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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 후 대마법사-14화 (14/150)
  • 014화 여흥

    안타르시아의 결투장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수준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라 어지간한 시합으로는 관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엘폰토 공작의 이름은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엘도 왕국의 제일검이라고 불리지만, 대륙 전체로 보면 그의 이름값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엘더가 대륙 전체에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다면 그저 변방의 왕국 제일 검 정도로만 알음알음 알려졌으리라.

    마스터도 아닌 6성급 기사로 대륙 전체로 보면 백 단위가 넘어가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크게 명성을 떨친 일도 없는 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해도 6성 이상의 기사와 마법사가 싸우는 것은 구경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대륙에 100명이 넘게 있는 기사와 마법사라고 해도 그 수는 현저히 적고 다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어지간한 규모의 전쟁에서는 싸울 일도 없었으니까.

    그만한 이들이 결투를 벌인다는 말에 다들 구경을 위해 모였고, 단숨에 판이 벌어졌다.

    안타르시아에 올 정도 되는 이들에게 이런 대결은 그저 유흥일 뿐이었다. ‘플레이트’ VIP 경매는 이틀 후에 열리는데 이런 여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카이의 요청으로 삽시간에 준비가 된 결투장에는 할 일 없는 VIP들이 모였다.

    그들이 두 사람에게 판돈을 거는 사이에 엘폰토는 엘디아 공주의 앞에서 무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엘디아 공주는 엘폰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뭐가?”

    “날 위해 검을 들어준 것 말하는 거예요.”

    엘폰토는 그 말에 그녀가 오해했음을 알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도발한 건방진 마법사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줄 생각이었다.

    워 메이지라고 해도 기사와의 대인전은 쉽게 청하지 못한다. 그런데 감히 자신을 도발했다. 그러니 놈을 처벌하면 된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잔인한 장면을 보게 될 텐데 들어가서 쉬어도 돼.”

    엘디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목을 벨 것도 아니잖아요. 들어보니 이 결투장 목숨은 빼앗으면 안된다고 하던데.”

    “신령의 대마법사와 싸울 게 아니라면 그래야만 하지.”

    7성 대마법사. 게다가 지하에 있는 안타르시아의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여인. 그녀가 작정한다면 이곳이 무너질 수도 있고, 그리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메르샤의 뜻을 거절하겠는가?

    “그래도 잔인할 거야.”

    엘폰토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할게요.”

    엘디아는 그리 말하고는 대기실을 나서서 VIP석으로 이동했다. 엘디아는 엘더의 주인으로 안타르시아 내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녀의 자리는 가장 상석인 메르샤의 옆자리였다. 메르샤는 결투가 벌어진다고 하자 결투장을 내주고는 자리를 주선했다. 그런 메르샤의 옆으로 다가간 엘더는 메르샤의 옆에 있는 자리들을 보았다.

    안타르시아에서도 무시하지 못하는 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중 두 자리는 비어 있었고, 한 자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검정색 드레스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을 본 엘디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검정 드레스의 여인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엘디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메르샤의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검정 드레스의 여인이 살짝 불쾌하다는 듯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였는데 그 모습에 엘디아는 이를 뿌득 갈았다.

    클로젠 제국의 3황녀 클란드라 폰 라이드 클로젠.

    대륙의 3할을 차지하고 있는 클로젠 제국은 엘도 왕국의 접경지가 아니다. 사이에 신성 교국이 자리하고 있어 클로젠 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나 클로젠 제국이 대륙 제일의 힘을 지니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제국의 3황녀인 클란드라는 엘디아가 안타르시아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최고 VIP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그저 우러러만 보았던 황녀.

    하지만 지금은 엘더가 대륙 제 일의 아티펙트 명품 브랜드가 되었고, 그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다만 클란드라는 아직도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메르샤는 자리를 권하며 미소 지었다.

    “엘디아 공주. 그런데 카이는 왜 같이 안 왔죠?”

    “연구에 매진하는 중이에요.”

    메르샤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긴 카이라면 언제고 7성의 대마법사가 되기는 할 테니까. 공주에게 푹 빠져서 마법 수련을 등한시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언제고 대륙에는 또 하나의 대마법사를 보겠네.”

    메르샤는 카이를 떠올렸다. 6성에 이른 신성이었던 그를 보았을 때는 솔직히 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신이 내건 규칙만 아니었다면 죽였을 정도로 눈부신 재능을 가진 사내였다.

    그 뒤로 별다른 소문이 들리지 않고 있었지만, 그만한 재능을 지닌 자라면 어떻게든 대마법사의 위까지는 올라오리라.

    메르샤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그보다 오늘에야 엘도 왕국 제일검의 실력을 보겠네요. 그의 실력은 어떻죠?”

    “왕국 제일 검이에요.”

    클란드라가 옆에서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디아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메르샤는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운 아티펙트를 가지고 온 사내와 엘폰토가 결투장에 올라온 것을 보고는 메르샤가 일어난 채로 양팔을 벌렸다.

    “안타르시아의 결투장을 찾아오신 모든 VIP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엘도 왕국의 왕국 제일검이라 불리는 엘폰토 공작과 신생 아티펙트 브랜드 ‘그레이스’의 대표 아벨입니다.”

    엘디아는 그 말에 살짝 인상을 굳혔다. 아벨이라는 저 중년 사내가 메르샤에게 보여줬던 것이 아티펙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엘더의 물건보다 먼저 선보일 정도의 아티펙트를 만든 자.

    엘폰토가 그를 제거할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 자리에서 상대를 죽인다면 나 신령의 대마법사 메르샤를 적으로 두겠다는 것으로 알겠어요. 그러니 죽이지는 말 것. 하지만 죽이지만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라도 인정하죠. 결투인 만큼 결과를 받아들이고 복수는 하지 말도록 해요. 적어도 이 안타르시아 안에서는.”

    메르샤는 안타르시아 내에서 법이었다. 그녀가 그리 결정했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못한다.

    “그럼 시작하죠.”

    메르샤가 자리에 앉자 엘폰토는 맞은편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로브 하나 달랑 걸친 채 서 있는 자. 얼추 느껴지기에 6성 마법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경지가 아니라면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상황에서는 워 메이지라고 해도 기사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엘폰토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

    카이는 그런 엘폰토를 바라보면서 양손을 내밀었다. 카이의 양 손목에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손가락에도 여덟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엘폰토가 코웃음을 쳤다.

    “아티펙트 장인인가 보군. 내가 아는 녀석 중에도 그런 녀석이 있었지. 제 분수도 모르던 녀석이.”

    카이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였다. 여덟 개의 반지를 낀 손으로 까딱이는 손짓에 엘폰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지에는 축소 마법진을 새겼을 때만 제대로 된 마법 장신구가 된다.

    엘더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었고, 그렇게 만든 것의 수준은 고작 5성급.

    고작 그 정도를 믿고 덤빈다니 확실히 손을 봐줘야겠다 싶었다.

    엘폰토가 땅을 박차고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몸에 두른 마력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엘폰토의 검이 마법사의 목을 찔렀다.

    마법사의 목을 그대로 관통하는 검에 엘폰토가 순간 당황했다. 죽이면 안 되는데 죽여버린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앙!

    엘폰토는 검을 휘둘러 폭발을 베어냈지만, 그 정도로는 폭발을 다 막아내지 못했다.

    “잔재주를!”

    환영으로 자신을 속인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볼 일이었으나 이 정도 폭발로는 자신을 해할 수 없다.

    엘폰토가 폭발을 베어낸 사이에 폭발의 여파였던 불길은 검풍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흩어진 불길은 오히려 살아있는 것처럼 엘폰토를 휘감아갔다.

    엘폰토는 자신을 휘감는 불길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촤?.

    그렇게 불길들을 베어낼 때 한 자루 화염의 창이 날아들었다. 엘폰토가 불길을 베어내는 순간에 코앞까지 도달한 화염의 창은 피할 여력이 없어 결국 검을 들어 막아야 했다.

    꽈앙!

    엘폰토가 폭발에 밀려 날아갈 때 카이는 원래 엘폰토가 있던 자리에 서서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엘폰토가 그 모습에 이를 뿌득 갈 때 그의 발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 불길은 원래 카이가 있던 자리. 그 자리로 밀려난 엘폰토의 발밑에서 터진 불길.

    피할 틈이 없어 마력을 온몸에 두르고는 솟구쳤다.

    콰앙!

    피해를 최소화한다고 했지만, 조금 전의 불길은 섬뜩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6성 마법사가 공을 들여서 펼친 마법은 그만큼이나 위력이 강력했다.

    그렇게 솟구친 엘폰토는 열이 뻗칠 대로 뻗쳤다. 처음에 환각 마법으로 자신을 낚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내몰리자 메르샤의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감히 자신을 농락한 저 마법사를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엘폰토가 허공을 박차고 마법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고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건방진 놈. 이대로 베어버리겠다!

    엘폰토의 검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른 검기는 그대로 상대를 쪼갤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키이잉!

    수직으로 떨어진 검이 옆으로 흘러내린다. 그제야 마법사가 여섯 겹의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고, 그 보호막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급하게 검을 수습하기도 전에 마법사가 엘폰토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황급하게 몸을 움직였을 때 마법사의 손에서 작은 불의 고리 하나가 날아왔다.

    급소는 피했지만, 왼팔은 피하지 못했다. 불의 고리가 왼팔에 휘감긴 순간 온 마력을 다해서 팔을 보호했다.

    화륵.

    마력을 팔에 둘렀는데도 불길은 단숨에 그 팔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불길은 마력을 두른 팔을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끄아악!”

    팔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이게 현실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마력을 두른 팔이 어떻게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불에 타버린단 말인가?

    이것도 환각인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불의 고리가 연달아 날아왔다. 황급히 몸을 틀면서 검을 쳐냈지만, 예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없어졌다.

    갑자기 팔이 사라지면서 잃어버린 균형 탓이었다. 그래서 날아온 모든 불의 고리를 베어내지 못했다.

    또 하나의 불의 고리가 다리에 닿았고, 삽시간에 마력을 집어삼키며 태워버렸다.

    저 단순해 보이는 불의 고리가 사실은 상대의 마력까지 태워버릴 수 있는 비전의 마법일 줄은 몰랐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잃은 엘폰토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난생처음이었다. 검에 대한 재능 하나만큼은 뛰어나 젊은 나이에 6성에 올랐다. 그래서 세상이 쉬웠다.

    그런 그에게 팔과 다리가 사라지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게다가 잘린 것이라면 다시 붙이기라도 하겠는데 이건 둘 다 타서 사라졌다.

    그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끄아아악!”

    그저 고통을 잊기 위해서라는 듯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체면따위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처절한 고통이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마법사가 다가왔다.

    무심한 눈을 본 엘폰토는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살기 한 점 흘리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부르르 몸을 떠는 엘폰토에게 카이가 손을 내밀 때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드는 존재가 있었다.

    바람의 상급 정령 프란퀴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끼어들어서는 마법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일 거야?]

    마법사는 프란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건너편의 엘폰토를 바라보았다. 눈물콧물 줄줄 흘리며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고 마법사는 뒤돌아서며 한 마디 했다.

    "버러지는 바닥을 기어야지."

    카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엘폰토의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살고만 싶었다. 팔과 다리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카이는 그 모습을 눈에 담고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개 소리인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복수는 짜릿했고, 이것은 정당한 권리였다.

    대기실로 향하는 카이의 등을 향해 메르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체면 봐줘서 고마워.]

    뒤돌아서 대기실로 돌아가는 카이는 메르샤의 뜻 때문에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은 엘펜토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도록 팔과 다리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으니 앞으로는 불구로 살아갈 터. 그렇게 조금씩 스스로를 갉아먹는 중에 놈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냥 죽여서야 그게 어찌 복수가 되겠나?

    카이는 결투장을 내려가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VIP 자리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엘디아를 잠시 바라보던 카이는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엘폰토를 부순 것은 엘디아에게도 영향을 끼칠 터. 갑자기 벌어진 이벤트였지만, 이 정도면 여흥이라고 할만했다.

    돌싱 후 대마법사-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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