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자극
여왕의 자리는 생각한 만큼 좋지는 않았다. 특히나 전쟁으로 바쁜 지금은 온종일 업무를 봐도 업무가 끝나지 않았다.
한창 업무를 보던 엘디아는 잠시 쉬기 위해 옆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서류를 보며 손을 내밀었는데 찻잔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렸다.
파각.
찻잔이 깨지며 차가 바닥에 쏟아졌다. 엘디아는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인상을 굳혔다.
“전하!”
엘디아는 깨진 찻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리퍼의 여인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말을 꺼내는 엘디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째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현실이 됐다.
리퍼 여인은 무감정하게 보고를 올렸다.
“군에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확인 결과 국서는 사라졌고, 센츄리온 전멸, 병력 5만이 모두 죽었습니다.”
“국서가 사라져?”
“···예.”
“죽은 것 같다는 건가?”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군이 몰살당할 동안 그냥 있지 않았겠지요.”
엘디아는 인상을 굳힌 채 물었다.
“국서가 죽었다는 가정하에서 지금 상황은 어떻지?”
“국경을 지키던 병력까지 동원했기에 지금 국경 수비대의 병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으로 그 병력이 고작 3천입니다. 그리고 지금 국경으로 몰려오는 타메아 왕국군은 3만에 달한다고 하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국경이 뚫린다는 건가?”
“예. 저희가 국경을 뚫고 들어갔던 것 이상으로 밀릴 것입니다. 이번 전쟁은 국서를 믿고 귀족들도 가진 병력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덕분에 왕국의 군사력이 크게 약해진 상황입니다.”
엘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최악의 상황은 어떤 거지?”
“국서를 쓰러트린 이가 적의 군을 이끌고 온다면 왕도도 위험합니다.”
“왕도가 위험하다?”
“예.”
엘디아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본 그녀가 인상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무결의 대마법사가 있는 데도 그들이 밀고 들어올까?”
잠시 대답이 없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무결의 대마법사가 국서를 이겼다고 하나 그에 필적하는 이가 타메아 왕국에서 지키고 있다는 뜻이니 그들이 군을 멈출 리는 없습니다. 타메아 왕국의 현 국왕인 레인 국왕이라면 더욱 군을 멈출 리가 없습니다.”
“항복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여인은 항복이라도 받아주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엘디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국서를 죽인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도록 해.”
“예.”
여인이 사라지자 엘디아가 입을 열었다.
“가서 군부 대신과 외무대신을 불러와라.”
“예.”
엘디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창가에 가서 섰다. 또 하나의 제국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꿈이 이렇게 허무하리 만치 무너질지 몰랐다.
제국이 될 꿈을 잃었다고 해도 자신의 대에서 왕국을 잃을 수는 없다. 엘티온을 위해서라도.
“군부 대신과 외무대신이 도착했습니다.”
엘디아는 곧 회의실로 나갔다. 아무리 마음이 흔들린다고 해도 자신은 여왕이다.
회의실로 나가는 동안 엘디아는 마음을 추스르고,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태를 따라 했다. 클란드라를 따라서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걸음을 옮긴 엘디아는 대전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앞에 서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자리에들 앉으세요.”
모두 자리에 앉자 엘디아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국서는 실종, 센츄리온이 전멸, 왕국군이 몰살 당했다고 해요.”
군부대신과 외무대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이리 태연히 전할 줄은 몰랐다.
엘디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국경 수비대가 3천 밖에 남지 않았고, 인근 영주들이 병력을 끌어모은다고 해봐야 영지민들을 이용한 병력. 그들로는 타메아 왕국의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막을 수 없어요.”
군부대신 윌리스가 그 말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일단 귀족들에게 사실을 알린 후에 병력을 왕도로 모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외무대신 도노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왕국군이 몰살 당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귀족들은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왕도에 있는 수비군이 5천에 그들이 병력을 모아온다고 해봐야 1만 정도. 차라리 정전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자는 말이오?”
“이미 싸워서 병력을 잃지 않았소!”
“하지만 아직 왕국에는 무결의 대마법사가 있소. 그가 왕도로 와준다면 아무리 적들이 왕국군을 몰살시킨 이들이라고 해도 왕도를 쉬이 넘볼 수 없소.”
“전쟁에 함께 할 것이었다면 왕국군과 함께 전장에 나섰을 것이오!”
윌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무결의 대마법사가 미쳤소? 전부인의 새남편과 함께 전장에 나가게!”
“대신! 미쳤소이까!”
윌리스도 홧김에 너무 막 지른 것을 깨닫고는 얼굴색이 변했다. 엘디아의 뒤에서 그녀를 지키던 프레드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윌리스는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왕국의 위기이니 무결의 대마법사도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이오. 정전 협상을 한다고 해도 저들의 기세를 한 번 꺾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디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군부대신은 무결의 대마법사에게 연락하고 귀족들의 병력을 모아오세요. 외부대신은 타메아 왕국과 협상할 협상안을 마련해 오세요. 동시에 진행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둘이 그리 대답하고 물러나자 엘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설마 무결의 대마법사를 불러오자는 말을 할 줄이야.
자신의 결혼식에 와 행복을 빌어줬으니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오지 않을까?
엘티온을 생각해서라도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지로 돌아온 카이는 왕국군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타메아 왕국군의 압승으로 끝난 전투. 카이저의 죽음과 함께 수많은 병력이 죽어 나간 전투였다.
어지간하면 항복을 받아도 될 법도 하건만 병력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흑마법사와 관련된 것들을 숨기기 위해서였으리라.
덕분에 왕국이 발칵 뒤집혔겠다 싶었다.
카이저가 죽고 왕국이 위태로운 상황.
어차피 왕국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카이저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카이가 직접 손을 쓸 생각이었다.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지만, 엘토르 국왕을 죽인 것은 그자가 먼저 선을 넘었다.
그러니 놈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이가 왕국을 위해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전쟁은 카이저와 엘디아의 욕심으로 벌어진 일. 그 일에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보다는 뱀의 신령. 아니 악령을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늑대의 화신 펜리르의 능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지구력도 대단해서 기동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라면 카이는 따로 공간 이동으로 움직이고, 그녀가 전력을 다해서 펜리르를 타고 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러면 기동력이 상상 이상으로 빨라질 것 같았다.
카이가 일행과 영지로 돌아왔을 때 테오는 왕국의 상황을 모두 전하고는 품에서 주먹만 한 구슬을 건넸다.
“이게 뭐냐?”
“영지 개발부에서 개발한 충전용 광구입니다.”
“충전용 광구?”
카이는 구슬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구슬 안에서 1성 마법 라이트의 광구가 나타나며 사방을 밝혔다. 카이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뚜껑에 시선을 주었다.
뚜껑을 열어야 빛이 나는 것. 뚜껑 안쪽에는 충전 마법진이 있었고, 그걸 열어야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1성 마법이라 주위를 아주 환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등불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재룟값이 얼마 들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영지민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는 충전용 광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에 제작비가 얼마나 들지?”
“10프랑입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하나 제작하는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카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만든 마법사가 누구야?”
“3성 마법사 하엘입니다.”
“30분 걸려서 10프랑짜리 만들어서 얼마에 팔 생각인지는 들어 봤어?”
“아뇨. 일단 쓸만한 물건이라 가지고 와 봤습니다. 지금 영지 개발부에서 어떻게 하면 제작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연구 중이랍니다.”
카이는 잠시 턱을 괴고 그걸 바라보았다. 충전하고 그걸 이용해 1성 마법을 사용하는 간단한 도구였지만, 적어도 이건 축소 마법을 이용해 영지민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제작비가 10프랑이라면 20프랑 정도면 살 수 있을 물건이었으니까.
다만 마법사가 30분씩이나 매달려서 만들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제작 시간을 줄일 방법은 카이도 연구해 봐야 했다.
그리고 그건 금세 답이 나왔다.
“하엘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에 하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카이를 보고는 꾸벅 고래를 숙여 보였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마법사게에게 예절을 바라서는 안 됐다.
카이는 그가 만들어 온 충전용 광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네가 이걸 개발했다고?”
“예.”
“제작 시간을 줄일 방법을 알아냈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카이는 그 말에 충전용 광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영지민 전체에 먼저 사용하고 영지의 도로마다 사용하려면 적어도 일만 개는 필요하다. 그리고 장차 왕국 전역을 넘어 대륙에 내다 팔려면 수십만, 수백만 개를 만들어야 할 수도 있어.”
“예?”
하엘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카이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이 구슬과 뚜껑 모두 재료 자체는 간단히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이렇게 많은 물건을 만들면 분명 수급에 문제가 생기게 될 거야. 이걸 이용하려 할 자도 있을 테고. 그러니 영지 개발부를 지원할 상단 하나를 만들어야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이가 하엘에게 말을 이었다.
“이건 마법진을 찍어내는 기계를 만들도록 해. 마정석 가루만 넣으면 될 수 있도록. 마법사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게 만들면 영지민을 고용해서 만들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어려운 마법진도 아닌데 누가 훔치지 않을까요?”
“축소 마법진으로 만든 거야. 지적 재산권이 보호되는 동안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해. 그전에 선점하면 돼. 어쨌든 이걸로 영지민들의 밤이 밝아지겠군.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하고 제대로 된 마법진을 새길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와.”
“그리하겠습니다.”
마법 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저렴하고, 소형의 물건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대량으로 생산해서 뿌린다면 대륙의 밤은 밝아질 터였다.
영지민만이 아니라 대륙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어줄 것이었다.
대륙의 밤이 밝아지면 그것을 시작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카이가 손을 내젓자 하엘이 물러났다.
카이는 테오를 불러서 물었다.
“팔레스 경은 아직 안 왔어?”
“지금 오는 중입니다.”
“그가 오거든 영지 상단을 꾸려야 한다고 알려줘. 충전식 광구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선점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상단을 인수하는 것이 빠르겠는데요? 무결의 대마법사 영지 상단주라는 자리라면 탐낼 상단주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 그럼 그건 알아서 해 봐.”
테오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카이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일감이 늘어나는 게 좋은 거야?”
“밑에 아이들이 있어서 그들에게도 일도 가르치려고 그러는 겁니다. 애들이 잘 배우더군요.”
“그럼 다행이군.”
“아직 셋이 더 필요합니다.”
카이는 그 말에 테오에게 가방을 하나 던져줬다. 테오는 날아온 가방을 받아들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전에 그겁니까?”
“그래. 너 이외에는 쓰지 못하니까 남 빌려주지 말고.”
“물론이죠.”
테오가 희희낙락하며 떠나는 모습을 본 카이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문득 메르샤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대륙에 널리 풀어 놓은 비공정을 떠올린 카이는 바람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비공정을 생각했다.
퀸은 이용하지 못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에게 비공정은 충분한 기동력을 줄 수 있으리라.
뱀의 신령과 싸워야 한다지만 뚜렷하게 그들을 추적할 방법도 그리고 벽을 넘을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 지금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비공정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자신을 도울 대마법사와 마법사도 하나 있으니까.
영지 개발부의 개발품에 자극을 받아 오랜만에 연구 혼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돌싱 후 대마법사-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