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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83화 (83/150)
  • 083화 전쟁 배상금

    레인은 앞에 선 자를 경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들어왔다면 적어도 7성급 이상의 대마법사라는 뜻.

    그러고 보니 엘도 왕국에 7성급 대마법사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가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지만, 에빌 마탑에서 그의 참전은 없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믿고 전쟁에 나섰고, 대승을 거두는 중이었다.

    에빌 마탑의 탑주인 악몽의 대마법사는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다. 그래도 장로가 둘이나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진입을 알지 못했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자라는 말.

    그렇다고 일국의 국왕이 겁에 질려서야 쓰나?

    레인은 태연히 자신의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앞에 선 마법사에게 물었다.

    “제안이라···. 들어볼까?”

    카이는 레인이 태연하게 구는 것을 보고 역시 국왕답다고 여겼다.

    “정전 협정을 맺고 돌아가도록 해.”

    “정전 협정? 정복이 끝나가는 이 와중에? 길어야 한 달이면 내 손에 들어올 엘도 왕국을 놓아주라는 건가?”

    “그래.”

    레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뒷말을 듣고 싶었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물론이지. 그렇게 하면 살려 줄 테니까.”

    “하! 내가 죽음을 두려워 할 것 같은가?”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러더라고.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도 막상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살려달라고 질질 짜지.”

    레인은 카이를 바라보았다. 귀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목숨이 위협을 받을 일이 적다. 몸값을 내면 되니까.

    왕족인 그는 더욱 위험할 일이 없었다. 엘도 왕국을 정복하고, 엘디아 여왕을 손에 넣어도 그녀를 품에 안을 뿐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선 카이의 눈빛은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자신을 죽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죽이겠다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레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 걸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안다면 고작 내 목숨 하나 가지고 제안하지는 못할 거다.”

    역시 이 인간도 보통 인간이 아니다.

    제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패한다면 왕위에서 내려와야 할 정도인가?

    카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전 협정을 맺으며 전쟁 배상금을 받아가면 되잖아.”

    “내 손에 들어올 것을 포기하는 대가라는 건가?”

    “그래. 전쟁 배상금으로 1,100억 프랑 정도를 받아가면 되겠지.”

    레인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엘도 왕국과는 오랜 시간 전쟁을 벌여오기도 했지만, 이번에 작정하고 일을 벌인 것은 엘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그레이스’에게 대륙의 큰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엘더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엘더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엘더가 지금까지 벌었던 돈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그 돈을 전쟁 배상금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단순히 전쟁 배상금만 받으라는 건가?”

    카이가 손을 움직이자 그 마력이 움직여 깃발들이 움직였다. 깃발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자리를 잡았는데 국경선이 크게 바뀌었다.

    전쟁에서 패했으니 영토를 빼앗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잃은 성 전부가 아니라 일부는 되찾았다.

    “국경선은 이 정도면 되겠지.”

    레인은 카이가 그려내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이번 전쟁은 왕도로 진격하기만 하는 중이었기에 보급로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정복하지 못한다면 영지들을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저렇게 국경선을 다시 긋는 것이 좋았다.

    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레인의 시선이 카이를 향했다. 이 자가 정말 무결의 대마법사였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다 여겼다.

    1,100억 프랑을 현물로 내놓으려면 엘도 왕국이 휘청인다. 왕가가 힘을 잃으면 귀족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걸 안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 없었다.

    그러니 더 정체가 궁금해졌다.

    카이는 레인의 대답을 듣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정전 협정의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나는 다시 찾아올 거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사람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상관없어. 허튼수작 부리면 내가 다시 찾아올 테고 그때는 정전 협상 다위 없이 죽여버릴 테니까.”

    그리 말한 카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레인은 그 모습을 보고 옆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어서 던졌다. 허공을 가르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본 레인은 인상을 굳혔다.

    투명화 마법인가 싶어서 왔는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설마 공간 이동이라도 한 건가?

    공간 이동은 오직 8성 대마법사의 영역.

    미치광이와 같은 수준의 적이란 말인가?

    레인의 뺨에서 땀방울이 하나 흘렀다.

    타메아 왕국군이 진군을 멈추고 대기했다. 그사이 돌아온 윌리스는 무결의 대마법사가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음을 전했고, 외무대신이 움직였다.

    타메아 왕국군에 레인 국왕이 친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타메아 왕국에서 귀족들이 다시 병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타메아 왕국에서 모이는 병사들의 수가 3만에 달한다고 하니 그들까지 더해진다면 왕도가 뚫리는 것은 당연한 일. 정전 협정을 위해서 외무대신 도노반이 타메아 왕국군을 찾아갔다.

    타메아 왕국군의 진영을 가로질러 가던 도노반은 새삼 그들의 사기를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들은 이미 이긴 전쟁이라 여기고 있었다.

    무결의 대마법사가 나서야 간신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군부 대신 윌리스도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은 외무대신인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일.

    일단 협상에 대한 많은 권한을 받아왔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이번 협상을 지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왕도에 모인 병력을 다 더해도 저들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타메아 왕국에서 출전 준비하고 있는 병력일까?

    무조건적인 항복만 아니길 바라야 했다.

    그렇게 가장 큰 천막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레인 국왕이 상석에 앉아있었고, 그의 좌우로 이번에 군을 끌고 온 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도노반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하고 명치에 대었다.

    “엘도 왕국의 외무 대신을 맡은 도노반 폰 레비스 백작입니다. 타메아 왕국의 레인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인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그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도 좋다.”

    도노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뒤로 의자가 하나 놓였다. 도노반이 자리에 앉자 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외무 대신이라는 이가 우리 군을 찾아온 것을 보면 엘디아 여왕의 말을 전하러 온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어디 들어보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노반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정전을 바라고 계십니다.”

    “정전?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레인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은 눈빛만으로 도노반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도노반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정전에 합의하고 군을 물리신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레인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용병왕 카이저를 고용해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올 때는 언제고 지금은 정전을 해달라?”

    “그건···.”

    도노반으로서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국경을 넘은 것은 타메아 왕국군이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레인은 가만히 도노반을 바라보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좋다. 곧 추수 시기도 다가오고 하니 전쟁을 이어가는 것도 백성들에게 해가 되니 내 요구 조건을 말하겠다.”

    도노반이 귀를 기울이고 있자 레인은 간단히 말했다.

    “국경의 헤스, 파딜라, 카손, 킬고르 성을 내놓아 새로이 국경선을 그리고 전쟁 배상금으로 1,100억 프랑을 일시불로 요청한다. 단 이것은 협상 불가의 조건이다.”

    도노반이 눈을 크게 떴다. 성 네 개를 내주고 국경선을 새로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문제는 입이 떡 벌어지는 전쟁 배상금이다.

    레인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받아들이겠나?”

    “여왕 전하에게 허락을 구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휘 내저었다.

    “그리하라. 십 일의 기한을 주겠다.”

    도노반은 예를 표하고는 떠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인에게 모였던 이 중 하나가 물었다.

    “전하. 어찌하여 엘도 왕국을 정복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레인은 그 물음에 손을 휘 내저었다.

    “되었다.”

    어제 자신을 찾아온 마법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전쟁을 이어갈 것인가?

    그의 말대로 정전 협정을 했으니 이제 저들의 반응을 보면 될 일이다.

    엘디아는 외무 대신 도노반이 가지고 온 정전 협상 내용을 듣고 이를 뿌득 갈았다.

    “네 개의 성과 전쟁 배상금 1,100억 프랑을 내놓으라고?”

    “예. 그리 전했습니다.”

    이번에 군이 출정하는데 든 돈을 제한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600억 프랑 정도였다. 왕궁의 모든 재산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700억 프랑이 한계였다.

    그런데 1,100억 프랑이라니?

    그건 왕가의 힘만으로 만들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대신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왕가의 대신이란 왕도에 머물며 영지 대신 왕가에서 나오는 돈을 받는 이들. 그들을 털어봐야 돈이 나올 구석도 없었다.

    “협상은 불가하다고요?”

    “예.”

    차라리 성을 더 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으나 협상 불가라고 쐐기를 박아 놓았으니 곤란했다. 그렇다고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들이 군을 움직일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때 시종장이 다가왔다.

    “엘제토 후작이 회의에 참석하고 싶다고 합니다.”

    엘디아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게 하세요.”

    문이 열리고 엘제토 후작을 비롯해 귀족 연합의 귀족 셋이 들어왔다. 엘토르 국왕이 죽고 엘제토 후작은 귀족들을 모으고 있었다.

    엘디아가 여왕의 위에 오른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정전 협상을 하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그 내용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엘제토 후작이 꺼낸 말에 도노반이 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노반이 설명했다.

    “국경의 헤스, 파딜라, 카손, 킬고르 성을 내놓아 새로이 국경선을 그리고 전쟁 배상금으로 1,100억 프랑을 요청한다고 했습니다.”

    엘제토 후작은 그 말을 듣더니 침음성을 삼켰다. 성을 넷이나 빼앗기는 것도 문제였으나 전쟁 배상금도 만만치 않았다. 보통은 전쟁 배상금을 시간을 두고 갚는데 일시불로 그만한 돈을 구하는 것은 그것만 해도 큰일이었다.

    엘제토 후작의 시선이 엘디아를 향했다.

    “성을 내주는 것도 큰일이나 전쟁 배상금을 만드는 것도 일이겠군요. 전하. 솔직히 묻겠습니다. 왕가에서 그 배상금을 모두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엘디아가 아무런 말도 못 할 때 엘제토 후작이 입을 열었다.

    “국서가 저지른 이번 전쟁의 배상금은 왕가에서 갚는 것이 순리이니 말해보시지요.”

    엘디아도 전쟁 배상금 따위 혼자서 시원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저들도 아무런 말을 못할 테니까.

    엘디아가 말을 못하고 있자 엘제토 후작이 말을 이었다.

    “엘더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을 생각하면 못해도 800억 프랑은 있을 테고, 왕가의 재산까지 긁어모은다면 1,000억 프랑까지 준비할 수 있을 것이오. 내 말이 맞습니까?”

    엘디아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엘제토는 이재에 밝아 상단을 이끄는 바 엘더의 수익에 대해서는 감을 잡고 있었다. 다만 그간 엘디아가 돈을 많이 쓰기도 했고, 이번 전쟁의 군비로도 많이 들어갔다.

    가지고 있는 사치품까지 모두 팔아도 마련하지 못할 돈이었다.

    “왕궁의 보고를 연다고 해도 모두 마련할 수 없는 돈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마련할 수 있습니까?”

    추궁하듯 묻는 말에 대신들이 노기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엘제토 후작은 여유가 있었다. 엘디아는 분을 참지 못해 주먹을 꼭 쥐었다.

    “최대로 800억 프랑이 한계에요.”

    엘제토 후작은 그 말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디아는 그 시선에도 더는 말할 것이 없었다.

    엘제토 후작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왕가의 창고까지 열어서 긁어모았음에도 800억 프랑이 한계라면 나머지는 귀족 연합에서 모아서 내겠습니다. 단, 왕가 재정에 대한 감사를 앞으로 귀족 연합에서 하겠습니다.”

    “후작!”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왕가에서 지는 것이니 귀족 연합에서 300억 프랑에 대해서도 왕가 수입에서 국채 이자에 맞춰서 10년간 상환해야 함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엘디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엘제토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음을 정하거든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엘제토 후작이 귀족들을 데리고 떠나자 엘디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고 대신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고, 회의실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돌싱 후 대마법사-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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