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본질
카이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일단 자라.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카이가 조작한 마력이 테오를 잠재웠다. 테오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테오가 단련된 이라고 하나 카이의 수면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7성에 오른 카이는 테오의 마력 방어를 우회해서 그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것까지 가능해졌다. 8성 마법사가 봉인한 것을 우회해서 열어젖힐 정도로 마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덕분에 대인전에서도 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대륙의 내로라하는 7성 마법사들과도 다른 경지에 올랐을 거라 여겨졌다. 편법이라고 해도 8성의 마법사가 만든 봉인을 풀었으니까.
카이는 소파에 쓰러진 테오를 눕혀 놓고는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와 차를 들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한가득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고 카이는 가볍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바람이 불어 서류들을 허공에 띄웠다. 카이는 허공에 떠오른 서류들을 한눈에 담고 그것들을 이해하고 분류했다.
삽시간에 정리되어 서재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들을 보며 펜을 마력으로 들어올려 서명을 시작했다. 누군가 마력 조작으로 펜을 조작해 서명했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쇠약해진 지금 몸으로는 그편이 오히려 더 편했다.
그렇게 서류들에 서명을 마친 카이가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어 먹으며 소파에서 코까지 골며 자는 테오를 내려다보았다. 잘 단련된 테오는 3성급에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제대로 몸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이 빤히 보였다. 저리 잠들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는 일. 카이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덮어 줬다.
체온 유지 기능이 있는 로브였기에 덮고 있으면 감기는 들지 않으리라.
로브를 덮어준 카이는 테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어느새 창밖에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테오가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빤히 보였다.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지 않고 어떻게든 영주성을 관리해 오느라 겪은 고생이 눈에 보였다.
카이가 물 쓰듯이 쓴 돈은 엘더에서 돈이 나왔다면 모를까 가지고 온 돈만으로는 힘들었다. 영주성 관리에 돈이 들지 않는 인형들로만 해왔어도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카이가 먹을 것은 잘 챙기느라 테오가 먹은 것은 거의 연명만 해온 수준이다.
특히 아프록시아 잎을 구하면서부터 더 쪼들렸다.
카이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엘디아 공주와 엘폰토 공작.
그 둘을 상대한다는 것은 왕가를 적으로 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엘토르 국왕이 자신을 아꼈다고 하나 이혼한 사위보다는 제 딸을 더 소중하게 여길 터. 그러니 그 둘을 몰락시킨다는 것은 왕가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만들었던 아티펙트 브랜드 엘더는 이미 대륙을 선도하는 아티펙트 브랜드. 천문학적인 부를 왕가에 안겨주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브랜드 덕분에 왕가는 더욱 강해진 상황. 그런 왕가를 몰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빈손으로 부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비록 영지가 야만인들에게 당했던 영지들을 모아서 크기만 백작령만큼 키웠다고 하나 영지도 가지고 있었고, 이제는 7성에까지 올랐다.
다만 이걸 함부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건 비장의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전에는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자랑하기 바빴지만, 그건 전혀 득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 밝아오는 여명에 밀려 사라지는 어둠처럼, 어둠 속에서 힘을 키워 나갈 생각이다.
“흠냐.”
테오는 가만히 눈을 뜨고는 눈앞에 보이는 천장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테이블은 비어 있었고, 카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꿈인가?”
혼자 중얼거리던 테오는 그제야 자신의 몸에서 흘러내린 로브를 볼 수 있었다. 카이가 입고 다니던 로브였다.
“카이님!”
테오는 자신이 겪은 것이 꿈이 아님을 깨닫고는 카이의 로브를 곱게 개어서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나왔다. 테오는 서재 밖으로 나와서야 코를 파고드는 고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테오가 냄새를 따라 이동하니 부엌에서 스튜를 젓고 있는 인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화덕에서 구운 빵을 썰고 있는 카이를 볼 수 있었다.
“카이님! 뭐하시는 겁니까?”
“일어났어? 브런치를 준비 중이야.”
“그걸 왜 카이님이 하시는 겁니까?”
테오가 얼른 카이의 손에서 빵칼을 잡아채고는 품에 안고 있던 로브를 카이에게 걸쳐주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요리를 준비하며 말했다.
“인형이 스튜도 만들 수 있습니까?”
“아직은 안 돼. 그저 스튜가 타지 않도록 젓는 정도만 시킬 수 있었지.”
테오는 빵을 썰어서 준비하고 치즈와 훈제 고기를 준비하고는 스튜도 떠서 간을 맞춘 후에 식탁에 준비했다.
카이는 테오가 준비를 시작하자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그런 카이의 앞에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었다.
없는 형편에도 테오가 준비하자 그나마 귀족들의 식탁처럼 보였다. 차린 것은 없지만, 카이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테오는 그런 카이의 옆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앉아. 같이 먹자.”
“저는 집사입니다.”
“알아. 그리고 내 친구이기도 하지. 앉아. 할 이야기가 많아.”
카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테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카이는 그런 테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테오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빵을 찢어 스튜에 찍어 입에 넣었다.
카이는 테오가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식사에 집중했다. 그렇게 모든 식사를 마치자 테오가 차를 준비해 왔다.
차를 마시며 카이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어디랑 거래했어?”
“왕가에서부터 거래해 왔던 벨록 상단과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저쪽에서도 모두 알고 있겠군.”
테오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 사정을 알았다면 그쪽과 거래하지 않았을 테니까. 혹시 빚도 졌어?”
“아직 빚까지 지지는 않았습니다.”
카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차라리 잘 됐어. 다음부터는 물건을 외상으로 구해와. 그리고 아프록시아 잎의 양을 조금씩 늘리도록 해.”
“예? 설마 중독이라도 되신 겁니까?”
사실 중독이 되고도 남을 양이었기에 테오가 걱정스레 물었다. 카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저들의 의심을 돌리기 위해서야. 아마도 이쪽에서 외상을 한다고 한다면 목줄을 채울 기회라고 여기고 엘디아가 그 어음을 챙길 거야.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그렇게 물건을 구하자고.”
“빚을 지면 영지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카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괜찮아. 엘더를 뛰어넘을 아티펙트 브랜드를 만들 생각이니까.”
테오는 카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6성 마법사인 그가 만들 수 있는 아티펙트는 엘더 내에서도 최상급의 명품들. 그가 마력이 봉인되고 나서 그런 최상급 명품들이 만들어지지 않은 만큼 엘더의 이름값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그 자리를 차고 들어가겠다는 건가?
“그건 위험합니다.”
카이는 테오가 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진의 소형화는 카이가 직접 해낸 것이었고, 그 지적 재산권은 엘더에 귀속되어 있었다.
카이는 자신이 엘더의 지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상관없다고 여겼는데 그게 실수였다.
엘더의 지분은 왕가에서 자본을 대서 30%를 쥐고 있었고, 나머지는 귀족이 19%를 가지고 있었다. 카이 본인이 31%를 가지고 있었고 엘디아 공주가 20%를 가지고 있었다.
왕가와 엘디아 공주의 지분에 더해 귀족이 가진 19%중 엘폰토 공작의 지분도 있으니 그걸 더하면 지분 상으로 카이보다 앞선다.
엘더는 이미 빼앗긴 상황.
그런 상황에서 엘더에서 썼던 소형 마법진을 이용한다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이는 7성에 올랐다. 볼 수 있는 눈높이가 달라진 지금 축소 마법진 설계의 지적 재산권에 걸리지 않게 아티펙트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특히 이번에 보았던 8성 마법사의 마력 봉인을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그걸 이용하면 더 높은 성급의 아티펙트를 만들 수 있을 터.
아티펙트 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할 자신이 있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그 부분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어. 그보다는 보석 세공사가 필요해. 빌어먹을 귀족들은 성능도 중요하지만, 미적 감각도 중요하게 여기는 종자들이니까.”
“왕국 내의 보석 세공사들은 대부분 엘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엘더는 왕가 소속인데다가 처우도 괜찮았다. 그것은 평민에서 출발한 카이가 그 대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국 내에 보석 좀 만질 줄 안다는 이들은 모두 그곳에 귀속되어 있었다.
“우리 왕국일 필요는 없어.”
테오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생각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엘더에서 공격적으로 보석 세공사들을 영입할 때 영입을 거절했던 가문이 있습니다. 대대로 보석을 세공해 오던 가문이었는데 엘더가 성공하면서 망해버렸죠.”
같은 장신구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해도 아티펙트를 고르는 것이 귀족들이다. 그 가격이 수십 배가 넘는다고 해도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장신구보다는 아티펙트를 고르는 것이 귀족들이니까.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카이님은 모르시겠지만, 엘더가 왕국 내에서 확장하면서 일부러 망하게 한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라면 실력은 확실할 겁니다.”
“무슨 소리야?”
테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는 학자에 가까운 이였다. 그의 출발이 워메이 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궁정 마법사가 되고 나서는 연구에만 집중했으니까.
그런 카이는 엘더의 핵심이 될 마법진의 소형화에 성공했지만, 엘더가 어떻게 대륙 최고의 아티펙트 브랜드로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엘디아 공주는 엘더에 쓸만한 보석 세공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왕궁 내의 실력 있는 보석 세공사들을 일부러 망하게 했다. 그들과 비슷한 디자인의 아티펙트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쉽게 망했다.
제법 명망 있던 곳도 왕가의 금력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지금 말하는 곳도 그렇게 무너진 가문 중 하나다.
“제가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카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만나보고 오지. 그들에 대한 정보만 넘겨줘.”
“지금 그 몸으로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카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라면 감시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면 저들도 알아챌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넌 영지를 지키고 있어야지.”
테오도 잠시 생각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의 말이 옳았다. 지금 당장 테오가 자리를 비운다면 영지는 마비될 터였다.
“아인츠 장인 거리에 있습니다. 살아있다면 말이죠.”
“살아있다면?”
“엘디아 공주의 손길을 거절한 가문입니다. 끝내 엘더에 들어오지 않은 그들이 살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말이죠.”
카이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황금 장미라고 불리던 엘디아 공주. 부인이었지만 자신은 그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우선 살아있기를 바라야겠네. 다녀오겠다.”
“정말 제가 모시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이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잊었나 본데 나 워 메이지야.”
저 야만족의 침공을 홀로 막았던 워 메이지. 대전사를 얼려버리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생활을 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영광만을 기억할 뿐.
왕궁의 궁정 마법사가 되고 연구에만 집중했지만, 그의 본질은 워 메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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