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결정
쨍그랑.
크리스탈 잔이 산산이 조각났다.
“아악! 짜증나!”
엘디아가 손에 들고 있던 크리스탈 잔을 던진 채로 화를 삭이는 동안 따라온 시종이 깨진 크리스탈 잔을 치우는 동안 엘폰토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물건 구했잖아. 그런데 왜 그래?”
베이트가 안내한 VIP 전용 매장은 확실히 대단했다. 물건들의 가격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돈이라면 넘치도록 있었으니까. 엘폰토는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검을 하나 샀다.
“한스의 태도 못 봤어요?”
“봤지. 건방지더군.”
엘폰토는 6성급 기사다. 워 메이지가 아닌 다음에야 같은 성급이라도 기사가 대인전에서는 훨씬 강하다. 그러니 한스가 얼마나 같잖아 보였던가?
신령의 대마법사인 메르샤의 밑에서 감정이나 해먹고 사는 주제에 감히 자신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검을 뽑을 수 없었다. 6성 마법사와 7성 대마법사는 그 차이가 극명해서 워 메이지가 아니라고 해도 상대할 수 없다. 특히나 정령 마법을 익힌 메르샤는 공방의 균형이 잘 맞는 이로 유명했다.
엘폰토가 그녀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동급의 기사 넷은 더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엘폰토는 말은 그렇게 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엘디아는 인상을 굳혔다.
카이는 저러지 않았다. 평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엘디아에게 푹 빠져서였을까?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참아 넘겨도 엘디아가 무시 받는 것은 참지 못했다.
처음 엘더의 작품을 경매에 올리겠다고 찾아온 안타르시아에서 그들은 접객원들조차 무시하던 수준이었다.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엘도 왕국에서 온 왕족이었기에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던 수준.
하지만 그때 무시하는 순간 카이는 이곳에서 마법을 썼다. 메르샤가 나서서 제압하기는 했지만, 그 메르샤와 정면으로 대거리할 정도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화를 낼 줄 아는 남자였다. 뒤는 돌아보지 않고.
그런데 사촌 오빠인 엘폰토 공작은 뭔가?
6성에 달한 육체 강화 능력을 지닌 기사면 뭐하는가? 자신을 위해서 나서지도 않는데.
엘디아는 창가로 걸어가서 휘황찬란한 마법등이 가득 켜진 안타르시아를 내려다보았다.
한스의 뒤에 서 있던 중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냉막해 보이는 그 사내가 보여준 물건이 대체 뭐기에 특급 감정사 한스가 직접 메르샤를 만나러 갔을까?
카이가 없어도 엘더가 ‘플레이트’에서 최고가 경매를 한다면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대륙의 정상에 설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스는 보자마자 베이트에게 눈짓했다.
한스는 예술품도 볼 줄 안다. 그런 한스가 직접 보았음에도 메르샤에게 먼저 보여준 물건이 뭔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엘더의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보다 그 중년 사내가 보여준 물건이 더 관심을 끌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 물건. 내가 낙찰받아야겠어.”
“그래. 궁금하기는 하네. 어떤 물건이기에 감히 우리 물건보다 더 관심을 보였는지 말이야.”
엘디아는 시종이 가져온 새로운 크리스탈 잔을 받아서 와인을 홀짝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걸이를 만졌다. 카이가 선물했던 목걸이를.
‘플레이트’는 안타르시아에서도 1년에 한 번 열리는 경매로 VIP가 아니면 참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오는 물품들도 최저가 1천만 프랑부터 시작해서 최대 5억 프랑까지 나온 적이 있었다.
엘더의 첫 작품이었던 물건이었는데 5성 보호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엘더의 가치가 더 올라서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들었다. 아마 지금 그걸 돈 주고 살려고 한다면 정말 10억 프랑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플레이트’가 지급하는 블랙 카드는 최근에 받은 것이 카이였다. 그 뒤로는 블랙 카드를 받은 이가 없었는데 블랙 카드는 최고 VIP 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1억 프랑까지는 그냥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안타르시아에서만 사용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가치는 대단했다.
카이 일행이 접객원의 안내를 받은 것은 메르샤가 있는 건물의 상층부였다.
경매가 시작되는 것은 사흘 후. 그동안 마음껏 이곳에서 즐기면 됐다.
방 안에 들어온 프릴과 에르케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창문에 들러붙어 밖을 살피는 프릴과 에르케를 바라보던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소파에 앉았다.
‘플레이트’는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경매장이었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모두 대륙에서 최정상에 있는 이들이다. 권력이든 돈이든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이들인데 그들이 이곳에서는 모두 만족하는 만큼 VIP 숙소는 모든 것이 최고 급이었다.
카이는 익숙한 소파에 앉아서 꺅꺅거리는 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은 물건 구경 가자. 경매에 올라오지 않고, 그냥 VIP들에게 넘기는 정가 물건들도 있으니까. 그것들 다 좋은 물건들이니 마음에 드는 것들 고르자.”
“정말요?”
카이의 시선이 에르케를 향했다.
“다음 작품은 구상했어?”
“예. 그것 때문에 듀얼 잼 원석을 구했으면 해요.”
“듀얼 잼?”
“예. ‘그레이스’의 목표가 아무래도 대중성보다는 특별한 이에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줬으면 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듀얼 잼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카이는 에르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듀얼 잼으로만 만든다는 생각은 못 했다. 듀얼 잼은 사고 싶다고 막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좋아. 그럼 일단 듀얼 잼 원석은 모두 구해가자.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에서라면 구할 수 있을 거다.”
듀얼 잼 원석은 원석 만으로 10만 프랑은 되는데 그걸 모두 구해가자는 말에 에르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석 세공사로서 듀얼 잼은 하나만 만져볼 수 있어도 그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런데 듀얼 잼을 원하는 만큼 사주겠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뭘 그리 좋아해. 너도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그레이스’가 잘 되게 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그, 그렇죠?”
카이의 시선이 프릴을 향했다. 사실 프릴은 별로 사줄 것이 없기는 했다. 프릴에게 도움이 될 물건들은 카이가 다 만들 수 있으니까.
“이곳을 보면 요즘 대륙의 마법사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프릴은 내일부터 나랑 아티펙트를 살펴보자.”
“예!”
아티펙트 시장에도 흐름이 있다. 공격 마법에 치중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것을 막기 위한 보호 마법에 공을 들이던 시절도 있었다. 대인전에서 군중 마법위주로 넘어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했다.
조합 마법진은 충전 외에는 보통 한 방향으로만 만들 수 있는데 공격용 장신구를 만들어도 충분히 쓸모가 있으리라.
지금까지 없었던 공격형 아티펙트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엘더에서는 만들지 않았던 물건이니까.
어쩌면 장신구만한 크기의 공격형 아티펙트를 만들게 되면 그것이 대륙의 역사를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 아티펙트의 주인이라는 것만 알아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흐응. 재미있겠는데?”
지금까지는 개인의 연구만을 해왔다. 자신의 작품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둠 속에서 엘더를 무너트리고 엘도 왕국의 왕가를 끌어내리려면 그런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된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아티펙트인 만큼 그 하나하나의 영향까지 생각해야 했다.
하루를 푹 쉰 후에 카이는 프릴과 에르케를 데리고 VIP 전용관으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블랙 카드를 보여주니 전용 접객원이 따라붙었다.
카이는 접객원을 따라 걸으며 물었다.
“듀얼 잼 원석이 들어온 게 있나?”
“어떤 종류의 듀얼 잼을 원하시나요? 보통은 원석은 잘 들여놓지 않지만, 희귀한 종류는 저희 손을 거쳐 가기도 합니다.”
“전부.”
“예?”
접객원이 무슨 소린가 빤히 바라보자 카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부 준비해 줘.”
접객원이 살짝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보유한 듀얼 잼은 백 종 정도 됩니다.”
카이가 빤히 바라보자 접객원은 식은땀이 흘렀다. 듀얼 잼을 백 종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안타르시아의 저력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총액은 이천만 프랑이 넘는다.
듀얼 잼 중에도 귀족들이 애용하는 것들이 따로 있다 보니 그런 것들은 가격이 높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카드로 해.”
접객원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는 블랙 카드의 주인이었다. 안타르시아 내에서는 1억 프랑까지는 그냥 써도 된다.
메르샤가 보증하는 것이니 얼마든지 써도 된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접객원의 대답을 들은 카이는 프릴과 에르케를 데리고 출품된 아티펙트들을 둘러보러 갔다.
카이는 아티펙트들을 둘러보며 지금은 대인 공격용 아티펙트들이 대세를 이뤘음을 알았다. 대신 그 위력이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축소 마법진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장신구형 아티펙트가 나오면서 돈을 쓸어 담자 마법사들은 연구비 충당을 위해서 아티펙트 시장에 뛰어들었다.
방어 마법 쪽에서는 엘더만큼의 편의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상 돈이 안 되니 무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덕분에 무구들이 상당히 발전했다.
카이가 보기에도 신선한 아이디어의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카이는 그런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아티펙트들을 꼼꼼히 살폈다. 아티펙트 쪽에서는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였기에 그 물건이 어떤 성능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카이가 만든 아티펙트는 같은 성급의 마법으로는 뚫을 수 없다. 그걸 뚫기 위해서였는지 마법들이 모두 효율을 극대화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 효율을 살리느냐에 따라 다르다.
카이가 엘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엘디아의 목걸이를 만들 때 특별히 공을 들였다.
5성급 보호막이지만, 6성 마법으로도 쉽게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방어에 특화했던 목걸이였다.
그 뒤로 엘더의 마법진은 모두 방어에 특화했었는데 그 여파로 무구형 아티펙트들은 공격의 효율을 높였다.
‘그레이스’ 또한 예전에 하던 대로 보호 마법에 신경을 쓴 물건이었다.
‘그레이스’는 다시 한번 판도를 뒤바꿀 터였지만, 그렇기에 또 다른 파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격형 장신구 마법.
카이가 그런 부분을 떠올리고 있을 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법사가 검은 왜 보는 거냐?”
카이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엘폰토가 서 있었다. 엘폰토는 손을 뻗어 카이가 보고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엘폰토가 검을 뽑아 검면을 살피며 그 너머로 카이를 쏘아보았다.
카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어차피 엘폰토 공작은 바닥까지 끌어 내릴 생각이었다.
엘폰토 공작이 가지고 있는 공작가의 상단을 망하게 하고, 빚더미에 앉게 한 후에 좌절하는 놈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하나?
이러면 참을 수가 없는데.
카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엘폰토에게 물었다.
“시비 거는 건가?”
“뭐?”
엘폰토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카이를 쏘아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짙은 살기를 뿌렸다.
“안타르시아 안이라고 그렇게 말하다 죽는다?”
카이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카이가 야만인의 침략 때 대전사를 죽이기 전까지 왕국 제일의 강자는 엘폰토였다.
왕국 제일 검이기도 한 그는 6성급의 기사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야만인의 침략 때 왕궁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왕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엘도 왕국이 무너져 가는 중에도 숨어 있던 놈이 뚫린 입이라고 저리 지껄이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거 아나?”
“뭘 말이냐?”
“안타르시아에서도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걸?”
“뭐?”
카이가 손가락으로 엘폰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결투장이 있거든.”
엘폰토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엘폰토를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간 카이가 그의 코앞에서 두 눈을 마주한 채 물었다.
“따라올 용기는 있냐?”
“이 버러지 새끼가.”
엘폰토가 이를 뿌득 갈며 검을 뻗었다. 카이의 목에 검을 걸친 엘폰토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마법사 주제에 기사에게 대인전을 신청하고도 여유 있는 모습. 오히려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대륙에 내로라하는 이들.
그들은 엘폰토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엘폰토는 검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
“오냐. 팔다리가 떨어지고도 그 눈빛이 변하지를 않기를 빌지.”
카이는 그 말에 결정했다. 엘폰토의 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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