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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43화 (43/150)
  • 043화 바헬

    엘디아는 카이 백작성에서 왔다는 보석함을 바라보았다. 카이가 완성해서 보냈다는 물건을 앞에 놓은 엘디아는 그가 이제 죽을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의 죽음에 맞춰서 작품을 완성하려면 일단 검수가 먼저였다.

    엘디아가 보석함을 열고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궁정 마법사 대리를 맡은 알론소가 장갑을 끼고 다가와 보석함 안에 든 목걸이를 꺼내서 들어보았다.

    5성급 마법사이자 엘더의 수석 마법사인 알론소는 긴장한 채 그녀가 꺼낸 작품을 보았다. 아직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았지만, 그 물건 뒷면에 그려진 축소 마법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요양을 위해 떠났다고 알고 있는 엘더의 시작이었던 마법사. 그가 그려낸 축소 마법진.

    “어때?”

    “1회용 5성급 보호 마법진이 그려진 목걸이입니다.”

    엘디아는 그 말에 새삼 ‘그레이스’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 두 개 밖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대륙의 큰손들이 더 탐내는 물건들이었다.

    만약 ‘그레이스’에서 제품을 찍어내기 시작한다면 그때 엘더는 모두의 외면을 받을 터였다. 그러니 그 전에 무결의 마법사가 남긴 유작을 공개하고 시선을 잡아끌어야 했다.

    그의 유작과 함께 물건들이 쏟아져 나올 터였다. 물량으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 생각이었다.

    ‘그레이스’가 차별화된 아티펙트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면 엘더는 대중화를 노릴 생각이었다.

    대륙의 큰손들이 시선을 돌렸다는 것만으로 엘더가 지금 받는 위협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번 기회에 대중화 전략을 들고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준비는?”

    “8할 정도 준비되었습니다.”

    “한 달 안에 마무리 짓도록 해.”

    “예.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알론소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번에 엘더는 마법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축소 마법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대거 고용해서 3성급 보호 마법이 내장된 아티펙트를 거의 찍어내고 있었다.

    보석 디자인도 화려함보다는 무난함을 통해서 매일 매일 차고 다녀도 질리지 않을 그런 디자인으로 바꿨고, 지금까지 밀린 제품을 모두 만들어서 보낸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물량을 쌓고 있었다.

    카이의 유작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벌인 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고, 마법사의 처우를 개선하자 그들도 많이 몰려와 지금 엘더에서는 말 그대로 아티펙트를 찍어내고 있었다.

    엘디아는 알론소가 물러나자 노트를 꺼내 디자인을 시작했다. 대륙 최고의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는 진정 그녀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다.

    엘디아는 노트에 디자인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너만 죽어주면 돼.”

    엘더가 비상할 계기가 될 죽음. 그는 엘더의 시작이었고, 죽음으로 엘더의 비상이 될 계기가 될 남자였다.

    엘디아의 뒤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보고드릴 내용이 생겼습니다.”

    엘디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보고해.”

    “카이 백작성에 나가 있는 리퍼들이 살해 당했습니다.”

    엘디아가 그 말에 인상을 굳히고는 돌아섰다. 고개 숙인 여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엘디아가 물었다.

    “덴다르트의 심기를 건드린 건가?”

    방랑 마법사 덴다르트가 카이 곁에 머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스승이 제자의 거처에서 지내는 것에 뭐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카이의 지분과 영지 모두 엘티온이 물려받기로 한 상황. 그러니 그가 곁에 있든 말든 신경 쓸 일이 아니었는데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6성급 마법사라는 것보다 그가 속한 방랑 마법사단이 문제다. 마탑과 같은 관계가 싫어 나왔다고 하는 주제에 그들은 소속 마법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

    처절한 복수를 통해서 그들은 안전과 소속감을 얻었다.

    그런 덴다르트와는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닙니다. 도끼로 살해당했습니다.”

    “도끼?”

    “조사를 다녀왔는데 특정할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단지 리퍼들이 저항도 못 하고 죽은 것으로 보아 최소 5성 이상의 존재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마법사에게 당한 건 아니라는 거지?”

    “예.”

    엘디아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 곧 카이가 죽을 때가 됐는데 그곳에 파견 나간 리퍼가 죽었다. 그들을 죽인 자가 육체 능력 강화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리퍼들을 뽑아서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금 진행하는 일에 차질이 생긴다.

    ‘그레이스’에 대한 조사는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일.

    그리고 괜히 카이가 죽을 때 곁에 리퍼가 있다면 덴다르트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다.

    “철수해.”

    리퍼가 아니라고 해도 카이의 죽음은 알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으십니까?”

    “됐어. 보낼 인원도 없잖아.”

    여인이 물러가지 않고 앉아있는 모습에 엘디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 불만이야?”

    “···아닙니다.”

    엘디아는 다시 돌아앉아 펜을 집어 들며 말했다.

    “잊지 마. 리퍼가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

    여인이 사라지자 엘디아는 펜으로 보석 목걸이 디자인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박박 지워버리고는 다음 장에 다시 목걸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파라락 넘어가는 서류를 훑어보던 사내가 마지막 장에 도장을 쿡 찍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나 있었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황태자 전하. 보고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황태자 클로이트는 서류를 덮어 옆으로 밀어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손으로 눈가를 주무르며 말했다.

    “보고 해.”

    “카이 백작성을 리퍼가 감시하고 있다는 보고와 함께 매수한 귀족들을 이용해 카이 백작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는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클로이트가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리퍼가 무결의 마법사를 감시하고 있다?”

    “예. 어쩌면 1년 전에 갑자기 성녀가 엘도 왕국으로 향했던 것과 연관된 일이 아닐까하여 면밀하게 조사 중입니다.”

    클로이트는 그 말에 기억을 떠올리고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당시에 성녀의 엘도 왕국 행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었지. 그 일이 왕가와 무결의 마법사가 틀어진 것과 연관되어 있다?”

    “조사 중입니다.”

    클로이트는 잠시 흥미를 느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을 붙잡고 있을 만큼 여유가 많은 이가 아니었다. 제국은 거대했고, 주변에 적이 많았다.

    “결과가 나오면 보고하도록 해.”

    클로이트가 다시 서류를 집어 들다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보고할 것이 남았나?”

    “보고 마지막에 대수림에서 이상 현상을 감지했다고 그걸 확인하러 간다고 한 서부 지부장 제프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림자 중에서 대륙 서부를 총괄하는 제프라면 클로이트도 아는 이였다. 그림자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위치에 있는 이였는데 그의 연락이 끊겼다?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대수림에 들어간 뒤로 못 돌아왔다는 건가? 6성에 이른 그림자가?”

    “예.”

    클로이트는 서류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수림에는 조사단을 파견할 수 없어.”

    길목을 막고 있는 신성 교국도 문제지만 대수림에 사는 야만인들도 문제다. 스스로 신령족이라 일컫는 자들이라 하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문헌으로만 확인이 될 뿐인데도 그 강함이 느껴진다.

    대수림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그들 때문이었다. 6성급 육체 강화자이자 그림자가 당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무결의 마법사가 그들을 쳤을 가능성은?”

    “6성급 마법사에게서 몸을 못 빼낼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잠시 고민하던 클라이트가 물었다.

    “7성 대마법사라면?”

    “···그래도 몸은 빼낼 수 있습니다.”

    클라이트는 그 말에 턱을 괴고는 서류를 손으로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무결의 마법사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니는 것은 지적 재산권을 따낼 정도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6성 마법사로는 뛰어났지만, 그만한 이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또 찾아보면 적지도 않은 것이 그 정도 수준의 인물들이었으니.

    그런데 테오르가 직접 그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찾아보니 왕가와는 틀어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대륙 서부의 총책임자가 죽어 나갔다.

    가볍게 진행한 일이 가볍게 볼 일이 아니게 된 상황.

    “새로운 책임자를 보내고, 무결의 마법사에 대해 알아봐. 왕가와 사이가 틀어졌다면 영입도 고려해 보자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클라이트는 다시 서류를 펼치고는 업무에 집중했다. 황태자에게 일을 배우라고 한 뒤로 밀려오는 업무는 무엇 하나 가벼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없었고, 그것에 집중하면서 무결의 마법사에 관한 것은 금세 잊어버렸다.

    당분간 대수림에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신령족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할 판이었다.

    덴다르트의 말처럼 적이 늘어난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엘디아에게 엘더의 제품들은 모두 보냈으니 오직 하나만 대비할 때였다.

    바헬 정도 되면 아무리 돈을 들인 마법진도 통하지 않는다. 카이가 나름 최대한 방비했던 왕궁에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근위기사단장을 죽인 자다.

    카이는 마력 봉인을 당한 지 일 년이 되어가는 것을 알고는 덴다르트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방랑 마법사 본단에 신령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 좀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덴다르트는 술잔을 쭉 비우고는 답했다.

    “미치광이 처리하고 나서.”

    카이가 빤히 바라보자 덴다르트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넌 방랑 마법사가 아니야. 너 하나 죽는다고 방랑 마법사단이 나서지는 않아. 뭐 내가 죽어도 방랑 마법사단이 나설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되니까. 미치광이란 게 자연재해 같아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놈이거든.”

    카이가 답 없이 바라만 보자 덴다르트가 씨익 웃었다.

    “솔직히 미치광이 죽일 수 있다고는 못하겠다. 네가 그렇게 준비했지만, 그 정도에 당할 놈이었으면 애초에 죽었을 테니까.”

    “그런데 왜 남으시겠다는 겁니까?”

    덴다르트는 카이의 물음에 술잔을 비우고는 씨익 웃었다.

    “내가 네 스승이다. 마법은 네가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지만, 난 여전히 네 스승이지.”

    카이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덴다르트는 단순히 마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연재해에 맞서겠다는 제자. 적어도 그 옆에는 있어 주는 게 내가 생각하는 스승의 도리다.”

    카이는 그 말에 픽 웃고 말았다. 덴다르트는 처음부터 그랬다.

    카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직접 그를 가르치겠다고 왔던 덴다르트는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그래서 카이가 6성에 오르고 나서 덴다르트가 떠나고 나서도 언제나 그의 마음속 스승은 덴다르트였다.

    카이가 덴다르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뭘?”

    “제가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서지 마세요.”

    덴다르트는 그 말에 흐흐 웃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야 당연하지.”

    카이가 다시 덴다르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려다가 멈칫하고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왜? 술이 아깝냐?”

    “아뇨. 놈이 왔네요.”

    카이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덴다르트는 그 말에 술병을 들어서 쭉 들이키며 따라 일어났다.

    카이가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인공 영혼 폰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카이는 품에 넣어놓은 투환기를 로브 위로 툭툭 두드려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 카이의 뒤로 덴다르트가 따라왔다.

    카이는 곧 온 정신을 집중했다. 연무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를 향해서.

    그렇게 연무장에 도착한 카이는 그곳에 서 있는 이를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 새하얀 수염. 어딘가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노인이 그곳에 스태프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선 노인은 카이를 보고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이 카이의 전신을 훑었다. 그의 눈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오랜만이구나.”

    카이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 번의 공격을 받아내면 살려주겠다고 했던 자.

    약속대로 살려는 줬다.

    마력을 봉인했지만, 살려는 줬다.

    덕분에 카이의 인생이 바뀌었다. 대마법사가 되었고, 지금은 8성의 비밀을 엿보았다.

    그래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던 자다.

    “그래. 오랜만이지. 기다렸다.”

    돌싱 후 대마법사-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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