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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26화 (26/150)
  • 026화 결심

    엘디아는 덴다르트와 엘티온의 부축을 받아서 먼저 걸음을 옮기는 카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코를 가렸다.

    은은하게 퍼져 있는 아프록시아 잎의 향.

    눈 밑이 퀭한 것을 보면 확실히 중독되어 있었다. 하긴 벨록 상단에게 아프록시아 잎은 계속 사가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렇게 안내받아간 곳은 응접실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테오가 손수레를 밀고 나타났다.

    간단한 티타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엘디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혼하고 찾아오지도 않은 데다가 엘더에서 나오던 카이 몫의 배당금을 주지 않았다. 당연히 반감이 쌓여있을 줄 알았는데 카이는 오히려 자신을 손님으로 제대로 대접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테오가 준비해 주는 차도 자신이 즐겨 마시던 차였다.

    혼자서 죽어가는 중에 그리워졌던 건가?

    오늘의 이야기가 쉽게 진행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카이는 옆자리에 앉은 엘티온에게 시선을 주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제대로 된 유작 하나만 받으면 되니까.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카이는 그 말에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엘티온을 보는 카이의 눈빛은 복잡했다.

    “괜찮단다.”

    “다행이네요.”

    환하게 웃는 엘티온을 보며 카이는 그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 힘없는 손길에 엘디아는 조금만 늦게 왔어도 유작을 만들지도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성급 축소 마법진을 만들고 돈을 들여서 6성 마법사에게 활성화 시키면 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속인 채 그에게 엘더의 제품을 더 만들게 해야 했나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카이는 작게 기침하고는 엘티온에게 덴다르트를 소개해주었다.

    “여기는 내 스승님이신 방랑 마법사 덴다르트 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티온입니다.”

    덴다르트는 엘티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무척이나 과묵한 것인지 미간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카이는 엘티온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보고는 물었다.

    “좋아 보이는 검이구나. 이제 진검 수련에 들어간 것이냐?”

    “어머니가 이번에 안타르시아를 다녀오며 사주신 검입니다. 한 번 보실래요?”

    엘티온이 검을 뽑아서 보여줬다. ‘플레이트’에서 보았던 검을 바라보며 카이는 탄성을 터트렸다.

    “잘 만들었구나.”

    “그렇죠?”

    단순히 아티펙트로서의 성능만이 아니라 검을 만드는 야장 기술 또한 마탑은 장인들을 고용해서 만들기 시작하더니 검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

    카이가 만드는 나이트와 룩의 장비들도 분명 뛰어난 것들이지만, 야장 기술자체가 부족한 것들이라 안타르시아에 가면 그 둘의 장비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가 검을 다시 돌려주자 엘티온은 그를 살펴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저희랑 같이 궁으로 돌아가시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궁이 회복을 위해서도 더 좋지 않을까요?”

    “괜찮단다. 그보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일찍 쉬려무나.”

    “저 괜찮아요. 요즘 체력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카이는 고개를 내젓고는 엘디아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머물 생각이오?”

    “적어도 오늘은 자고 갈 생각이에요.”

    카이는 엘티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예.”

    엘티온은 엘디아와 카이가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테오를 따라서 응접실을 떠났다.

    엘티온이 떠난 것을 확인한 카이는 엘디아를 바라보았다. 응접실에는 엘디아의 호위를 서고 있는 프레드와 카이의 옆에 앉아 차를 마시는 덴다르트뿐이었다.

    “스승님. 프레드 경과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괜찮겠냐?”

    “저야 괜찮습니다.”

    엘디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프레드 경. 자리를 비켜주세요. 카이와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

    “공주님.”

    “그의 상태는 잘 알잖아요. 그러니 자리를 비켜줘요.”

    프레드가 보기에 카이는 마력 한점 느껴지지 않았고, 그의 몸 상태는 얼핏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엘디아가 힘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진 몸이었다.

    “알겠습니다.”

    덴다르트가 프레드를 데리고 나가자 카이가 그제야 엘디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엘디아는 카이의 목소리에 담긴 냉랭함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존심은 세우고 싶었던 걸까?

    하긴 무결의 마법사라 불리며 왕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자가 몰락하면서 챙길것은 자존심밖에 없다고 여겼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카이가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자 엘디아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미천한 남자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엘더를 살려야 했다.

    “새로운 아티펙트 브랜드가 나타났어.”

    카이는 여전히 답이 없이 엘디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충전식 6성급 보호 마법이 새겨진 목걸이로 ‘플레이트’의 최고가 경매를 받아갔으니까.”

    엘디아는 카이가 여전히 말없이 바라만 보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엘더를 뛰어넘는 브랜드가 될 판이야. 안타르시아에서도 매장을 빼앗겼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제대로 된 아티펙트를 만들어줬으면 해. 엘더는 당신 것이기도 하잖아.”

    카이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곧 죽을 내게 엘더가 무슨 의미이지?”

    엘디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읽은 카이는 정말 그녀가 대단하다 여겼다.

    ‘그레이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작을 원하다니?

    “엘더는 엘티온의 것이 될 거야.”

    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다른 건 몰라도 엘티온 만큼은 잘 챙겼었다.

    얼마나 잘 챙겼는지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거의 없이 하다시피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엘티온의 것이 된다라.”

    카이가 말을 일부러 늘리자 엘디아는 그가 슬슬 넘어온다고 여겼다.

    “제대로 된 것 하나만 만들어 줘.”

    “마력이 봉인 당해서 활성화도 못 시키는데?”

    “그건 다른 6성급 마법사를 구해서 활성화만 시키면 될 일이니까.”

    카이는 이미 엘디아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자신을 찾아왔음을 알았다.

    “지금 몸 상태로 과연 마법진이나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

    카이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여주자 엘디아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약이 필요하다면 말해. 얼마든지 구해줄 테니까.”

    중독자들의 손이 떨리는 것은 약이 부족해서라는 걸 알고 하는 말. 골수까지 빨아 먹고 싶다는 말을 저리도 당당히 하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 싶었다.

    “생각을 좀 해보고 답해 주지.”

    “그렇게 해. 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 신령의 대마법사가 엘더에게서 손을 떼기 전에 손을 써야 하니까.”

    카이는 힘겹게 일어나며 손가락을 튕겼고, 인형 하나가 들어와 그를 부축했다. 인형의 부축을 받아 멀어지는 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디아는 차를 마시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의 눈빛을 보니 곧 결론이 날 것 같았다.

    엘티온이 자신의 자식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궁을 떠날 만큼 그를 아낀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그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데 엘더는 그가 이룬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엘티온에게 넘길 거라는 얘기를 듣고도 엘더가 무너질 길을 택할 리는 없었으니까.

    카이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옆에는 의자를 가져다 놓은 덴다르트가 앉아 있었다.

    엘디아가 온다고 해서 성내에 함께 기거하던 이들은 모두 내보낸 상황. 남은 것은 테오와 덴다르트 뿐이었다.

    카이는 덴다르트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고, 그는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다 죽여버릴까?”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죽였습니다.”

    아벨로 만났을 때 죽여도 됐고, 왕궁 전체를 적으로 둘 수는 없어도 암살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참는 것을 보면 너도 참 대단하다.”

    마탑의 꼰대에게 들이받고 마탑을 나와 방랑 마법사단에 든 덴다르트라면 확실히 못 참고 일을 저질렀으리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카이는 담담히 대답했다.

    “만들어주려고요.”

    “만들어준다고? 왜?”

    카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제 유작이라고 ‘플레이트’ 경매에 내보내겠죠. 사실 그 전에 이미 ‘그레이스’가 엘더를 완전히 넘어설 것이기도 하니 그 유작에 모든 것을 걸겠죠.”

    “그렇겠지.”

    “그 유작이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활성화도 되었고, 1회용 5성급 보호 마법이 들어있지만, 메르샤 정도라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되면 엘더는 안타르시아에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겁니다. 이 바닥에서 신뢰를 잃으면 끝이니까요.”

    덴다르트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유작이라고 발표하려면 네가 죽은 척이라도 하려고?”

    “뭐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 엘디아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볼 수도 있겠죠.”

    “살아있는 자네를 죽었다고 발표할 수도 있다는 건가?”

    카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입니다.”

    이번에 엘티온을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보여줄 때 알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귀족들이 평민은 상상도 할 수 없게 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여자는 그 이상이었다.

    엘티온은 자신에게 있어 그를 볼 때마다 측은하면서도 그녀가 바람을 핀 증거와 같은 아이다.

    마주하는 것 자체가 실상은 상처를 후벼파는 것만 같은 아이.

    엘티온이 죄가 없다는 것은 안다. 누가 엘디아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는가?

    그것도 바람을 피워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만큼 아꼈기에 지금은 엘티온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과거의 아끼던 모습만 생각하고 데려온 엘디아에게는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된다.

    카이가 살아있어도 외부에 활동하지 않는다면 분명 죽었다고 발표하고도 남을 여자니까.

    아니, 어쩌면 자신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를 여자였다.

    아마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이라면 손쉽게 죽일 수 있다고 여길지도.

    그러나 그냥 만들어준다고 해서는 그녀도 의심할 터였다.

    그러니 자신이 엘티온을 아직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아이 때문에 해주는 것처럼 굴 필요가 있었다.

    “스승님. 맹약을 하나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맹약?”

    “예. 그녀가 스스로 무덤을 팔 맹약을 걸 생각입니다.”

    덴다르트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주마.”

    덴다르트는 엘디아를 죽여주겠다고 했었다. 그런 그라면 분명 도와주려 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건 무슨 말이냐?”

    카이는 그 말에 엘디아를 떠올렸다. 그녀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카이는 그녀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맹약 하나만 잘 걸어두면 스스로 무덤을 팔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던 엘티온에게 버림받게 될 겁니다.”

    작가의말

    내용이 수정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뒷내용에도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돌싱 후 대마법사-맹약(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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