다.

    “신성 교국에는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수녀원이 있어. 교국에서는 단 한 번도 그곳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너는 알고 있겠지. 직접 내게 알려준 말이었으니까.”

    조용한 방안에는 카이의 목소리와 펜이 편지지 위를 달리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넌 그곳에 들어갈 거야. 세계와 격리된 채 여생을 살게 되겠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카이는 상관하지 않았다. 카이는 편지를 마무리하고는 그녀에게 내용을 보여줬다.

    “왕위를 엘티온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야. 그리고 너는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찾지 말라는 말도 남겼지. 이런저런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겠지.”

    카이는 그녀가 손을 잡아 반지에 마력을 부여했다. 그것은 왕을 증명하는 인장. 그것을 엘디아의 서명 뒤로 꾹 눌러 찍었다.

    카이는 편지를 둘둘 말아서 봉인하고는 그 위로 반지의 인장을 한 번 더 찍었다.

    “엘도 왕국은 기억할 거야. 너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친 최악의 여왕으로 기억되겠지.”

    카이는 편지를 품에 넣고는 그녀의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그러다가 곧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널 잊을 거야.”

    어차피 지금 엘디아의 귀는 열려있지만, 그녀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바라던 명예롭고 영광된 삶과 반대인 왕국 최악의 여왕으로 기억될 거라는 얘기에도 어떤 반응도 없는 것을 보면.

    “이게 마지막 만남이야. 잘 지내라. 네가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서.”

    카이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카이의 뒤로 방에 홀로 남은 엘디아는 멍한 시선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카이가 밖으로 나오자 그의 앞에는 메르샤가 서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성녀에게 미리 말해 뒀어. 교국으로 갈 때 함께 보내버려.”

    메르샤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침묵의 수녀원으로 보낼 거야?”

    “맞아.”

    메르샤는 식은땀이 살짝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엘디아 스스로 망가지게 만든 후에 침묵의 수녀원으로 보낸다니 새삼 이 인간도 제대로 미친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묵의 수녀원은 그 위치도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귀족의 무덤이라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 처넣는 이들은 가족을 죽이지 않았기에 죄책감을 덜 수 있고, 신성 교국은 그걸 통해서 많은 기부금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국의 여왕이야. 그런데 괜찮아?”

    카이는 메르샤에게 편지와 인장을 건넸다. 메르샤가 받아들고 바라보자 카이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엘도 왕국으로 보내.”

    지금 엘도 왕국은 엘제토 후작이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어차피 허수아비 여왕. 그녀가 사라진다면 엘티온을 왕위에 올리고 뒤에서 조종할 생각이리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엘티온을 더 부리기 쉽다고 여길 테니까.

    그러나 곧 소문이 그들을 덮칠 터였다. 자신이 8성에 오른 대마법사라는 것을.

    그렇게 되었을 때 엘제토 후작은 어떻게 생각할까?

    엘티온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는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귀족들의 행패가 줄어들 터.

    엘티온을 아끼지만 직접 그 아이를 보면 엘디아가 떠오르니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으리라.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귀족들의 빚만 갚아줘도 더는 그를 괴롭힐 수 없을 테니까.

    뱀의 악령과 싸우기 전에 복수가 끝났다. 속이 다 후련했다. 다만 후련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온전히 놈과 싸울 준비를 할 차례다.

    “그럼 뒷일은 맡긴다.”

    “걱정하지 마.”

    “부탁한 것들 준비해 주고.”

    “물론이지.”

    카이가 눈앞에서 공간 이동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메르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무서운 놈.”

    저렇게 무서운 남자인지 알았으니 그의 부탁은 반드시 들어줘야 했다. 우선 엘디아를 신성 교국으로 보내버리고, 신성 교국의 돈을 받아서 보내주고 그가 부탁한 것도 빨리빨리 처리해야 했다.

    영지로 돌아온 카이는 컴컴한 영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 감지로 느껴지는 것은 영지의 모든 인물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었다.

    카이는 그곳으로 다시 공간 이동을 했다. 식당에 모인 이들은 테이블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카이도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덴다르트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쉿. 곧 올 때가 됐어.”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내 제자.”

    덴다르트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카이를 보고는 히익 놀라서 옆으로 물러났다.

    “야이! 놀랬잖아!”

    “뭘 그리 놀라요?”

    덴다르트가 그 말에 한숨을 내쉬고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식당 전체에서 불이 들어왔다. 그렇게 들어온 불빛이 응접실을 환하게 밝혔다.

    카이가 고개를 드니 이번에 개발한 충전용 광구들이었다. 그런데 불빛이 색색으로 빛나서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제야 충전용 광구들을 감싼 구체가 모두 보석임을 알아보았다. 덕분에 산란한 불빛이 사방을 비춰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보석을 이용하면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티 전용으로 귀족에게 팔아도 될 것 같았다.

    카이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그레이스’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덴다르트가 다가와 카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밝혔냐?”

    “예.”

    “그럼 끝난 거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덴다르트는 그런 카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생했다.”

    카이는 덴다르트의 어깨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레이스’의 물건을 더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진실’을 밝히자고 했다.

    그런 그들의 눈빛이 모두 자신을 향했다.

    복수 성공해서 후련하면서도 뭔가 허전했던 마음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마음 써줘서.”

    덴다르트는 그런 카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파티 시작하자!”

    음식이 들어오고 술이 들어오는 모습에 카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위해 파티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퀸이 따라준 술잔을 바라보던 카이는 그걸 단숨에 비웠다. 확 올라오는 술기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서로 웃고 떠드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바라보던 카이는 이제야 진정 복수가 끝났음을 알았다.

    이제야 복수가 끝났다.

    카이는 그때 영지 밖에서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강대한 마력을 감지하고는 술잔을 든 채로 공간 이동했다. 그곳에는 한쪽 소매가 헐렁한 테오르가 서 있었다.

    아직 마력이 불순한 데도 용케 이곳까지 공간 이동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테오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합 마법진을 배우러 왔다.”

    영지에 새로운 8성 대마법사가 찾아왔다.

    돌싱 후 대마법사-유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