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초대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우울해하던 엘디아가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었다. 눈가에 주름이 생겼지만, 그조차 신경 쓰지 않은 엘디아는 엘제토 후작을 불러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엘디아는 말없이 손을 휘휘 내저었고, 밖으로 나온 엘제토 후작은 외무대신 도노반을 돌아보았다.
“왕가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약속했던 800억 프랑을 만들어 놓으시오. 귀족 연합에서도 돈을 준비하고 있소. 일단 타메아 왕국군에 정전 협정을 받아들인다고 전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준비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엘제토 후작이 떠나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노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300억 프랑을 내놓으면서 왕국을 좌우하는 꼴이 짜증 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왕당파에게 있던 권력은 귀족 연합으로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왕가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국왕이 왕국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었기도 했지만, 엘더가 막대한 부를 쌓으며 그 금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귀족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군사력을 키우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을 잃었다. 부채만 가득 안은 왕가가 과연 왕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나 있을까?
이제는 허수아비 여왕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엘제토 후작은 왕족이기도 하면서 귀족 연합의 수장이기도 하니 이제 그에게 줄을 대야 했다. 그러자면 지금 받은 명령부터 완벽하게 수행해야 했다.
정전 협정이 맺어졌고, 그 협정이 맺어지는 곳은 엘도 왕국의 왕궁에서 벌어졌다.
엘디아 여왕은 성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개선군처럼 들어오고 있는 타메아 왕국의 레인 국왕과 그의 호위들을 보았다.
카이저의 죽음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곱씹기도 전에 타메아 왕국군이 밀고 들어왔고, 이렇게 치욕적인 정전 협정까지 맺게 됐다.
그것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레인 국왕이 정전 협정을 맺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정전 협정은 물 건너간 것이었을 테니.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왕도를 가로질러 오는 레인 국왕을 보면서 엘디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타메아 왕국과 엘도 왕국의 사이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앙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번도 이렇게 굴욕적인 패배는 없었다.
그리고 이 굴욕적인 정전 협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니 엘도 왕국의 역사에 오점으로 남게 됐다.
짧은 한숨을 내쉬던 엘디아의 뒤로 엘제토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으로 이동하시지요. 레인 국왕을 맞이해야 합니다.”
엘디아는 엘제토 후작의 도움으로 정전 협정을 맺어 왕국을 유지해 주었지만, 이제 모든 권력은 귀족 연합으로 넘어갔다. 그걸 되찾아 오려면 적어도 저들에게 진 300억 프랑의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왕국의 수입으로 그걸 갚으려면 10년은 걸릴 테고 그동안 그들은 더욱 공고한 권
력을 쌓을 터였다. 그 권력을 깨트리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는 불가능하리라.
대전으로 가서 기다리니 곧 문이 열리고 레인 국왕을 필두로 그를 호위하는 이들이 들어섰다.
검은 로브를 걸친 두 명의 마법사와 근위 기사들을 대동한 채 들어온 레인 국왕을 보고 엘디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레인 국왕도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앉으시지요.”
도노반의 말에 레인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를 따라서 타메아 왕국에서 온 정전 협정을 위해 온 사절단이 자리에 앉았다.
엘디아도 자리에 앉자 레인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무례한 눈길에 다들 분노했음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이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 근위기사인 프레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마법사는 모두 6성에 이른 이들이고, 근위 기사로 보이는 이 또한 6성에 이른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레인 국왕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모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엘도 왕국에서 온 이들은 6성에 근접한 자신 외에는 5성 미만의 이들이었으니까.
도노반이 엘도 왕국 대표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전쟁 배상금은 이미 드렸고, 확인서까지 받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정전 협정서에 서명하신다면 헤스, 파딜라, 카손, 킬고르 성을 내드릴 생각입니다. 왕국민들은 이미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도노반이 두 개의 정전 협정서를 양쪽으로 나눠서 밀어줬다.
레인은 정전 협정서를 내려다보며 반지의 인장을 빼며 말했다.
“엘디아 여왕. 미안하게 됐소.”
엘디아가 레인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국서를 죽인 것에 대해 하는 말이오.”
“전장에 나섰을 때 국서는 이미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자신의 꿈에 목숨을 거는 남자였고, 그 꿈이 꺾였을 뿐. 레인 국왕이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레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대단하오. 엘디아 여왕이야말로 여걸이셨군.”
레인이 인장을 정전 협정서에 찍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전 협정 연회를 기대한 것은 아니니 이만 돌아가지. 다음에 본국의 왕궁으로 초대할 테니 한 번 오시오.”
“초대해준다면 마다치 않도록 하죠.”
엘디아 공주가 인장을 찍자 각기 정전 협정서를 나눠 가졌고, 레인 국왕이 떠나갔다. 그들이 멀어진 것을 보고 엘디아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엘제토 후작이 정전 협정서를 챙기며 말했다.
“전하를 모셔라. 많이 힘드신 것 같으니.”
엘디아는 그 말에 엘제토 후작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곧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벗어났다.
스스로 알았다.
자신은 허수아비 여왕이 되었다는 것을.
비행정을 수리하는 중에 테오가 카이를 찾아왔다.
“보고할 게 있어?”
“예.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카이는 마력을 거두며 덴다르트를 바라보았다.
“괜히 마법진 건드리지 마세요. 잘못하면 또 부서집니다.”
“그래. 얼른 다녀와라.”
카이는 잠깐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가 덴다르트가 손 본 것 때문에 퍼스트가 부서질 뻔했다.
카이가 나가자 덴다르트가 프릴을 불러서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저번에 손봤던 마법진에 문제가 있었지. 결합 마법진은 아직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넌 좀 알겠냐?”
“죄송해요. 저는 아직 축소 마법진도 이해가 가질 않아요.”
“에잇. 이리 와 봐라. 여기 이 마법진 보이지?”
카이는 덴다르트에게 결합 마법진까지 모두 알려주었는데 그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저번에 출력에 문제가 있어서 카이가 없는 동안 손을 봤다가 균형이 무너져 비행정이 추락할 뻔했다.
그렇다고 연구를 포기하는 것은 마법사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법.
다행이라면 실험을 망친다고 해도 수습할 제자가 있으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마법진을 만져볼 수 있겠나?
덴다르트가 다시 마법진을 손보려 하자 프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혼나지 않을까요?”
“괜찮아. 네겐 스승이지만 내겐 제자니까. 자 다시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어라.”
덴다르트가 낄낄거리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프릴도 카이의 설명보다는 덴다르트의 설명이 쉬웠기에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카이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수준인지 알고 설명해 주는데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카이는 집무실로 돌아와 테오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타메아 왕국군은 모두 물러났다는 거지?”
“예. 정전 협정을 맺었고, 타메아 왕국군이 군을 물렸습니다. 대신 귀족 연합에 빚을 진 덕분에 허수아비 여왕이 되어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예. 귀족 연합의 엘제토 후작이 귀족들을 규합해서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예. 왕당파의 귀족들도 모두 귀족 연합의 편에 서서 아첨하기 바쁜 상황입니다.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엘제토 후작이 거의 왕처럼 굴고 있습니다.”
카이는 테오가 준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테오가 설명을 이었다.
“왕가는 최소한의 품위만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귀족 연합의 빚을 상환하는데 모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카이가 차를 마시면서 그 얘기를 들었다.
“그래?”
“예. 다른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또 보고 드리겠습니다.”
“좋아. 수고했어.”
테오가 물러가자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공간 이동을 했다. 카이는 왕도의 상공에서 투명화 마법까지 사용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엘디아가 있었다.
모든 것을 쥐었던 여인이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내쳤음에도 언제나 당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엘더가 무너지려 할 때는 ‘그레이스’의 아벨을 유혹하려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용병왕 카이저를 유혹했다. 왕위야 카이저가 벌인 일로 물려받은 것이었지만, 그와 함께 대륙 서부를 통일하려던 그녀의 야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야망이 꺾였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카이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하나마저 빼앗았다.
전쟁 배상금으로 그녀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은 물론이고 왕가의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그뿐인가? 막대한 빚을 져서 그녀의 재기조차 꺾었다.
복수가 거의 완성 단계까지 왔다. 카이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는 홀연히 공간 이동으로 영지로 돌아왔다. 카이는 잠시 연병장을 살펴보았다.
덴다르트가 프릴과 함께 마법진을 만지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에르케가 만들어준 ‘그레이스’의 마지막 작품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자신을 밝히는 작품이 될 터였다.
이 작품은 ‘진실’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축소 마법진과 조합 마법진을 함께 사용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장신구형 아티펙트도 이르지 못했던 경지를 내보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8성에 올랐음을 알리리라.
카이는 ‘진실’에 진심을 담아 제작하기 시작했다.
엘디아는 여왕으로 국정에 임하는 동안 마음을 다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저 한 잔의 차를 즐기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사치였다. 나머지는 모두 귀족 연합의 빚을 상환하는 중이었다.
한가로이 차를 마시던 엘디아의 곁으로 시종장이 다가왔다.
“전하. 초대장이 왔습니다.”
엘디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내게 초대장을 보내는 눈치 없는 이가 있단 말인가?”
“안타르시아의 시장이 보낸 초대장입니다.”
엘디아는 그 말에 초대장을 받아 보았다. 그걸 펼쳐본 엘디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의 신작이 나왔다네?”
예전에는 ‘그레이스’를 탐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스’를 손에 넣고자도 했었고, 협업을 꿈꾸던 적도 있었다.
허나 이제는 감히 ‘그레이스’를 탐낼 수 없다. ‘그레이스’를 탐내기는커녕 안타르시아의 입장료를 낼 돈도 없다.
“되었다. 가 봐야 마음만 아플 뿐이니.”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 함께 가지.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눈치만 보이는 것 같으니.”
엘디아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신령의 대마법사 메르샤가 있었다. 엘디아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시장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메르샤는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답했다.
“요즘은 내가 시장인지 비공정 운전기사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레이스’의 아벨이 특별히 초대하더군. 이번 작품은 꼭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아벨이요?”
자신에게 아줌마에게는 관심 없다고 했던 그 남자가?
순간 엘디아의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그레이스’는 엘더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수익을 낸 곳. 그곳의 주인인 아벨이 자신을 특별히 초대했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로 그를 잡을 수 있다면 귀족 연합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고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다.
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안타르시아에 가려면 꾸미고 가야 하니까요.”
돌싱 후 대마법사-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