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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52화 (52/150)

052화 나가 있어

순간 정적이 가라앉았다.

클란드라도 당황했고, 메르샤는 애가 자신을 너무 믿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8성이란 7성과는 그 격을 달리한다. 7성 둘이 덤빈다고 8성과 비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정점에 오른 이들이 8성에 오른 자들.

급이 다른 존재들이다.

“저기 ‘황궁’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라.”

메르샤가 중재하기 위해 나섰지만, 카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말없이 테오르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테오르는 잠시 카이를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

한참을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던 테오르가 뚝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쩌저적!

최상층의 강화 유리에 실금이 쩌저적 가는 것을 보고 메르샤가 긴장하며 카이의 뒤로 가서 섰다.

“테오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여기는 안타르시아에요.”

“그래서?”

테오르는 오히려 태연하게 묻고 있었다.

“이렇게 행패 부린 것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텐데요?”

테오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알리고 싶은가?”

메르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테오르가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고, 옆에 있는 클란드라도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안타르시아에 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다는 건 그들이 뜻을 굳혔다는 거다.

중립 지대인 안타르시아에서 작정하고 일을 벌이겠다는 것은 적어도 테오르 혼자의 생각일 리는 없었다.

제국, 그것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이리 막무가내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메르샤. 나가 있어.”

메르샤는 카이의 등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황제가 마음을 먹었다면 이번에 안 되면 검성까지 보낼 수도 있었다. 그 둘이 함께 온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이들이 나선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다.

사실 테오르에게 허락한 것만 해도 안타르시아의 모든 이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같이 죽자고 하면 도시를 무너트리면 될 일이지만 그런다고 테오르가 죽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지금까지는 다른 대륙의 큰손들을 봐서라도 과감히 손을 쓰지 않았던 테오르가 작정한 것이었다.

메르샤는 한숨과 함께 미안함을 가득 담아 카이를 바라보다가 물러났다. 단순히 물러난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 둘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녀도 몇 개 층을 비우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테오르는 카이가 메르샤까지 내보내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클란드라 황녀를 인질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을 벌이는 건가?”

“‘그레이스’의 최대 고객을 인질로 잡을 수야 있나?”

지금까지 나온 모든 제품을 클란드라가 사 갔는데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마음은 없었다.

“나가 계시겠습니까?”

테오르는 그 말에 카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클란드라까지 내보낸다는 건 인질도 필요 없이 진짜로 자신과 한번 붙어보겠다는 얘기였으니까.

두 가지 속성을 다루는 걸로 8성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여긴 건가?

테오르가 클란드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란드라는 잠시 카이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르가 상대를 죽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클란드라는 메르샤의 사무실을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이 남으니 테오르가 물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군. 카이.”

카이는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카이가 누군데?”

“아,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다루는 7성급 대마법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것보다는 무결의 마법사 카이가 7성에 올랐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잡아떼는 모습을 보니 테오르는 더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황궁으로 끌고 간 뒤에는 얼마든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테니까.

순순히 불든. 아니면 고문 끝에 불든.

“이야기할 시간은 많을 거야. 일단 자네의 마력을 봉인하고 나서 얘기하자고.”

테오르가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봉인하는지 모르겠지만, 카이는 마력 봉인이라는 말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해졌다.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테오르는 여유가 있었다. 저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지척에 있다고 해도 시공간에 간섭할 수 있게 된 8성 대마법사는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으니까.

바헬이 해내던 것을 생각하면 테오르도 해낼 수 있을 터였다.

그의 장기인 수계 마법은 쓰지 않아도 시공간의 간섭만으로도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길 터.

그렇다면 그 자존심을 꺾어 줄 때다.

‘그레이스’의 최대 고객이라는 점도 있지만, 제국의 8성 대마법사를 죽인다면 ‘그레이스’는 존재할 수도 없으리라.

그러니 자신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 정도로 각인시켜 놓는 것이 좋다. 그저 데리고 가고 싶다고 데리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최소한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눌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카이는 곧장 식탁을 밟고 뛰어넘었다. 카이가 달려드는 것을 보며 테오르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워 메이지였지.”

카이라고 확신하고 하는 말에 답하는 대신 곧장 주먹을 뻗었다. 어떤 마력도 품지 않은 순수한 주먹질.

그 모습에는 테오르도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간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일어서며 주위에 물방울을 만드는데 주먹을 뻗고 있던 카이와는 다른 시간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격의 차···익!”

갑자기 카이의 주먹이 빨라지더니 테오르의 턱을 후려쳤다. 다른 시간 속에 있다고 여겼던 테오르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턱을 맞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카이는 그런 테오르의 복부에 발을 차넣었다.

워 메이지로서 바닥을 개처럼 구르고 다닐 때 간단한 투술 정도는 배웠다. 이걸로 육체 강화자들과 드잡이질을 한다면 단숨에 떡이 되도록 얻어 맞았을 테지만, 상대가 마법사라면 얘기가 달랐다.

몸을 쓰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늙은이 하나 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마침 이번에 8성에 오르면서 육체의 능력도 향상된 지금이라면 방구석에 앉아 연구만 하는 대마법사를 마음껏 팰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니 반사적으로 몸을 빼내려고 했다. 공간을 이동해서 거리를 벌리고 머리에다가 물방울을 씌운 다음에 얘기해야겠다고 여겼는데 공간 이동을 하려는 순간 그의 마력이 덜컥 멈췄다.

마치 술식을 방해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카이가 휘두르는 주먹을 명치에 맞았다.

“꺼헉!”

다른 건 둘째 치고 걸치고 있는 로브 자체가 어지간한 물리 공격은 모조리 막아낼 수 있었다. 6성급 기사의 검도 받아낼 수 있을 로브였는데 어떻게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는가?

테오르는 숨을 쉬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사방으로 물방울을 쏘아냈다. 그의 마력이 담긴 물방울을 흩뿌리는 정도지만 그의 의념이 담긴 이건 7성 대마법사라도 작심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공격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서 물방울들이 사라졌다.

“공간 절단?”

테오르가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입에 담을 때 뛰어오른 카이의 무릎이 그대로 테오르의 턱을 후려쳤다. 테오르가 보기에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고, 그의 육신도 재구성이 되며 그 나이 때의 어지간한 이들보다 튼튼했다.

그러나 테오르는 워 메이지도 아니었고, 직접 몸싸움을 해본 기억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턱이 돌아간 테오르가 눈이 풀리면서 뒤로 넘어갔다.

카이가 마법을 쓰지 않은 것은 비전 마법을 내보이면 그 여파로 주변이 휩쓸릴 것을 염두에 둔 것도 있지만, 그의 한계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상대의 허를 찔러 육탄전으로 끌고 갔다.

예상대로 테오르는 싸움이라고는 주먹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이였다. 그러니 이렇게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었어도 정 안 되면 공간 이동으로 몸 하나는 빼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렇게 하면 퀸을 데리러 다시 와야 했기에 손을 쓴 것뿐이었다.

시공간 간섭만으로 승부를 가린 카이는 기절한 테오르를 두고 메르샤와 클란드라가 기다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메르샤는 VIP 손님들을 아래층으로 내려보내던 중에 카이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려오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벨?”

카이는 메르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짐들 실어주고 이번에 받은 돈 줘. 이만 돌아갈 테니까.”

“어, 어. 그래야지. 그런데 테오르님은?”

클란드라도 옆에서 뭐라 말하지 못하고 카이를 바라만 보았다. 카이는 그런 둘의 시선에 담담히 답했다.

“자.”

“자?”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샤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황제의 뜻으로 카이를 잡으러 왔는데 테오르가 그를 그냥 보내줬을 리가 없다. 그런데 태연하게 카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테오르가 그를 붙잡지 못할 상태라는 말.

설마 테오르를 쓰러트리기라도 한 거란 말인가?

카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메르샤와 클란드라를 지나쳐 달려온 퀸이 그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이는 그런 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영감 깨면 귀찮아지니 그 전에 보내 줘.”

“알겠어. 바로 준비해 줄게.”

메르샤는 테오르가 어떤 상태인지 너무 궁금했지만, 그래도 카이가 무사히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진금화 1,280개와 그가 이곳에서 샀던 모든 물품을 먼저 올려보냈다.

메르샤가 바삐 움직이는 동안 클란드라가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카이는 클란드라의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뜻이죠?”

“···예.”

“최대한 배려해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도 저희 물건을 낙찰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란드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아마 다시 보기는 힘들겠죠?”

카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제가 없어도 경매를 진행하는 데 문제는 없을 테니까요. 다음에는 굳이 제가 이곳에 올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레이스’의 주인 아벨에 대한 행적은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그나마 그 행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만한 이가 메르샤인데 그녀를 협박하는 것은 제국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메르샤가 다른 곳에 손을 쓰기 전에 잡아가면 다른 곳에서 알아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 서서 움직인 것이었는데 카이가 테오르를 물리치고 몸을 빼낸 순간 다른 곳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특히 신성 교국에서도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냥도 제국의 횡포에 대해 여론을 만들어서 그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할 텐데 그가 8성 대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신성 교국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클란드라는 카이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고는 물었다.

“혹시 딸인가요?”

카이의 품에 꼭 안긴 아이를 보며 묻는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딸입니다.”

8성 대마법사에게 이혼 한 번, 딸아이 정도는 흠도 아니다. 그런 그를 데려가기 위해서 대륙에서 얼마나 많은 구애를 보낼 것인가?

그러나 이미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자신은 그와 더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클란드라는 순수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앞으로도 ‘그레이스’를 응원할게요.”

카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메르샤가 준비해준 비공정을 타러 이동했다. 이미 그의 방에 있던 짐들은 모두 비공정에 싣고 난 후였다.

오늘은 메르샤가 직접 카이를 배웅해 주었다.

“미안해.”

카이는 메르샤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저 상대가 나빴을 뿐.

그리고 카이는 잘난 척 지껄이던 테오르를 시원하게 두드려패서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다음에는 경매에 참석하지는 않을 거야. 위탁 판매해도 수수료는 똑같지?”

“당연하지. 우리랑 계속 거래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당신 뿐이니까.”

이번 일로 메르샤도 마냥 당하고만 있을 여인이 아니었다. 이번 일을 공론화하는 것만으로 제국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 테니까.

카이가 비공정을 타고 떠나는 동안 메르샤는 그에게 8성에 오른 것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진금화를 가지러 갔을 때 대자로 뻗은 테오르를 보았으니까.

메르샤는 멀어지는 비공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연상은 안 되겠니?”

돌싱 후 대마법사-왕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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