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거래
경매장을 나서는 길에 입구에서 벽에 기대고 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건넸다.
“아줌마에게 관심이 없다면 저는 어때요?”
카이가 멀뚱히 바라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는데 어설프다.
대륙 삼대 상단 펜타로 상단의 모네.
상단주의 딸인 그녀는 아직 어렸다. 이제 스물을 조금 넘겼으려나?
풋내가 난다는 말이 절로 어울렸다.
이십대 중반만 되었어도 지금보다 경험이 많아져서 제법 매력적이었을지 몰라도 너무 어리고, 치기를 참지 못한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러니 저 빈약한 가슴을 열심히 앞으로 내밀고 있는 거겠지.
옆에 서 있는 프릴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나 보다. 어차피 마법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변형한 것일 뿐이기는 했어도.
펜타로 상단의 상단주라면 잠깐 관심을 둬 줬을지도 모른다. 대륙 3대 상단이라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단주의 외동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직 덜 자란 아가씨에게도 관심 없어.”
카이는 그리 말하고 그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모네가 양볼을 부풀렸지만, 그의 곁을 따르는 짐꾼마저도 쉽게 볼 수 없는 미모를 지닌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6성급 마법사에 ‘그레이스’의 주인이다. 고작 하나의 작품만 내놓았지만, 그 하나가 200억 프랑에 팔렸다.
그걸 사보겠다고 열심히 계산했던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클란드라가 점 찍은 물건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대륙 최고의 제국인 클로젠 제국의 황녀라고 하지만 그만한 금액을 가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어떻게든 ‘그레이스’의 주인과 친분을 맺어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펜타로 상단을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까.
모네는 멀어지는 카이와 일행을 두 눈에 담았다.
카이는 경매가 끝나고 다시 메르샤의 방으로 가야 했다. 다른 경매 물품들이야 대금을 알아서 나눠 받겠지만, 이번에 받을 금액이 워낙 큰 탓이기도 했다.
카이는 오히려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200억 프랑.
100만짜리 금화로 2만 개나 된다. 그걸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제국에는 1억 프랑짜리 주화가 있으니까.
이건 복제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건 들어가는 재료가 진금인데다가 주화에는 직접 수몰의 대마법사 테오르가 각인을 남겼다.
게다가 이 주화에는 모두 넘버가 있다고 하니 위조가 불가능할 터였다.
일단 단위부터가 어지간한 영지 1년 예산 수준이니 그 주화를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감히 8성의 대마법사 테오르가 직접 각인을 남긴 주화를 위조할 간 큰 놈은 없을 터였다.
200억 프랑 정도 되면 100만 프랑짜리 금화로는 주기 힘드니 1억 프랑짜리 진금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대도 되었다.
메르샤의 방에는 예상대로 메르샤와 클란드라가 있었다. 그런데 클란드라의 무릎 위에는 전에 본 적이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새하얀 고양이는 왕족처럼 고고하게 앉아있었는데 그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5천만 골드에 사 간 엘더의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었으니까.
카이는 클란드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았다. ‘부활’은 사실 매일 차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어울렸다.
마치 주인을 찾아간 느낌.
저만큼이나 파격적인 디자인이 잘 어울리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카이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 앉자 메르샤가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접객원장 베이트가 쟁반을 들고 왔다.
얼마 전에 2억 프랑을 받았는데 이번에 베이트가 가지고 온 것은 1억 프랑짜리 진금화였다.
200개의 1억 프랑짜리 진금화를 옆에 내려놓자 메르샤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나도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네. 우선 수수료 가져가도 되지?”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트가 그중 스무 개를 챙겼고, 메르샤는 그중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을 꺼냈다.
“이 진금화 자체는 어지간한 곳에서는 환전하지도 못하지만 다른 곳에 가면 1억1천만 프랑으로 환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카이도 그 부분은 몰랐다. 카이의 표정을 보고 메르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1억 프랑짜리 주화는 제국에서 인정받는다는 얘기나 다름없으니까. 클로젠 제국의 황실 상단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증표나 마찬가지거든.”
엘도 왕국에서 살았던 카이는 동부를 꽉 쥐고 있는 클로젠 제국의 황실 상단과 엮일 일은 거의 없었다. 안타르시아에 와서 클로젠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카이가 1억 프랑짜리 주화를 들어 올렸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주화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쪽 가장자리에 적혀 있는 수는 일곱 자리의 수였는데 0001211이라는 수가 적혀 있었다.
카이는 다른 주화들도 그것에 이어지는 수라는 것을 보고 새삼 이 주화가 대륙에 얼마나 풀리지 않았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제국의 상징적인 주화라는 건가?
카이는 주화를 뒤집어 보았다. 주화 위에는 여덟 개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걸 보고 카이는 새삼 수몰의 대마법사가 남긴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카이의 마력 봉인처럼 이것도 동시에 여덟 개의 각인을 새겼다. 카이가 초집중 상태로 시간을 쪼갰다면, 이것은 공간을 나눈 형태였다.
그 안에 담긴 성취를 바라보던 카이는 어쩌면 이게 8성으로 가는 또 한 번의 걸음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수몰의 대마법사가 자신의 기량을 자랑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경지를 살펴볼 기회가 됐다.
돌아가서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앞으로 뭐 할 거야?”
카이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클란드라가 입을 열었다.
“혹시 주문 제작도 받나?”
“주문 제작?”
“부황께서 50세 생신이 석 달 남았거든. 선물할만한 물건을 주문 제작하고 싶은데.”
카이는 그 부분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젠 제국의 황제가 ‘그레이스’의 물건을 착용하고 다닌다면 분명 굉장한 광고 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만, 제국의 황족이 독점하는 모양새가 되면 안 된다.
게다가 누군가의 주문 제작을 받아준다면 그때부터는 체면 때문에라도 알력이 생길 수 있다.
제국의 황제는 해주고 일국의 왕은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카이가 거절할 줄은 몰랐던지 클란드라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레이스’는 주문 제작할 계획은 없소.”
“100억 프랑을 낸다고 해도?”
카이는 그 말에 잠시 혹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200억 프랑은 카이의 예상도 아득히 뛰어넘은 낙찰가였다. 계획을 몇 단계나 끌어당겨도 될 정도의 돈.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갈 마음이 없어졌다.
클란드라는 잠시 카이를 바라보았다. 6성급 워 메이지에 아티펙트 제작의 거장이라고 할 만한 이라고 하나 제국의 이름 앞에서는 우스울 따름이다.
하지만 클란드라는 오히려 그렇기에 수긍했다. 한 방면의 거장이라면 그만한 고집은 있어야 한다는 건 수몰의 대마법사를 통해서 충분히 배웠다.
클란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황궁으로 찾아와라.”
클란드라가 먼저 떠나자 카이는 1억 짜리 주화가 담긴 쟁반 너머에 앉아있는 메르샤를 바라보았다.
“제안할 게 있다.”
“제안?”
“‘그레이스’는 경매로만 팔고 싶다.”
메르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1년에 한 작품만 내겠다는 건가?”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레이스’의 제품이 나오면 경매를 열어달라는 거지.”
“‘그레이스’의 제품만으로? 그건 경쟁성이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나?”
카이의 물음에 메르샤는 턱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그레이스’는 마법계에 한 획을 그을만한 물건이었다. 마탑 연합에서도 지적 재산권을 내려줄 만한 물건.
그만한 물건을 독점 경매할 수 있다면 메르샤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레이스’를 구하고 싶은 자는 안타르시아로 오게 될 테니까.
메르샤는 턱을 괸 채로 카이의 앞에 놓인 쟁반을 바라보았다. 1억짜리 진금화 180개. 단 한 번의 경매로 저만큼이나 벌었다.
수수료만 걷었는데도 1년 예산을 확보했을 정도.
메르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륙 전역에 광고부터 시작해서 경매까지 모두 우리가 해주는 대가로 낙찰가의 20% 어때?”
카이는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그렇게 하지.”
그 말을 듣고 메르샤는 조금 더 부를 걸 그랬나 고민했다. 그러나 카이의 눈빛을 보니 그 말이 쏙 들어갔다.
메르샤는 카이가 6성 마법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무리 워 메이지에 육체 강화 능력자에게 상성 상 우위에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전혀 위축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메르샤는 역시 이 사내가 보통 인물은 아니다 싶었다. 자신에게 부탁도 아니고 당당히 조건을 말하는 인간은 근래에 보지 못했으니까.
“안타르시아에 있는 엘더 전용 매장을 빼 줘.”
“응?”
생각지도 못했던 조건 때문일까?
메르샤가 황당하다는 듯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이해가 갔다.
안타르시아는 유행의 선두를 달리는 곳이었다. 아티펙트 만이 아니라 예술품의 유행 또한 이곳에서 시작해 대륙 전역으로 뻗어 나간다.
‘그레이스’가 명품 브랜드 아티펙트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일단 ‘엘더’를 쳐내야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엘더’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 차이를 내고 있었다.
안타르시아에 있는 ‘엘더’ 전용 매장을 빼게 하면 이번 경매장에서의 일과 함께 엮여 그 명성이 바닥에 처박히게 된다.
“위약금을 물어야 해. 계약을 파기하는 쪽이 두 배를 물어야 하거든.”
“얼마야?”
“1억 프랑.”
새삼 안타르시아의 미친 자릿세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엘더의 매장이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카이는 쟁반 위에서 1억 프랑짜리 진금화 하나를 메르샤에게 던졌다. 메르샤는 진금화를 받더니 활짝 웃었다.
이미 ‘엘더’는 몇 개월째 무결의 마법사가 만든 제품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경매에 나온 물건만 봐도 지금까지의 이름값을 생각해서 순서를 잘 잡아주었지만, 귀빈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괜히 엘더의 편을 들어주다가는 안타르시아의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
카이의 제안은 솔깃한 면이 있었다.
“‘그레이스’ 전용 매장을 하나 열어줄까? ‘엘더’의 자리에 어때?”
카이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제품은 안 들여놓을 거야. 경매로만 팔 거니까.”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간판만 걸어 놓아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거야.
나중에 광고하기도 편하겠지. 5년에 5천만 프랑. 그 안에 계약 해지할 시에 위약금 두 배. 같은 조건이야.”
카이는 1억짜리 진금화 하나를 더 던져주고 일어나며 말했다.
“10년으로 하지.”
“통 큰데?”
메르샤가 손가락을 튕기자 베이트가 다가와 서류를 준비해 줬다. 메르샤는 콧노래를 부르며 서명하고 카이에게 넘겨줬다. 카이가 서명하는 것을 바라보던 메르샤가 물었다.
“엘더를 집어삼킬 생각이야?”
카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샤는 카이가 엘더를 표적으로 삼은 것을 보고 눈치챘다.
조립 마법진만으로도 마법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축소 마법진 설계의 지적 재산권도 얻게 되면 ‘그레이스’는 날개를 달게 된다.
오히려 기대될 정도다. 지금도 6성 보호 마법을 새길 수 있는데 축소 마법진까지 더한다면 그때는 아티펙트에 7성 마법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려면 저 사내가 7성의 벽을 넘어야 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이 자는 충분히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리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해달라는 것만 해줘서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해줄 때는 확실히 해주는 것이 좋다.
카이가 서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옆에서 다가온 베이트가 상자에 진금화를 담아서 건넸다. 카이는 진금화가 든 상자를 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출발할 생각이니 비공정 준비해 줘.”
“언제든지 말만 해. 전용 편으로 해주지. 그리고 그 비공정의 행방은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프란퀴스가 움직일 테니까.”
바람의 상급 정령을 프란퀴스가 함께 한다면 그 속도는 다른 비공정이 따르지 못한다. 어차피 비공정을 이용하는 이상 메르샤에게 행선지는 속이지 못할 테니 다른 비공정에게 행선지를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
카이가 만족한 표정으로 떠나자 메르샤가 베이트를 불렀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안타르시아에서 블랙 카드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굳이 물건을 사러 가지 않고 주문만 해도 알아서 다 구해왔다. 그래서 카이는 인형 제작에 쓸 물건을 잔뜩 주문했다.
테오가 과소비했다고 난리를 칠 수도 있기에 선물도 준비했다. 뭐 돈 많이 벌었으니 뭐라고 하지 않을 테지.
카이는 그 짐들을 모두 비공정에 실었다는 보고를 듣고 일행과 함께 떠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 카이의 앞으로 메르샤가 다가왔다.
“이제 떠나는 건가?”
“시장의 자리가 한가한가 보군.”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지만, 메르샤는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플레이트’가 끝나고 난 후가 가장 한가하거든. 그보다 가는 길에 뭐 하나 보여주려고.”
카이는 메르샤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그녀가 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안타르시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 10층짜리 건물의 간판이 바뀌어 달려 있었다. 엘더의 간판이 내려가고 그곳에는 ‘그레이스’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필체의 간판에 마법이 들어가 있는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간판이었다.
“하루 만에 저만한 간판을 제작하는 게 가능했나?”
“나 여기 시장이야.”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돌아서다가 망연한 기색으로 간판이 바뀐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엘디아를 보았다. 주먹을 꼭 쥔 채 부르르 떠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니 진심으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레이스’의 다음 작품이 완성되는 대로 연락하지.”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카이가 원반에 타고 비공정을 타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메르샤는 엘디아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그레이스’가 대륙 제일이 되기 위해서 ‘엘더’를 공략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눈치다.
메르샤가 콧노래를 부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걸?”
돌싱 후 대마법사-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