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행복해라
오늘을 얼마나 준비했던가?
결혼식은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당연했고,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래서 드레스부터 모든 것에 힘을 줬다.
이번 준비에만 1억 프랑이 들었다. 게다가 하객에게 선물로 주기로 한 것들도 모두 엘더에서 만들었던 아티펙트들. 엘더의 이름으로 팔지 못하게 된 물건들이라 이번에 하객 선물로 풀어버릴 생각이었다.
축소 마법진의 가치를 떨어드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카이가 되찾아간 축소 마법진의 가치를 떨어트려 놓으면 그가 재기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행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지금 저기 앉아있는 클란드라 황녀와 메르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태연히 앉아있는 카이 때문이었다.
청첩장을 보냈으니 찾아올 수는 있다. 엘티온을 볼 겸 찾아올 수도 있고.
하지만 자신의 결혼식에서 자신보다 더 빛나고 있는 이들을 양옆에 끼고 앉아서는 안 됐다. 덕분에 지금 귀족은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신경 쓰여?”
옆에 선 카이저의 물음에 엘디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왜 불렀어?”
“와서 보라고. 가장 행복한 나를.”
카이저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그럼 웃어. 저 남자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곁에 있는데.”
엘디아는 카이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야망과 야심을 보고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가진 금력과 카이저의 무력이 더해지면 얼마든지 대륙 서부를 통일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카이가 자신에게 모두 맞춰주는 남자였다면 이 남자는 자신을 리드하는 남자다.
엘디아가 진심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전 남편이 제국의 꽃이라고 불리는 클란드라 황녀와 안타르시아의 시장을 좌우에 끼고 있던 무슨 상관인가?
안타르시아의 시장이라면 카이와 재혼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할머니다. 그리고 클란드라 황녀는 재혼 상대가 될 수도 없다.
제국의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 둘과 결혼해봐야 자신만큼 재혼에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자신은 대륙 서쪽에 새로운 제국을 만들 생각이었다.
카이저는 엘디아의 기분이 풀린 것을 보고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결혼을 위해 엘도 왕국에 나와 있던 대주교가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결혼식을 시작해도 되겠소?”
카이저와 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주교가 결혼식을 시작했다.
카이는 옆에 앉은 클란드라와 메르샤를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가장 빛나고 싶어 하던 엘디아가 지금은 클란드라 황녀는 물론이고 메르샤 보다도 빛이 나지 않았다.
고귀하기도 하고 영향력도 그녀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카이의 곁에 남았다.
“추문이 일 겁니다.”
카이의 말에 클란드라는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추문이 일면 다행이다.
추문을 핑계로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
일단 미치광이 사냥 작전에 대해 알리고 그의 의견을 들어야 했는데 마침 엘디아 공주의 재혼 소식이 전해졌다. 청첩장까지 받은 마당에 핑계삼아 찾아왔다.
그가 아벨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그레이스’가 엘더를 죽이던 이유도 짐작이 갔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도 엘디아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아 추문을 감당할 생각으로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클란드라는 저 앞에서 결혼식을 벌이고 있는 엘디아 공주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녀를 재혼까지 하게 한 걸까?
여자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왜 저리 남자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결혼식을 축원해주는 대주교가 손짓하자 성가대가 축가를 불렀다. 재혼이면서도 이렇게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면 대충 엘디아가 어떤 여자인지 짐작이 갔다.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여자.
그런 그녀가 택한 남자. 이번에는 용병왕 카이저다.
돈으로 용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으로 아예 눌러 앉히는 느낌. 마침 타메아 왕국과의 국경에 병력이 몰려 있는 상황.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니 용병왕이라는 패가 탐이 났으리라.
대륙 서쪽은 7성급 인간들이 없었으니 용병왕을 쥐고 있다면 전쟁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녀는 전쟁을 벌이려고 할지도 몰랐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에 결혼식의 서약이 끝나고 카이저는 사람들 앞에서 엘디아 공주의 허리를 왼팔로 끌어안은 채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엘디아 공주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는 모습에 클란드라는 슬쩍 카이를 돌아보았다.
전부인이 재혼하는 결혼식에 이 남자는 왜 참석한 걸까?
그래서 저런 꼴 보지 않아도 됐었는데 보고 있는 지금 그의 기분은 어떨까?
그런 마음에 돌아보니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의 손뼉을 쳐주고 있었다. 다들 카이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먼저 기립박수를 보내는 모습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카이저와 엘디아는 야외 정원을 가로질러 퇴장했다. 카이저는 왼팔로 엘디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기면서 카이를 흘끔 바라보았다.
카이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남자가 뭐하나 싶어 바라보던 메르샤가 눈을 크게 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에 카이저와 함께 걷던 엘디아는 걸음을 멈췄다.
엘디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와 결혼식이 있던 날. 그 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그때는 카이가 내린 것이 아니라 겨울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는데 지금 카이는 늦여름에 하늘에서 눈을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본 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행복해라. 이건 결혼 선물.”
엘디아는 손을 내밀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았다. 눈의 결정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가 살며시 녹아내렸다. 신기한 것은 바닥에 눈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환상처럼 사라졌다.
엘디아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몸이 회복되고 나서도 그는 엘더를 살리기보다 오히려 엘더의 지분을 되찾아 축소 마법진의 지적 재산권을 이양해 갔다.
짜증이 났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축하해준다고 하니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다.
카이저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 결혼하면 연락해라. 선물을 보낼 테니.”
전남편과 현남편이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귀족들은 모두 관심을 보였다. 분명 카이에게 팔이 잘린 카이저였음에도 은원 관계는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저는 엘디아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올리더니 뛰어올랐다.
카이는 멀어지는 그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다시 결혼할 일은 없을 테지만, 그 전에 카이저는 죽으리라.
카이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쏟아지던 눈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메르샤가 감탄했다.
“무결의 대마법사가 빙계 마법에 능통하다고 하더니 이런 잔재주는 언제 익힌 거야?”
카이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실속 없는 선물을 했다. 잠깐 마력 한 번 돌리면 되는 일로 선물이라고 해줬다. 게다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카이는 클란드라와 메르샤를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온 거야?”
카이의 물음에 메르샤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네가 날 부르지 않으니까 직접 왔잖아.”
카이는 클란드라를 돌아보았다. 메르샤가 원한다고 클란드라를 부를 수는 없었다. 반대로 클란드라가 원한다면 메르샤가 비공정을 내줄 수는 있지만.
카이의 시선을 받은 클란드라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답을 가져왔어요.”
카이가 클란드라에게 부탁했던 것은 미치광이 바헬의 근거지를 찾아달라는 것. 그런데 그 답을 가져왔다는 말이었다.
카이는 과연 제국이라는 말을 속으로 내뱉으며 말했다.
“영지로 돌아가지.”
카이의 시선이 메르샤를 향했다.
“비공정을 이용해도 돼?”
“얼마든지.”
메르샤가 미소를 짓자 카이는 다가오는 귀족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메르샤나 클란드라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넘쳐났지만, 월광 기사단의 호위를 받는 클란드라나 신령의 대마법사인 메르샤에게는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카이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엘티온은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주시오.”
카이는 그리 말하고는 식장에서 나오고 있는 엘토르 국왕을 향해 다가갔다. 엘토르 국왕은 카이의 뒤편에 선 여인 둘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엘토르 국왕은 그녀들과 인사했지만, 카이가 그녀들과 함께 온 것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가 틀어져 이혼했다고 여겼는데 그래도 눈을 내려주는 것을 보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풀렸나 싶었다. 하긴 저런 미인 둘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누그러진 건가 싶기도 했다.
카이는 엘토르에게 다가가 저 멀리 테오가 지키고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차. 엘티온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엘티온에게?”
“예. 마차로서의 편의성을 손본 아티펙트입니다. 엘티온에게 주려고 만들어 가져온 겁니다.”
“알겠네. 그런데 혹시 나도 부탁할 수 있겠나?”
축소 마법진을 다루는 카이가 엘티온에게 주려고 만든 아티펙트라면 저 마차의 성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카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엘토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신이 엘디아의 결혼을 허락한 이상 카이가 자신의 편의를 봐줄 이유는 없었다.
“뭐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카이가 대답 대신 멈춰서서 바라보자 엘토르는 뒤편을 흘끔 보며 물었다.
“저 둘과는 어떤 사인가?”
카이는 잠시 고민해 보다가 답했다.
“같이 일하는 사이입니다.”
“일?”
카이는 더 자세한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돌아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엘토르는 입맛을 다셨다.
무결의 대마법사는 왕가가 다시는 품을 수 없는 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더 큰물에서 놀고 있었다.
신령의 대마법사와 클로젠 제국의 황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축소 마법진 설계의 지적 재산권을 이양한 이유도 아마 저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을까?
잠시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던 엘토르는 그래도 카이가 잘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가 마력 봉인을 당했을 때는 아나벨 성녀를 데려오기까지 했던 만큼 그에게 마음이 쓰였으니까.
엘티온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그 날의 모습을 떠올린 엘토르는 뒤에 선 시종장에게 말했다.
“엘티온의 궁으로 저 마차를 옮겨 놓도록 하게. 카이의 선물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전하고.”
“예.”
엘토르는 궁 안에서 떠오르는 비공정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마치 카이가 7성에 오르면서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아 묘한 감상이 일었다.
그때 궁정 마법사가 달려왔다.
“전하!”
엘토르는 다급하게 외치는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궁정 마법사는 주위에 귀족들이 모인 것을 보고는 낮게 속삭였다.
“타메아 왕국군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엘토르는 그 말에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엘디아의 결혼식에 맞춰서 국경을 넘었다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파렴치한 것들이.”
비공정을 타고 날아오르는 와중에 소란이 이는 모습을 보고 메르샤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놀란 표정으로 카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뭔가 조심하는 모습에 클란드라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타메아 왕국이 국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나 봐.”
“전쟁 선포도 없이요?”
메르샤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타메아 왕국이나 엘도 왕국이나 사이가 안 좋잖아. 휴전 중이었지, 종전이 아니었으니 언제든 전쟁은 벌이면 그만이거든.”
클란드라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카이를 돌아보았다. 미치광이 사냥 작전의 핵심은 카이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타메아 왕국과 엘도 왕국이 전쟁이 벌어지다니?
카이는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담담히 답했다.
“이번 전쟁에 난 참전하지 않아.”
그 말에 둘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에 카이는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당신들이 안도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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