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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 회장님-59화 (59/225)
  • 《59화》

    성호는 이번 클린을 출시를 준비하면서 일주일째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의 회장실에서 살기 시작했다.

    전과는 많이 다르게 회장실에 침실과 샤워실뿐만 아니라 정원과 연못, 피트니스 룸, 드레스 룸까지 갖추어졌다.

    전에 있던 이용찬이 만든 밀실을 전부 다 밀어 버리니 공간이 넉넉해서 충분했다.

    그럼에도 성호는 원래 쓰던 작은 회장실을 선호했다.

    “역시, 라면은 회장실에서 먹는 게 맛있어.”

    성호는 라면 하나에 계란을 넣어서 끓였다. 당연히 아삭한 김치도 구해 왔다.

    회장실에 사는 이유가 일 때문인지 라면 때문인지 가끔 헷갈린다.

    -똑똑.

    “들어와요.”

    최태욱 실장이 들어 왔다.

    “회장님, 외삼촌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외삼촌?”

    자신에게 친척이 있었던가?

    이용찬 쪽은 작은아버지이지만 친척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 쪽 가족들이 있었나 보다.

    어머니도 미국에 있다는 외할아버지나 삼촌들에 대해서 말씀을 잘 안 해 주셨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돌아가실 때 온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왕래가 없었다.

    “만나 보죠.”

    회장실로 들어온 브라이언 김은 밝은 갈색 머리에 주름이 한가득한 외국인이었다.

    외삼촌이 외국인 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성호가 브라이언 앞으로 나서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성호입니다. 외삼촌이시지요? 조카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렇게 늦게나마 인사를 드립니다.”

    “반갑다. 네 외삼촌인 브라이언 김이다.”

    브라이언이 유창한 한국어로 성호에게 대답했다.

    “앉으시죠. 차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하지.”

    원래 브라이언은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눈에 담긴 뜻은 원래 더 크게 전해지는 법이다.

    “사라를 많이 닮았구나.”

    그의 푸른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성호는 알았다.

    진심이 담긴 눈은 어떤 설명보다 확실할 때가 있다.

    브라이언 김은 아주 옛날 생각에 눈물이 났다. 배다른 동생이지만 자신을 잘 따른 여동생이다.

    집안의 일로 한국에 찾아가지 못했는데 여동생이 죽어서야 장례식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당시 보았던 성호의 모습은 너무 어렸는데 지금은 다 커서 멋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말괄량이였지.”

    “네?”

    “천방지축, 고집불통, 개구쟁이였다. 네 아버지에게 시집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12살 때였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서…….”

    평소 말이 없던 브라이언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어머니가 천방지축 말괄량이였다가 아버지를 만나 철이 들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이 상자를 전해 주려고 왔다.”

    아주 낡은 상자였다. 위에 특이한 모양의 그림이 그려 있었는데 꽃 모양의 그림이었다.

    “이 꽃 모양은 뭔가요?”

    “오얏꽃이다.”

    “오얏꽃?”

    “오얏은 자두라는 순수한 한국말이다. 그리고 조선 황실의 문양이지.”

    “조선 황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어렸을 때 이 상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렇게만 말씀해 주시고 비밀로 간직하셨다.”

    그냥 봐도 보통 상자가 아니다.

    상자 위에는 다섯 장의 꽃잎에 각각 3개씩의 수술이 그려진 오얏꽃이 그려져 있었다.

    ‘조선 황실의 상징이라는 이 문양이 왜 이 상자에 그려져 있을까?’

    “이건 너만 읽어야 한다. 나는 이제 가 보마. 여기 적힌 호텔에 묵고 있으니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브라이언 김이 나가고 이제 성호와 비밀스러운 상자만 남았다.

    성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밀봉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열게 되면 흔적이 남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가장 위에 보이는 것은 한문으로 써진 편지였다.

    황손전상서(皇孫傳上書),

    황손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것이 외증조할아버지 김박규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낡은 편지들은 성호로서는 뜻밖이었다.

    조선의 26대 황제였던 고종의 편지, 27대 황제인 순종의 편지, 그리고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 이우 의친왕의 편지가 들어가 있었다.

    특히 고종 황제의 편지와 순종의 편지에는 어인이 찍혀 있다.

    “진짜겠지?”

    성호는 가장 먼저 외증조할아버지 김박규의 편지를 꺼내 보았다.

    편지는 두 겹으로 접혀 있었고 표지에 글씨가 있었다.

    표지의 글은 옛날 한글로 쓰여 있어서 읽기 힘들었지만, 내용은 이러했다.

    「대한 제국이 강대해져서 일본이 더 이상 침탈하지 못하는 세상이 오기 전에는 이 편지가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본으로부터 이 비밀을 지킬 수 없다면 미래를 망치기 전에 이 편지를 닫아 주시길 바란다.」

    민족 말살 정책은 대한 제국의 황실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경술국치가 시작되었다.

    경술국치란 대한제국을 일본 천황이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이 조선 황실을 자신의 발아래 두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의 자손들은 모두 일본 장교가 되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해야 했고 심지어 볼모로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로 인해서 대한 제국 황실의 많은 직계 자손들은 일본인으로 귀화 되거나 또는 독살당했다.

    이 편지는 그 아픔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곱게 쓴 표지를 넘기자 그 뒤의 내용이 이어졌다.

    대부분 한자였지만 내용은 이러했다.

    「저는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동생 김박규입니다.

    그동안 일본은 왕공가궤법을 만들어 황가의 후손을 일본인에게 강제로 혼인시키거나 일본 군대에 무관으로 강제 임관하게 하였습니다.

    고종 황제께서는 일본의 만행으로 후손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이척 황태자의 아드님이신 이만 황태손을 숨기시기에 이릅니다.

    출생을 전혀 알리지 않고 숨기셨으니 지인들 몇을 빼고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고종 황제께서는 대한 제국의 상황을 알리고자 헤이그 선언을 준비하였으나 무산되어 폐위되셨습니다.

    그 일로 이만 황태손을 궁궐 밖으로 숨겨야 했습니다.

    제 누님 김란사는 의친왕의 추천으로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이만 황태손을 도교에 있는 제게 보내었습니다.

    그 뒤로 제가 이만 황태손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뒤 폐하께서는 의친왕(다섯 번째 아들)과 제 누이를 파리 강화회의의 밀사로 파견하려 하였는데 이를 안 일본 놈들이 황제 폐하를 1919년 3월에 독살하였습니다.

    김사란 누님도 배반자의 밀고로 인하여 일본 놈들에게 쫓기게 되었고 누님은 그해 4월 베이징에서 독살당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죽은 동료들이 수십입니다.

    그 이후 이만 황태자님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도쿄에 출생 신고를 하고 이만식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만 황태자님께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모르고 사시는 것이 알고 사시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고종 황제님의 유지를 이은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끝났지만, 성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자식이 있었으며 이를 고종 황제가 숨겼고 1919년 고종 황제가 서거하면서 김박규의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김박규가 양자로 받은 사람이 이만식, 이성호의 할아버지다.

    성호의 할아버지는 순종의 자식이자 황태손이었다.

    “나는 그럼 대한제국의 황손인가?”

    성호가 노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매우 낡은 종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한글과 한자로 쓰인 긴 글의 끝에는 당시 고종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황제어새(皇帝御璽)!

    고종 황제의 국새가 정확하게 찍혀 있는 이 편지는 당시 연해주에 망명정부를 만들고 일본에 대항하려던 고종이 순종의 자녀이자 마지막 황태손이라고 볼 수 있는 이만을 숨기며 남긴 어명이 적혀 있다.

    「울어라 하늘이여, 울어라 새여, 울어라 땅이여.」

    첫 구절은 고종의 마음이 나타나 있었다.

    「겨울이 와 첫눈이 오는 날이라 동산이 아름답지만 나라 잃은 백성은 그 춥기가 얼마나 더 하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민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눈이 오는데 춥지는 않은지, 그곳의 경치는 어떠한지 물었으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4년 전, 광무(光武) 7년(1903년)

    나의 가장 사랑하는 민비가 죽고 그녀의 자녀가 이척 하나뿐이라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으나 왜놈들의 독살에 정신이 혼미하니 어찌 마음이 편할 날이 있겠는가?」

    당시의 황실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들 이척의 후사가 없으니 더욱더 마음이 아픈 중에 세자빈이 아들을 가졌다는 소식에 마음이 날아갈 듯했다.

    세자빈은 영의정 여은부원군 충문공 민태호의 딸 여흥이었다.

    이 소식이 왜놈들의 귀에 들어갈까 하여 세자빈의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기고 비밀리에 아이를 낳았으니 대한 제국 황실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짐은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세자빈이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었으니 짐의 마음을 또 한 번 아프게 하였다.

    천지신명은 목숨을 버려야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리라. 대한 제국을 위해 희생했으니 그 이름이나마 찬란하길 원하노라.

    나중에 대한 제국의 빛이 될 후손을 낳고 효를 다하여 목숨을 잃었으니 효를 다한 진실한 빛이라 칭하여 순명효황후라 명하도록 하였다.

    5개월 전, 광무(光武) 11년 7월, 헤이그로 특사를 보내었으나 왜놈들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왜놈들이 그 일을 빌미 삼아 나를 강제로 폐위시켰으니 억울하여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프다.

    지금 순종 황제가 된 내 아들은 왜놈들의 꼭두각시일 뿐, 진정한 황제가 아니다.

    나는 이만을 다음대 황손으로 삼아 이 대한제국을 이으려 한다.

    등하불명이라 했다.

    이강의 친우인 김란사의 동생이 도교에서 크게 사업을 한다고 하니 그곳으로 이만을 보내기로 하였다.

    일곱째 아들 이은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후견인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가니 같이 보내기로 하였다.

    이만은 지금 5살밖에 안 된 아이일 뿐이나 영민하고 똑똑하니 나중에 크게 될 것이다.

    혹시 내가 왜놈들에게 죽게 될 것을 우려하여 미리 이만을 황태자로 책봉하니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국새를 찍고 총 세 개의 밀서를 후세에 남기노라.

    하나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화란 국(네덜란드)의 헤이그로 보낸 밀사 이준(李儁)에게 주었다.

    두 번째는 덕수궁에 있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면서 지붕의 기둥 사이에 상자를 넣고 그 안에 봉인하였다.

    세 번째는 이은과 함께 떠나는 김란사 선생에게 주었으니 이를 확인하여 대한 제국이 다시 되살아나고 새로운 세상이 돌아올 때 확인하라.

    나 또한 북쪽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을 하려 하니 곧 독립의 날과 대한 제국의 이름이 만방에 드높일 날이 도래할 것이라 소망한다.

    황태손 이만이여, 혹여 내가 없어도 대한 제국의 황제임을 잊지 말고 꼭 대한 제국이 세계만방에 빛나는 나라가 되게 하라!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11년 융희(隆熙) 원년」

    -황제어새(皇帝御璽)!

    이만은 성호의 할아버지 이만식을 뜻한다.

    황제 자리를 강제로 양위시켜 대한 제국을 마음대로 조정했던 시대의 비사 중 비사가 아닐 수 없다.

    순종에게는 첫 번째 정실부인이 있었으나 1904년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 죽음의 이유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출산 때 난산이라 죽게 되었으며 이때 태어난 것이 순종의 아들 이만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황족 말살 정책을 눈치채고는 순종의 아들을 숨기려 했다.

    이만이 왜놈들에게 알려진다면 순종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헤이그 사건으로 고종은 폐위되어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때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 이강이 대학교 동기인 김란사를 추천했다.

    김란사, 실제 이름은 세례명인 낸시다. 낸시를 란사라고 발음하여 란사가 되었다.

    고종은 점점 일본의 찬탈이 심해지자 도교에 있는 김란사의 동생 집으로 이만을 보내기로 한다.

    김란사의 동생 김박규는 당시 일본 도교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있었다.

    1907년 12월, 강제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내지게 되는 이은(영친왕)과 함께 도쿄로 가게 된 이만은 그 뒤로 김박규의 손에 크게 된 것이다.

    1919년 3월 고종 황제가 서거했다.

    당시 고종 황제의 시체가 이가 다 빠져 입안에 있고 혀가 다 녹아내렸으며 가슴에서 배까지 검은 흉터가 남은 것을 보고 독살임을 깨달았다.

    왜놈들이 고종 황제가 청나라로 도망하여 만주에서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독살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시민들이 우리나라의 억울함을 알리고 그 분노를 풀기 위해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들었다.

    그것이 3.1 만세 운동이다.

    김란사는 고종의 유지를 받아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원하러 갔다가 일본으로부터 독살 당한다.

    “내 운명의 조각이군.”

    갑자기 성호는 자신의 운명이 뭔가 엄청나게 엉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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