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검성의 검
카이는 커다란 비늘을 살펴보았다.
뱀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뱀의 비늘처럼 보였다. 그런데 크기가 사람만하니 이게 정말 뱀의 비늘이라면 대체 얼마나 큰 뱀인가?
독무가 생긴 것을 보면 분명 뭔가가 이곳에 있었다. 그런 독무를 뿜어낸 존재가.
테오르와 싸우고, 맥클렌, 퀸과 대적했으며 바헬의 시체를 가지고 도망친 자가 있었다.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신령인가?”
카이가 보았던 늑대의 신령. 그 수준이라면 가능할 법도 했다.
멀리서 느꼈음에도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카이가 만든 ‘동결의 로브’만 해도 늑대의 신령이 충전해준 최상급 마정석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동결의 로브’는 퀸도 멈추게 하는 것이라 이번에는 쓰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서 적을 상대할 때에는 이만한 것도 없기는 했다.
이곳에 나타난 뱀이 신령이라고 한다면 그자는 바헬의 시체를 왜 가져간 걸까?
그제야 놈이 말했던 도움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해졌다. 다만 그걸 물을 수 있는 상대가 없다. 놈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신령족을 직접 찾아가 확인해 봐야 하는 건가?
카이는 사람 크기의 비늘을 들어서 가방에 챙겼다. 떨어진 비늘은 고작 세 개.
가방에 비늘을 챙긴 카이는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대기 중이던 그림자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폭포의 물이 빨려들어가고 이변이 생긴 이후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카이와 퀸뿐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는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정체를 모르는 ‘뱀’이 수몰의 대마법사를 공격했고, 검성이 대적하는 사이에 몸을 빼냈다. 수몰의 대마법사가 심각하게 다쳐서 신성 교국으로 검성과 함께 데려다줬다. 그러니 제국에 보고하고 돌아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림자들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는 곧장 움직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카이는 퀸과 함께 말에 올랐다.
그림자들도 떠났고, 카이도 퀸과 함께 바헬의 은신처를 떠났다.
클레바논은 클란드라와 독대한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태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구나. 검성이 함께 머물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좋을 것 같다.”
“제가 다녀올게요.”
“그래. 태사의 곁에 있어 주고 검성은 돌아오게 해다오. 신령의 대마법사 도움을 얻을 수 있겠느냐?”
“비공정을 빌려줄 거예요.”
수몰의 대마법사가 없을 때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은 비공정뿐이었다. 특히나 메르샤가 직접 움직일 때는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그러니 지금은 메르샤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미치광이가 죽었지만, 태사가 저리되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일단 태사 곁에서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라.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면 연락하고.”
“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예.”
클란드라는 클레바논과 헤어진 채 걸어가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치광이 사냥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태사가 저리되었으니 공국을 받는 것은 물 건너간 상황이다.
메르샤와 연락할 수 있는 통신 구슬을 켠 클란드라는 용건을 얘기했다.
“부탁할 게 있어요.”
-나 비싼 몸이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죠. 최대한 빨리 신성 교국으로 가야 해요.”
-···알겠어. 곧 간다.
퀸이 말이 없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검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명상만했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카이도 그동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헬이 죽으면서 만든 불꽃을 연구하는 중이다. 헬리움으로 흩어내지 못하는 불꽃.
카이가 순수 마력만을 헬리움 옆에서 모을 수 있는 것처럼 바헬은 이 불꽃을 만들었다. 게다가 이 불꽃은 스스로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카이도 이걸 챙기기 위해서 불꽃을 응축한 마력으로 구슬처럼 감싼 상태였다. 마력으로 응집한 구슬을 풀어서 그 안에 든 불꽃을 꺼냈다.
마력 구슬 안에서도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바헬이 죽어서 마력이 끊겼음에도 꺼지지 않고, 공기가 없어도 홀로 타오르는 불꽃.
술식으로 만든 불꽃이었다면 카이도 그걸 해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이 불꽃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일은 퀸은 쉴 때 멍하니 앉아있고, 카이도 불꽃을 앞에 띄워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홀로 타오르는 불꽃은 아직 마음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물건이었는데 멍하니 보다 보면 간질간질한 것이 뭔가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영지로 돌아가는 중에 테오에게 주기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엘토르 국왕의 자리를 엘디아 공주가 물려받아 여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전쟁은 카이저가 참전하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했다.
콜린스가 카이저를 죽여줄 거라고 여겼는데 어째서인지 오히려 전장에서 승기를 잡고 국경을 되찾고, 오히려 역공을 취하는 모양새라고 했다.
그리고 우선 대륙 서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망이 깔렸다고 했다.
국경을 넘어 영지까지 열흘 정도 남았을 때쯤 퀸이 검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퀸은 7성급 육체 강화자에 비견되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 보여주는 검은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허공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쩍 벌어지는 느낌이다.
시공간에 간섭할 수 있었기에 카이도 그녀 앞에 베이는 공간을 인지할 수 있었다.
“퀸. 어떻게 한 거니?”
퀸은 그 말에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뱀을 베던 검술이야.”
“검성 맥클렌의 검술?”
“응.”
퀸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악!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일정 부위의 공간이 베인다.
검성 맥클렌의 검술을 한 번 보고 배웠다는 건가? 지금까지의 시간은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카이가 놀라 바라보니 퀸이 입맛을 다셨다.
“이게 진짜 검술인가 봐.”
티투스가 들으면 화날 이야기였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점이며 검성의 칭호까지 받은 맥클렌의 검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저 검술을 따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여겼다.
퀸은 몇 번 검을 휘둘러 보더니 카이를 돌아보았따.
“나 헬리움이 필요해.”
“더 흡수할 수 있겠어?”
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최대한 많이 구해줘.”
카이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관에 머물고 있어. 재료 구해올 테니까.”
바헬이 만든 불꽃을 가두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지금이라면 헬리움을 만들면서 그 여파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는 국경 도시에 여관을 잡고 퀸에게 오늘 하루 있으라고 한 후에 곧장 공간 이동으로 안타르시아로 향했다. 안타르시아에 도착한 카이는 아벨로 분장했다.
바헬이 죽었으니 8성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8성임을 밝히는 것은 카이저가 죽고 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만약 카이저가 죽지 않고 승리를 거둬 온다면 그때 알리는 것도 나쁠 것이 없었다. 자신이 8성에 오른 것을 알면 과연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카이는 아벨의 모습으로 메르샤의 방으로 공간 이동했다. 메르샤는 갑자기 나타난 카이를 보고도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오는 거야?”
“왜 이리 반가워하는 거야?”
메르샤는 씨익 웃고는 가방을 하나 가져왔다. 어깨에 걸치는 가방인데 검정 비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카이가 멀뚱히 바라보자 메르샤가 가방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블랙 바실리스크의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야. 내구성 하나는 끝내주는 물건이지. 그리고 질리지도 않는 무난한 가방이거든. 이거 공간 확장 마법 걸어줄 수 있어?”
이미 만들어진 가방에 공간 확장 마법 거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샤가 손뼉을 쳤고, 곧 수레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진금화로 400개. 그리고 일반 금화로 200억 프랑. 그리고 현물로 100억 프랑 만큼. 나머지 300억 프랑은 원하는 대로 맞춰줄게.”
일반 금화는 100만짜리 금화가 가장 큰 것. 100만짜리 금화 2만 개가 있다 보니 방안이 금광으로 번쩍일 정도였다.
게다가 트리달리움도 한가득 구해왔고, 필요했던 최상급 영혼석까지 안타르시아의 창고를 탈탈 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었다.
카이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준비한 최상급 마정석도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가방을 만드는데 필요한 최상급 마정석이었다.
이걸 쓰고 재충전해서 쓸 계획이었으니 최상급 마정석은 많을수록 좋았다.
재료를 구하러 왔는데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다니 생각보다 이득이었다. 카이는 가방을 열어서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을 쓸어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메르샤가 뺨을 붉히며 기뻐했다.
“이게 다 들어간다고?”
수레가 몇 개였던가?
일부러 금화도 산더미처럼 준비하고, 재료도 왕창 준비해 놓은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방의 성능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카이는 태연하게 그것을 모두 챙겨 넣었다.
“이게 다 들어가면 안 무거워?”
“당연히 무게도 감소하지. 공간만 확장했을까?”
사실 지금도 평상시 들고 다니는 가방 정도의 무게밖에 안 느껴진다. 무게 감소에 특히 신경 썼던 것이라 그런지 이 정도 재료를 쓸어담았음에도 문제가 없었다.
“나머지 300억 프랑은 어떻게 준비해줄까?”
카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재료로 구해줘.”
“그래. 다음에 올 때는 가방이 완성되어 있겠지?”
“그래. 그러니 다음에 올 때까지 준비해 둬.”
카이가 공간 이동을 하려고 하자 메르샤가 얼른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뭐?”
메르샤는 안타르시아의 시장이고 카이가 대륙 서쪽에 이룬 정보망보다 더 넓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녀가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수몰의 대마법사가 신성 교국에서 치료받고 있어. 팔을 잃고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더라고.”
신성 교국에 직접 던져놓고 왔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는데 그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클란드라 황녀가 부탁해서 다녀왔지. 오는 길에 검성을 황궁에 데려다주고 왔는데 수몰의 대마법사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메르샤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네가 그랬어?”
“아니.”
딱 잘라 말했다. 자신보다는 검성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자신은 검성과 있었고, 그동안에 테오르가 당한 것이었기에 의심받을 것도 없었다.
제국의 도움으로 바헬을 잡아 죽였는데 그 보답으로 주기로 했던 것은 조합 마법진에 대해서 테오르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테오르가 저리되었으니 조합 마법진을 언제 배우러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조건을 걸 수도 있으리라.
어찌 되었든 카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자신은 조합 마법진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 8성급 아티펙트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흐음. 너 말고도 수몰의 대마법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있는 줄은 몰랐군.”
카이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는 그녀가 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다음에 또 오지.”
“벌써 가? 밥이라도 먹고 가지.”
퀸이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카이는 손을 휘 내저어 보이고는 그대로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휭하니 사라진 카이의 빈자리는 텅빈 방을 보면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빈 수레만이 늘어서 있는 모습.
메르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공간 확장 마법의 성능이 기대 이상이었다.
메르샤는 거울을 꺼내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말했다.
“그런데 여자를 찾아오면서 말도 안 하고 불쑥 찾아오고 그래.”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매일 최선의 모습으로 꾸미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다 욕조를 들여놓을까?”
반신욕을 하고 있으면서 기다리면 분위기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메르샤는 자신의 방을 꾸밀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돌싱 후 대마법사-퀸의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