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마법
안타르시아에 가봐야 할 일이 생긴 카이는 서두르기로 했다. 미치광이 바헬이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워뒀다가 영지에 있던 이들이 해를 입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바헬이 손을 쓴지 이제 11개월이 지났다. 1년이 다 찰 때쯤에 결과를 확인하러 올 테니 그 전에 영지로 돌아와서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카이는 신성 교국으로 가는 길에 릴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엘폰토 공작이 죽은 마당에 굳이 아프록시아 잎의 가격을 높게 책정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장사는 잘된다고 하니 문그록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문그록이 무슨 생각으로 암흑가를 지배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가 잘되게 할 필요는 없었기에 가격을 다시 낮출 생각이었다.
연락을 받은 릴리는 카이의 명령에 군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그록도 카이가 벌인 일의 결과를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엘폰토 공작의 죽음에 직접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를 망하게 하는데 한몫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터.
릴리에게 준 수신기도 일방적으로 수신만 가능할 뿐 카이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문그록과의 인연이 이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우선은 바헬의 일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했다.
헬리움을 지속해서 생산할 수 있는지 확인도 해야 했고, 최상급 영혼석도 잔뜩 구해야 했다. 인공 영혼 폰을 만들어야 헬리움을 실험해 볼 수 있고, 지옥의 불꽃으로 바헬을 공격하기도 해야 하니 최소한 16개가 필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최상급 영혼석을 싹 쓸어오는 거였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카이는 신성 교국의 비공정을 타고 안타르시아로 다시 향했다. 메르샤는 카이의 방문에 베이트를 보낸 것이 아니라 직접 그를 맞이해서는 곧장 시장실로 데리고 갔다.
차를 준비해 준 메르샤가 카이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레이스’의 다음 제품이 나온 거야?”
“아니. 물건을 구하러 왔을 뿐이야.”
메르샤는 그 말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카이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이 모두 파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들이었기에 이번에도 자신을 놀라게 해줄 거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저 물건을 사러 왔다고 하니 시들해졌다.
카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VIP매장에 나오는 물건들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헬리움에 관련된 물건과 더불어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을 주문제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이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에 들른 것일 뿐 메르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메르샤는 퍼뜩 생각이 났다는 듯 품에서 초청장 하나를 꺼내서 건네줬다.
“클란드라 황녀가 전해달라고 했어.”
카이가 초청장을 받아서 열어보더니 인상을 굳혔다.
“황제의 50번째 생신 연회 초청장?”
“그래.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물건이라고. 그만큼 너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레이스’는 이미 대륙의 큰손들의 뇌리에 그 이름을 정확히 박아 넣은 상황이다. 카이는 메르샤를 통해서만 연락할 수 있게 했기에 잔챙이들의 연락은 받지 않아도 되었던 상황.
클란드라가 준 초청장 정도 되니까 카이의 손에 들어온 정도였다.
카이는 초청장을 바라보다가 테오르를 떠올렸다. 수몰의 대마법사 테오르. 곱게 미친 늙은이를 떠올린 카이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곳에서야 클란드라가 막아줬다고 하지만 제국의 황실로 향한다?
황제의 생신 연회에 초대된 이상 어지간하면 그를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미친 늙은이 속을 어찌 알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미치광이 바헬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됐어. 이런 데 갈 시간 없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원하는 것 베이트에게 말하면 알아서 다 구해줄 거야.
편히 쇼핑하고. 돌아갈 때 얘기해. 쾌속으로 보내줄 테니까.”
“고맙군.”
메르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카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엘도 왕국이 용병왕을 고용했다는 소식.”
“용병왕?”
카이는 그 무도한 자를 기억했다. 7성급 육체 강화 능력자로 전장에서만 살아온 자.
살인과 약탈을 즐기는 자. ‘플레이트’에서 만난 적이 있던 자였다.
뒷일 생각 안하고 일을 저지르고 다닐 것처럼 생겨서는 생각보다 심계가 깊은 자였다. 그러니 7성에 올랐고, 그러니 전쟁 용병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겠지.
만만히 볼 자는 아니다.
그런 자와 계약했다?
엘도 왕국은 엘더의 성공으로 꾸준한 군비 증강을 해왔다. 대표되는 무력인 근위기사단장이 바헬에게 죽고, 카이가 마력 봉인을 당해 영지로 돌아갔으며, 왕국 제일검인 엘폰토 공작이 죽었으니 주변국에서 군침을 흘리는 건가?
그렇다고 용병왕과 계약했다면 늑대를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셈이다.
그자라면 엘더를 집어삼키려고 개수작을 부리고도 남을 자니까.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그자가 엘더를 집어삼키려고 한다면 분명 엘디아든 엘토르든 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엘더의 지분을 내놓을 테니까.
그때 사들이면 될 일이기도 했다.
메르샤는 카이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입을 열었다.
“엘더를 무너트릴 생각이지?”
그 정도 기색은 내비쳤었다.
“조합 마법진을 가진 네가 축소 마법진까지 손에 넣게 되면 대륙의 마법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 것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용병왕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런 촌구석에 갔을 리는 없으니까.”
카이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7성에 오른 것들은 다들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얻으면 좋겠지만, 무리할 마음은 없다. 조합 마법진 만으로 충분하니까.”
카이가 일어날 때 메르샤가 물었다.
“그 스태프야?”
카이가 손에서 놓지 않는 스태프를 보고 메르샤가 지나가듯 물었다. 카이는 굳이 메르샤에게 숨기지 않았다.
7성급 아티펙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테니.
“맞아.”
“구경해 봐도 돼?”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돼.”
비전 마법이 들어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건 전격 속성의 마법이 들어있었다. 아벨의 신분으로 이걸 쓰는 모습을 보여줘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번에 계획하고 있는 화염 속성 비전 마법을 담은 장비가 완성되면 스태프는 마력 패턴만 변경해서 덴다르트에게 줄까 생각 중이기도 했으니까.
메르샤가 귀여운 척 볼을 부풀리며 애교를 부렸지만, 카이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저리 보여도 카이보다 두 배 넘게 더 살았으니까.
아무리 대마법사가 되어 노화가 늦게 진행된다고 해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카이의 눈빛이 차가워지는 것을 보고 메르샤는 애교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물었다.
“내 것도 만들어 주면 안 돼? 내 것 하나 만들어 주면 수수료 받지 않을게.”
이번에 얻은 돈만 200억 프랑이나 되는데도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그 가치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령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안 돼.”
“내가 가르쳐 줄게.”
“가르쳐준다고 배울 수 있었다면 정령 마법사가 그리 희귀하지도 않겠지.”
정령 친화력이 없는 이는 성취를 높이기 힘든 만큼 정령 마법사는 희귀하기 짝이 없다. 그런 와중에 저만한 성취를 이룬 이는 근 백 년 내에 없을 정도.
“화염식 비전 마법도 괜찮아. 내가 그걸 쓸 수 있으면 변수가 될 테니까.”
“그건 생각 좀 해보고. 아무래도 만드는데 너무 힘들더라고.”
“흐흥. 그렇겠지. 활성화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테니.”
카이는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쏘아보고는 돌아섰다.
“어쨌든 이만 가보지. 바빠.”
“언제든 시간 나면 얘기해. 재료도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카이는 그녀를 무시하고 베이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카이는 자신이 주문할 물건들을 요청하고 장인 하나를 수배해 달라고 했다.
안타르시아에는 없는 게 없다. 돈만 있다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도 구할 수 있는 곳.
카이가 원한 이는 금세 구해졌다.
작업복을 입고 찾아온 이는 카이의 방을 돌아보더니 얼른 자기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케네스입니다.”
“반갑군. 베이트가 데리고 온 것을 보면 뛰어난 장인인가 봐?”
케네스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미소였다.
“손재주는 있는 편입니다.”
“잘 됐군.”
카이가 주문 제작할 물건의 도면을 꺼내는 사이에 케네스는 창가에 붙어서는 밖을 살피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렇게 높은 곳에는 처음 와 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지하도시다. 그런 곳에서 아무리 높아 봐야 지상보다도 낮은데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카이는 그에게 자신이 그려온 도면을 내보였다.
“이런 장비를 만들 수 있겠나?”
카이가 보여준 도면에 관심을 가진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거의 원시적인 무기인데요? 장력을 이용하니 석궁과 같은 구조인데 무슨 쇠 구슬을 날릴 것처럼 생겼군요.”
“맞아. 쇠 구슬을 날릴 용도로 만든 것이지.”
“재료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들이기는 한데 구조 자체는 단순해서 금세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재료는 모두 이곳 VIP 매장에서 구하고, 완성해서 가지고 온다면 공임비를 넉넉히 쳐주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틀 뒤에 가지고 오겠습니다.”
케네스가 도면을 가지고 떠난 사이에 카이는 창가로 걸어가서 안타르시아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안타르시아의 가장 중심가에는 ‘그레이스’의 간판이 마법등으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작 두 개의 작품밖에 내놓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브랜드다.
아마 황제의 생신 연회가 끝나고 나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그레이스’의 이름값이 한창 높아질 터.
작품 준비야 에르케가 알아서 하고 있었고, 카이는 거기에 걸맞은 조합 마법식만 고르면 된다.
이번에 8성급 비전 마법인 지옥의 불꽃을 만들면서 조합 마법식에 대한 이해 도가 크게 올라서 다음 마법은 더욱 재밌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가 끼게 될 반지에야 비전 마법을 넣었지만, 다음 것부터는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무난하게 가도 좋았다.
솔직히 반지에다가 6성급 보호 마법만 넣을 수 있어도 살 사람은 줄을 지을 테니까.
카이는 이곳에서 여유를 가진 김에 다시 합성 마법에 집중했다. 이틀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8성 조합 마법진을 이해하고 나서였을까? 오랜만에 펼친 합성 마법은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뤄졌다.
불과 전격의 마법이 하나로 어우러져 파직거리는 불꽃을 보며 카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엘폰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어째서인지 뭐든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이는 세 번째 속성의 합성을 시도했고, 건물이 폭발했다.
VIP룸의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갔고, 기둥에 금이 쩍쩍 가자 메르샤가 뛰쳐 왔다. 무슨 습격이라도 받은지 알고 바짝 독이 올라 달려온 메르샤는 머리가 산 발이 되고, 옷도 찢어진 카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아직 무리네.”
메르샤가 부들부들 떨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무슨 마법 실험을 여기서 하냐!”
카이는 그녀의 말에 품에서 진금화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걸 받아든 메르샤가 헛기침을 하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법사가 그럴 수도 있지 뭐.”
대지의 정령이 나타나 기둥에 간 금을 채우는 동안 접객원들이 유리창을 들고 줄줄이 다가와 설치했다. 방은 금세 마법처럼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돌싱 후 대마법사-정신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