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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44화 (44/150)
  • 044화 실마리

    카이는 바헬이 방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긴 무적으로 살아온 자였다.

    8성에 이른 대마법사는 역사를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만한 강자가 무인지경으로 살아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온 자.

    물론 제국의 수도에 쳐들어간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벌이고 다닌 일은 그에게 미치광이, 도시 파괴자 등 온갖 이명을 붙일 만큼 마음대로 살아왔다.

    그런 자가 카이를 살폈으니 자신이 7성에 올랐다는 것은 단번에 알아보았으리라. 그러니 오히려 긴장하지 않을 터.

    그래서 우선 폰을 팔방에 배치했다. 그걸 보고도 바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흘끔 폰을 보고는 다시 카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떻게 한 거냐?”

    “뭐가?”

    “지금 네 성취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봉인이었을 텐데.”

    카이도 그 말에 동감했다. 카이의 재능으로도 단번에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벽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마약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편법을 이용해 풀어야만 했을까?

    엿보기만 했을 뿐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지금 바헬을 상대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끌려만 갈 생각은 없었다.

    그가 왜 엘티온을 노렸는지, 왜 엘티온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마력 봉인을 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찾아온 것인지 궁금한 것은 넘치도록 많았다. 그러나 그 대답을 강구하지 않는다.

    죽일 수 있다면 죽인다.

    바헬을 죽인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카이가 손을 내밀고 숨을 골랐다.

    “됐고. 죽어라.”

    카이가 만든 아티펙트에서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 공간을 전이해서 바헬의 가슴 앞에서 폭환을 만들어 냈다. 바헬의 시선에 이채가 서린 순간 폭환이 폭발했다.

    꾸와앙!

    이 폭발은 상대의 마력을 잡아먹으면서 몸집을 키우기 때문에 잘만하면 8성 대마법사라고 해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마력 감지에 걸리는 바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는 자신의 로브를 툭툭 털며 품평했다.

    “반쪽짜리구나.”

    위력 자체는 7성급에 공간에 간섭해 8성을 흉내 내었지만, 바헬은 너무나 간단히 그것을 해결해 버렸다. 폭발이 일어나 자신의 마력이 연쇄적으로 휩쓸리는 순간 바헬은 그대로 공간을 절단했다.

    잘린 공간이 어디로 연결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폭환의 위력은 닿지 않았다.

    바헬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바헬은 카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는 흘흘 웃었다.

    “날 맞이할 준비를 한 것 같은데 보여봐라. 반푼이.”

    카이는 저 말을 기다렸다. 저 오만한 바헬이 자신의 마법을 고스란히 맞아 보겠다고 하는 순간을.

    일부러 흔들리는 눈빛을 연기했던 것이 통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음 수를 쓴다.

    팔방을 점하고 있던 인공 영혼 폰이 동시에 마법을 발현한다. 여덟 개의 조합 마법진이 동시에 공명하며 또 하나의 조합 마법진이 이뤄지고 지옥의 불꽃이 일었다.

    극소 부위, 극 고온으로 이뤄진 지옥의 불꽃이 바헬을 덮쳤다. 바헬은 자신을 뒤덮는 불길에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8성급 마법인 지옥의 불꽃은 상대의 마력까지 잡아먹으며 태운다. 폭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을 지닌 마법.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맞는다면 죽일 수 있다고 여겼다.

    여덟 기의 인공 영혼 폰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우수수 쓰러졌을 때 그 중심에서 바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난 것들을 많이 만들었군.”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 카이는 새삼 바헬의 능력을 깨달았다.

    8성이 시공간을 비틀 수 있다는 것은 엿보았지만, 정확히 바헬의 능력은 읽어내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완숙한 경지의 8성인 것 같았다.

    7성에 올랐을 때 자신이 다른 7성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올랐다고 여긴 것처럼 바헬은 8성에서도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리 시공간을 비트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겠지.

    지옥의 불꽃이 그를 덮치는 순간 환영을 남기고 그는 공간 이동을 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즉시 발동한 지옥의 불꽃이 이뤄지는 순간 시간을 늘려서 몸을 빼낸 것을 보면 새삼 그의 경지가 놀라울 정도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대해처럼 넓었던 그의 마력이 쭉쭉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많은 양을 지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시공간을 비트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전부라면 실망인 걸?”

    바헬이 주위를 둘러보며 하는 말에 카이는 품에서 투환기를 꺼냈다. 이미 장전이 완료된 상황.

    카이가 투환기를 겨누자 바헬은 신기하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또 뭐지?”

    카이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장전되어 있던 헬리움 구슬이 바헬을 향해 날아갔다.

    바헬은 시간을 늘려서 볼 수 있는 자다. 그라면 날아오는 헬리움의 속도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테고, 마법적인 기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헬은 마법사다.

    호기심에라도 저것을 받아보려 할 터였다.

    바헬은 슬쩍 손을 들어 날아오는 헬리움을 받으려고 했다. 어찌나 정신을 집중했는지 그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아마도 바헬은 주변의 시간만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헬리움이 날아가는 저 찰나에도 손을 움직여 그걸 받을 준비를 한 것이겠지.

    어떤 마법적인 것도 가미되지 않고 오직 장력에 의해서 날아가는 것이었기에 바헬의 호기심을 자극한 공격.

    바헬의 마력 보호막이 그대로 뚫리며 그의 손에 헬리움이 닿는다.

    그 순간에도 바헬의 눈이 커지며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보면서도 믿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백 년은 넘게 살면서 단단히 굳은 가치관을 깨고 날아드는 물건에 대한 의심이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고, 헬리움은 그의 손을 박살 내며 그대로 가슴까지 밀고 들어갔다.

    “커헉!”

    바헬이 뒤로 물러나며 왈칵 핏물을 토해냈다.

    바헬이 온전히 반응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력 보호막을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간 헬리움이 손에 닿는 순간 공간을 절단하려고 했으니까.

    다만 헬리움은 그조차 마력을 흩어내어 공간을 절단하지 못했다. 그 한 번의 판단을 잘못한 결과 바헬의 손뼈가 박살 내고도 더 날아간 헬리움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손으로 그 충격을 감쇄했다고 해도 가슴뼈가 부서지고 심장을 가격했다.

    벽을 부수고 박히는 위력의 투환기에서 날아간 헬리움은 예상대로 바헬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도박이 성공한 순간 카이가 외쳤다.

    “스승님!”

    덴다르트가 기다렸다는 듯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한줄기 전격이 그대로 바헬에게 날아갔다.

    치명상을 입은 바헬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면 이 마법으로 승부가 갈린다. 그런 생각에 바라보던 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헬리움은 그 자체로 모든 마력을 흩어내는 금속. 날아들던 라이트닝 웹이 헬리움과 만나는 순간 펼쳐지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헬리움의 그 특성 때문에 바헬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 때문에 끝을 보지 못했다.

    카이는 곧장 땅을 박찼다. 발밑으로 피어오르는 얼음을 타고 미끄러져 가면서 카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약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려 보이는 이 순간. 카이는 바헬이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헬리움을 쥔 채 공간 이동을 펼치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주위로 공간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새삼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공간은 일렁이다가 헬리움 때문에 흩어졌다.

    그걸 보고 바헬도 깨달았다.

    헬리움이 모든 마법을 흩어낸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8성에 이른 마법이라고 해도.

    그걸 깨달은 바헬의 눈에 탐욕이 어렸지만, 이미 카이가 지척에 이른 것을 보고는 헬리움을 툭 떨어트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공간이 일렁이며 사라졌다.

    카이는 헬리움이 떨어진 순간 곧장 단검을 날렸다. 단순히 날린 것이 아니라 마력을 연결해서 고속으로 날린 단검이 그대로 바헬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바헬은 그대로 사라졌고, 단검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카이가 연결했던 마력이 끊어져 바닥을 뒹구는 단검을 다시 마력으로 연결해서 회수한 카이는 단검의 끝에 묻은 핏물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다급하게 공간 이동하던 바헬의 목에 닿았지만,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바헬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다쳤지만, 죽이지 못했다. 마법사인 그의 의식의 간극을 파고들어 허를 찔렀음에도 몸을 빼낸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대단한 자였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바헬이 만약 회복해서 돌아온다면 기회는 없다.

    어느새 다가온 덴다르트가 물었다.

    “못 죽였네?”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덴다르트는 카이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제 표정이 어떤데요?”

    “하나도 안 아쉬운 표정인데?”

    카이는 그 말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쳤는데 이상하게 아쉽지가 않았다.

    카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전에는 보고도 못 보았던, 이해할 수 없었던 바헬의 마법을 이번에는 볼 수 있었다.

    8성의 경지를 엿보기도 했던 데다가 이번에는 그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 이용하는지 보았다. 당시의 마력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게다가 그가 생사의 간극에서 공간을 절단하려고 할 때 보였던 그 움직임은 카이도 극한의 집중 상태로 보았기에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 마력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슈악.

    공간이 절단되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일순간 깨달음으로 8성 마법을 펼쳤지만, 온전히 8성에 오른 것이 아니라서 마력이 부족했다.

    고작 주먹만 한 공간을 절단하는 데에 마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

    “너, 너 지금 뭐 한 거냐?”

    덴다르트가 놀라서 묻는 말에 카이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8성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8성 대마법사가 시간에 간섭하고 공간을 비트는 술식을 보았다. 그 움직임을 읽었으니 그걸 방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헬리움이 아니라도 시공간에 간섭하는 술식을 방해할 수 있다면 바헬을 상대할 수 있다.

    바헬은 특별한 비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시공간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모든 마법을 무력화하고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다음에 헬리움에 대한 방책을 준비해 온다고 해도 시공간 마법을 방해하면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

    답이 보이지 않던 상대를 공략할 답이 보였다는 것만으로 카이는 두려움이 가셨다. 준비만 한다면 그를 상대할 방법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수확은 8성에 이를 길이 보였다는 점이었다. 까마득한 벽에 실금처럼 나타난 실마리였지만, 그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 8성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두 번째 만난 바헬은 그에게 전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줬다.

    카이는 고개를 돌려 덴다르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길이 보였습니다.”

    돌싱 후 대마법사-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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