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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47화 (47/150)
  • 047화 깨달음

    엘디아는 발코니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엘티온이 검술을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엘디아의 옆에는 카이저가 술을 비우고 있었다.

    카이저는 슬쩍 옆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소?”

    술병 하나 달랑 들고와 옆에 앉을 때는 의견도 묻지 않더니 지금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기에 엘디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들을 물렸다.

    프레드는 엘토르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카이저를 잠시라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는 상황이라 시녀들을 순순히 물렸다.

    그렇다고 카이저가 자신을 덮치거나 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대낮에 그랬다가는 그의 평판은 땅에 떨어질 테니까.

    엘디아가 시녀들을 물리는 것을 보고 카이저는 미소를 지었다.

    용병왕이라 불리며 7성 육체 강화 능력자인 자신과 단둘이 있자는 말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결의 마법사와는 별거 중이오?”

    “그걸 묻는 이유가 뭐죠?”

    카이저는 씨익 웃어 보였다.

    “왜긴 왜겠소? 대충 들어보니 왕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었다는 데다가 지난번 ‘플레이트’에 카이가 만든 것도 아닌 물건이 나왔다고 하니 분명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 여겨서 그런 거지.”

    “그건 저와 백작 사이의 일이에요.”

    카이저는 입맛을 다셨다.

    “남편이 있으면 안 되는데.”

    엘디아가 빤히 바라보자 카이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슬 나도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었거든. 공주 정도면 내 짝으로 어울릴 것 같아서.”

    엘디아는 카이저의 눈을 바라보았다. 탐욕으로 물들어 있는 그의 눈을 바라본 엘디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야수 같은 남성미를 풍기는 카이저를 보며 엘디아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끌고 흥분을 가라앉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다려요.”

    “뭘?”

    “무결의 마법사는 곧 죽어요.”

    카이저는 그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미망인이면 너무 끌리는데?”

    카이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디아의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미망인이 되거든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리 말한 카이저가 몸을 일으켜서는 멀어졌다. 짙은 남자의 체향에 엘디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고개를 들던 엘티온과 눈이 마주치자 엘디아는 미소를 지어 보여주고는 찻잔을 들어 붉어진 뺨을 가렸다.

    6성은 대륙에서 흔하지만, 7성부터는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든다. 게다가 대륙 서부에는 7성급 강자가 아예 없는 상황.

    용병왕 휘하의 병력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대륙 서부에서 또 하나의 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신성 교국이 대륙의 길목을 막고 있어 제국의 눈길을 피하고 있는 지금 용병왕의 병력을 손에 넣는다면 대륙 서부를 통일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클란드라 황녀가 제국을 등에 업고 그렇게 설치는 꼴을 보았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게 뭐 있겠나? 대륙 서부를 통일하게 되면 자신 또한 제국의 황비가 될 수 있다.

    용병왕 휘하의 병력과 엘더의 재력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

    바헬의 마법을 보았기에 시간을 비틀어 늘리고, 자신의 몸만 시간을 따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해졌다. 게다가 공간 절단까지 가능해졌을 때 카이는 홀로 의자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 이럴 줄은 몰랐는데?”

    8성 마법사인 바헬이 시간과 공간을 다루기에 그것을 다루면 8성에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8성에 오른 이가 시공간에 간섭할 수 있게 되어 그 술식을 짜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훔쳐 배웠지만, 실제로 그걸 다루기에는 그릇 자체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확실히 깨달았다.

    8성에 올라야만 이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결과를 훔쳐 배운 것만으로 얻은 것이 매우 많았다. 7가지 속성을 결합하려던 것 중 다섯 가지 속성까지 단숨에 결합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하나를 합칠 때마다 그 반발력이 거세진다는 점이었다. 위력은 다섯 개만 합쳐도 이미 어지간한 8성급 비전 마법의 위력에 버금갔지만, 아직 벽은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벽에 균열이 가고 무너지는 중이다.

    카이의 예상대로 7가지 속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 그는 벽을 허물고 8성으로 갈 수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 당장은 여섯 번째 속성을 합치지 못하니 머리도 식힐 겸 바헬의 술식을 방해할 술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는 술식을 방해하는 이 술식을 연구하다 보면 지금 잠깐 막힌 길이 다시 보일 것이라는 걸.

    그러나 그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처음에는 시간과 공간에 간섭하는 술식을 보았으니 그걸 방해하는 술식을 짜는 것은 간단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수많은 술식을 짜서 실험해 보았지만, 시간과 공간에 간섭하는 술식을 방해하는 것에 실패했다.

    간단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에 벌써 십 일 동안 진전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마법사가 들으면 기가 막혀 할 일이었지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갑갑할 따름이었다.

    카이는 오랜만에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약속’은 완성되어 있었다. 커플링으로는 이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 높은 반지가 완성되었다.

    카이는 활성화를 우선 뒤로 미루고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어서 다른 것은 일단 모두 뒤로 미루기로 했다.

    카이는 성의 지붕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의 운하를 보던 카이는 그 위로 손을 들어 하나씩 마력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이의 손짓을 따라 마력이 움직였다. 그렇게 그린 마력의 그림이 잔상처럼 허공에 하나둘 남았다. 카이의 마력은 오랜 시간 유지되었고, 그렇게 그린 마력은 축소 마법진부터 조합 마법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하나둘 늘어가던 마법진이 더해지고 더해지다가 겹쳐진다.

    밤하늘의 별을 도화지 삼아 그린 마법진들이 더해지고 더해지는데 그 뒤에 흐르는 별의 운하가 겹쳐져 보이는 순간 카이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카이의 마력이 그려내는 마법진이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해졌다. 조합 마법진은 지금까지 서로 방위를 점해서 완성했는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더해진 지금은 공간을 겹치면서 마법진이 완성되고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마법진을 그리던 중에 카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일으켰다.

    백작성의 지붕 위 하늘에 바람이 불고, 불길이 일고, 냉기가 몰아치며, 벼락이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순수한 마력이 휘몰아쳐 왔고, 흙이 솟구치며,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물방울이 모였다.

    그그그그긍.

    불, 물, 바람, 냉기, 벼락, 순수 마력, 대지의 속성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기 시작했다. 카이의 눈에서 하늘까지 꿰뚫을 것만 같은 별빛이 머무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카이의 손길에도 저항하며 튀어나가려고 했지만, 카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별빛은 그 모든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 마력의 반발과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조화롭게 맞물리는 공간을 찾아낸다. 순서를 바꿔가며 합치던 어느 순간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는 것처럼 자리를 찾으며 일곱 가지 속성이 하나로 모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하나의 구체였다.

    우웅.

    무척이나 안정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력의 크기와 위력은 카이가 가장 잘 이해했다.

    그리고 8성 대마법사들이 왜 도시 파괴자라고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도시 하나 날려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구체가 카이를 향해 다가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카이가 품고 있던 마력과 조화를 이루며 몸에 품어진 그 마력은 그의 그릇을 강제로 확장하고, 뜯어고쳤다.

    8성급 대마법사들이 늙지 않고 오히려 젊어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이 세계가 허락한 힘을 품으려면 원래의 몸으로는 안 된다.

    아득한 고양감.

    손짓 하나로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힘. 카이는 그제야 바헬과 테오르가 바라보던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모든 시간을 마음껏 늘리고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공간을 절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8성에 오른 자만이 허락된 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 하, 하하, 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카이는 지붕에 털썩 드러누웠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삶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부터, 자신이 8성에 오르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이 바헬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만나면 때려죽일 놈이었지만 이제는 물어볼 수 있게 됐다.

    궁금증을 풀 자격이 생겼다.

    물론 바헬이 8성에서도 완숙의 경지에 든 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수몰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테오르조차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이제 둘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눈을 갖췄다.

    카이는 전에 비할 바 없이 강한 힘을 지녔지만, 생각해 보니 바헬의 비전 마법을 보지 못했다.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노는 것만 보았을 뿐.

    그런 바헬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바헬도 마법사다. 놈도 자신을 대비할 터였다. 마법사란 준비하는 자들이니까.

    그러나 바헬이 카이에 대해 준비하는 것과 카이가 그에 대해 준비하는 것은 분명 다를 터였다. 아무리 바헬이 카이를 높게 친다고 해도 8성에 올랐을 거라는 것은 모를 테니까.

    “우선은 그 늙은이를 찾아야겠네.”

    바헬은 자연재해라 여기며 사람들이 알아서 피했을 뿐 그의 위치를 특정하고자 한다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감히 그의 위치를 찾고자 했던 이들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오히려 그를 찾아서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카이는 지붕에 편히 누워서 마력을 손끝에 모아서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하던 시간과 공간에 간섭하던 술식을 방해할 수 있는 술식이 술술 풀려 나온다. 그렇게 한참을 그리던 카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간과 공간의 술식을 방해할 술식이 완성됐다.

    십 일간 갑갑하게 했던 것들이 술술 풀리니 그것만으로 짜릿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뤄진다. 축소 마법진과 조합 마법진을 그리고 이제 마법진을 겹쳐서 그리는 결합 마법진까지 허공에서 휙휙 나타난다.

    마치 모든 마법의 이치가 손에 들어온 것만 같은 고양감.

    카이는 마력으로 그림 그리듯 허공에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즐기면서 8성의 벽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계속 오르고 있었다.

    대륙의 서쪽.

    대륙의 변방에서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이 그어지고 있었다.

    돌싱 후 대마법사-흑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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