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기름칠
엘도 왕국의 왕도에 있는 비공정 정류장에 내린 엘디아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여인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엘폰토 공작에 대한 건입니다.”
엘디아는 불구가 된 그에게 더는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레이스’ 경매에서 대차게 패했다. 작정하고 갔음에도 제국의 황족이 부르는 돈은 짧은 엘더의 역사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왜?”
“루비 광산이 지진으로 무너지면서 공작령의 상단이 파산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엘폰토 공작은 6성에 올라 왕국 제일검이라는 칭호를 얻고 나서는 수련은 등한시하고 노느라 바빴다. 당연히 씀씀이도 컸는데 그의 큰 씀씀이는 그의 영지 안에 있는 루비 광산 덕분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엘폰토 공작의 영지에 있는 루비 광산은 대륙 서부에서는 손에 꼽히는 채굴량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니 그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얼마 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지진 때문에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엘디아도 그 소식을 안타르시아로 가는 비공정에 타기 직전에나 들을 수 있었다.
“광산을 다시 열 때까지도 못 버틴다는 거야?”
“지진으로 저 안쪽부터 무너져서 그곳까지 파 들어가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마법사들 고용해서 처리하면 일 처리가 쉽잖아.”
마법사들에게 땅이나 파라고 하면 당연히 발끈하겠지만, 충분한 돈만 준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일단 정리하고 광부들을 투입해서 갱도를 재정비하면 될 일이다.
잠시 주저하던 여인이 엘디아가 돌아보자 조심스럽게 답했다.
“공작령에 그만한 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엘디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헤프게 쓴다고 해도 무려 공작령이다.
루비 광산이 주수입원이지만, 영지 내에서 거둬들이는 세금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돈이 없다는 건가?
“돈은 다 어디 갔는데?”
“아프록시아 잎을 구하는데 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프록시아?”
말린 아프록시아 잎이 마약이라는 것은 엘디아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카이를 만나러 갔을 때 그의 집에서도 진하게 그 향이 났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팔다리가 잘린 엘폰토라면 아프록시아 잎에 취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 무서운 것 모르던 이가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졌으니까.
엘디아는 그 부분까지는 이해했다.
“고작 아프록시아 잎 때문에 영지에 돈이 없다는 것이 말이 돼?”
“아프록시아 잎의 가격이 급격하게 치솟는 중입니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지에서 사 간 아프록시아 잎도 상당하고요.”
엘디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좋아. 엘폰토 오빠의 공작령이 빚더미에 앉았나 본데 그걸 보고하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거야?”
“엘폰토 공작이 공주님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날?”
“그것 때문에 영지의 시종장이 직접 와 있습니다.”
엘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짜증을 부렸다.
“일단 만나보지.”
가뜩이나 ‘그레이스’ 경매에서 낙찰을 못 받아 짜증이 치미는 데다가 아벨이라는 ‘그레이스’의 주인은 그 뒤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클란드라가 꼬리 치는 것을 보고 정중히 귀족의 예법을 대하던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짜증이 났다.
엘디아가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엘폰토 공작령의 시종장을 불렀다. 그는 엘디아 앞에서 정중히 예를 취했다.
“오빠가 날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예. 간절히 찾으십니다.”
“미안하지만 일이 바빠서 만나러 가기는 힘들 것 같군.”
시종장은 그 말에 조용히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밀납 되어 있는 편지를 보고 엘디아가 눈짓하자 시녀가 다가와 밀납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건넸다.
엘디아는 편지 내용을 읽고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 그리고 은근한 협박이 이어졌다.
엘티온의 안부를 물으며 돈을 내놓으라는 내용.
원래라면 신경 쓸 일이 아니나 맹약을 한 상황이었다. 엘폰토가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엘티온의 귀에 정말로 그 말이 들어가면 맹약을 어기게 생겼다.
“일단 오빠를 직접 만나봐야겠군.”
엘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 채비해라. 엘폰토 공작령으로 가겠다.”
“예.”
시녀들의 대답을 들으며 시종장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먼저 출발해서 내가 갈테니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 전하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종장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엘디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엘디아가 도착한 곳은 근위기사단장 프레드의 집무실.
엘디아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문이 열리고 프레드가 밖으로 나왔다. 그가 엘디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엘디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보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뭐든 말씀하시죠.”
“엘폰토 공작령에 다녀올 일이 있는데 혹시 같이 다녀올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런 걸 부탁까지 하냐며 프레드가 흔쾌히 답하자 엘디아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니 준비해 주세요.”
“준비해 놓겠습니다.”
엘디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프레드 경 덕분에 큰 힘이 되네요.”
프레드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준비로 바쁘실 텐데···.”
“그런 건 종자가 할 일이죠. 저는 공주님을 모시는 것이 제가 할 일이고요.”
엘디아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프레드가 헤벌쭉 웃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서 돌아온 카이가 가지고 온 짐들을 보면서 테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들이 다 뭡니까?”
“이번에 사들인 품목들. 전투 인형을 만들 재료와 집사 인형을 만들 재료. 그리고 전투 인형의 무장부터 시작해서 돈도 환전해 온 거야.”
“환전해 왔다고?”
덴다르트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고액의 연봉을 받기로 했지만, 진금화상태로는 못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억울해하던 덴다르트였기에 카이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일단 가시죠.”
카이가 간 곳은 영지 내에 가장 안전한 지하였는데 그곳이 전보다 훨씬 넓어져 있었다. 카이가 돌아보자 덴다르트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하니 나도 연구실 하나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만들었다. 괜찮지?”
카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덴다르트가 1년 동안 고용되었는데 그를 단순히 전투 인형의 경험치로만 쓰기에는 아까웠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경험은 카이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되니까.
카이는 우선 가지고 온 상자 중 두 개를 덴다르트에게 내밀었다. 덴다르트가 그것을 열자 100만 프랑짜리 금화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 이게 얼마냐?”
“15억 프랑입니다. 계약금과 1년 연봉을 환전해 왔습니다.”
“크흐흐흐.”
지하에 준비해 놓은 마법등의 빛을 받아 번쩍이는 누런 황금빛에 덴다르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양손으로 금화들을 들었다가 촤르륵 쏟아냈다.
“크하하하하. 역시 제자는 내가 제일 잘 뒀다!”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었다. 돈도 일정 수준까지는 우와!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 역치를 넘어선 순간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카이는 상자 두 개를 다비드와 에르케에게 건넸다. 에르케가 얼른 열어보니 100만 금화 짜리가 수북했다.
“이, 이게 다 얼마에요?”
“이번 경매 수익의 2%. 16억 프랑입니다.”
그 말에 모인 이들 모두의 생각이 정지됐다. 덴다르트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이번 물건 경매 수익의 2%가 내 계약금과 연봉보다 많다고?”
“예.”
“그 무슨 미친 소리야! 그, 그 ‘영광’이 말도 안 되는 반지이기는 하다만 그렇게 비싸게 팔리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카이는 담담히 설명을 이었다.
“‘영광’의 경매 낙찰가는 1,000억 프랑이었고, 안타르시아의 시장에게 내는 수수료 20%를 제하고 800억 프랑이 저희 수익이었죠. 그중 2%이니 16억 프랑 맞습니다.”
덴다르트는 묘한 억울함을 느꼈다.
“이씨!”
카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른 상자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툭하고 열어 놓은 덴다르트의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이건 뭐냐?”
“억울해하시는 것 같아 아이스 토네이도 사용료로 1억 더 드리죠. 그럼 됐죠?”
덴다르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흠흠. 뭐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만.”
“필요 없으시면 다시···.”
“어허. 제자의 성의를 무시할 정도로 막 되먹은 스승은 아니다.”
덴다르트는 카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얼른 상자들을 닫았다. 카이는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인공 영혼을 많이 만들 생각입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덴다르트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런 거라면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 나와 훈련하는 것은 워 메이지 대응법만 배우는 건데.”
“하지만 제가 믿을만한 기사가 없어서요.”
“굳이 기사의 검술을 배울 필요는 없지 않겠냐? 인공 영혼의 수가 늘어난다면 분명 기사의 집단 전술이 빛을 발하기는 할 건데 그게 아니라 돈만 보고 오는 용병이라면 고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카이는 그 부분은 잠시 고민했다. 인공 영혼들의 제대로 된 검술 스승을 구한다는 것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전투 인형에 대한 소문이 나는 것도 유의해야 했으니까.
“일단 그 부분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죠.”
카이는 테오에게도 금화 상자 세 개를 건넸다. 테오가 눈을 반짝이며 상자를 열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이거 모두 얼마입니까?”
“18억 프랑. 엘디아한테서는 배당금 들어왔어?”
“1백만 프랑 들어왔습니다.”
지분대로 받아오면 고작 그거냐고 할 일이지만 지금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카이는 품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딱 100장짜리 책.
마탑 연합에서 인정한 지적 재산권 보호 목록 제 12호였던 지분 책자다.
카이가 사 온 이 지분 책자는 ‘그레이스’라는 이름의 책자였다. 마탑 연합에도 정식으로 등록된 이름. 지분 관계가 복잡한 경우에는 천 장짜리도 판매하지만 카이는 100장이면 충분했다.
이 책에 지분을 등록하면 마탑 연합에도 기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탑 연합에서 인정해주는 것.
등록비만 1백만 프랑이나 하기에 어지간한 곳에서는 등록하지 않지만, 지분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때는 사용하는 것이었다.
카이는 지분 책자의 첫 장을 펼치며 말했다.
“우리 ‘그레이스’의 지분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비드와 에르케는 이름만 들었던 지분 책자를 보고는 신기해서 다가왔다.
카이가 먼저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베어 책에 떨어트리고 손바닥을 올렸다.
곧 빛이 나자 카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지분 등록이 가능합니다. 일단 다비드와 에르케에게 약속했던 지분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배당금은 천천히 받는다고 해도 지분은 확실히 드린다고 말했으니 피를 흘리고 손을 올리세요.”
대표로 등록한 이가 허락하지 않으면 지분 등록 자체가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카이가 허락한 다비드와 에르케가 지분 책자에 손을 올렸다.
카이는 그들에게 약속대로 5%씩 지분을 내줬다.
지분 등록을 하고 각기 다섯 장씩의 책장을 뜯어 줬다. 저 한 장 한 장이 1%의 지분을 나타내는 것.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는 저 지분의 주인의 허락이 다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협박 같은 것을 통해서 지분을 넘겨받으면 마탑 연합에 신고했을 때 그들이 직접 회수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100만 프랑이나 하는 물건이었다.
카이는 테오도 불러서 3%의 지분과 세 장을 넘겨줬다. 테오가 혹독한 시종장의 훈련을 받은 이 답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받아갔다.
“제자야! 나는! 나는?”
카이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소리치고 봤던 덴다르트가 뻘쭘해할 때 카이가 픽 웃음을 흘렸다.
“스승님은 1%만 드리겠습니다.”
“크하하하! 역시 내 제자! 최고다!”
지분의 1%. 지금 ‘그레이스’의 영업 이익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돈이기도 했지만, 6성급 마법사를 1%의 지분으로 사들인다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었다.
이 지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덴다르트는 ‘그레이스’를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앞으로 부려먹을 곳이 많으니 미리 기름칠해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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