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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316화 (316/326)
  • < 렉스턴 에너지 1 >

    래리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비볐다.

    방금 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던전이 폭발해 마수가 튀어나오다니…… 대체 이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저 장면 자체가 조작된 건 아닐까? 미리 준비한 가짜 화면을 홀로그램으로 송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우리한테…… 저런 걸 보여준 저의가 뭐지?”

    래리가 이를 갈며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석은 여전히 담담할 뿐이었다.

    “저의? 그런 게 있을 것 같나? 그저 상황을 가볍게 보여줬을 뿐이야.”

    “가볍게?”

    가볍긴 뭐가 가볍단 말인가. 지금 렉스턴 에너지의 정예들이 마수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 지지는 않을 것 같다. 마수들이 제법 강력했고, 워낙 기습적이고 갑작스러운 일이라 다들 당황해서 그렇지 어쨌든 고레벨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본 광경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만일 저게 도심지 한가운데서 벌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렉스턴 에너지 본사 한가운데 던전이 폭발해서 마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면 어찌 되겠는가.

    웬만한 전략무기는 상대도 안 될 만큼 거대한 혼란과 피해가 쏟아질 것이다.

    “설마…… 설마 멕시코 국경에 던전을 만든 것도 너였나?”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뻔한 질문에 답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물론 래리도 답을 원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완벽히 놀아났군. 어쩌면 던전을 통해 시선을 돌린 것도 우릴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일지도 모르겠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이제 슬슬 결착할 때가 되었다.

    현석은 신의 파편이 끊임없이 전해주는 감각 덕분에 아틀란티스 근처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방금 바다 깊은 곳에 숨은 잠수함 바로 위로 마르티우스의 범선들이 도착했다.

    잠수함을 찾은 건 아주 간단했다. 아니, 애초에 놓친 적도 없었다.

    잠수함들은 이제 마르티우스에게 맡기면 된다. 마르티우스는 아마 지금 생소한 감각에 놀라고 있을 것이다.

    신의 파편이 주는 감각 일부가 그의 신경망에 접속했다. 그건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잠수함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감각을 통해서 말이다.

    현석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진행 중인 홀로그램 속 전투를 쳐다봤다.

    전투는 슬슬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렉스턴 에너지의 플레이어들은 아주 효과적으로 마수를 상대했다.

    물론 피해가 제법 컸지만 그래도 상당한 전력을 남기고 마수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걸 본 래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이걸 어쩌나? 역시 내가 말했던 대로 다 쓸어버렸네?”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뭐, 어차피 한 놈만 잡으면 저따위 것 안 봐도 그만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비웃던 래리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새로운 던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던전들은 그대로 압축되더니 폭발했다.

    아까보다 훨씬 위험해 보이는 마수들이 나타났다. 물론 수는 적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빠르고 강했다. 그리고 포악했다.

    사방에서 날뛰는 마수들을 상대하느라 플레이어들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안 그래도 한 차례 싸우는 바람에 마력이 많이 소모되었는데, 더 강한 마수들이 나타나니 정말 난감했다.

    용병들이 마구 총을 쏘고 미사일을 날렸다. 상당한 효과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총을 많이 맞아도 마수가 즉사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용병들은 총을 쏘다가 마수에게 밟히거나 물려서 죽어갔다.

    그렇게 급격히 용병과 플레이어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막아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시 등장한 던전들을 보며 다들 암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모든 전투가 끝났다. 그곳에 남은 마수들은 멀리서 날아온 화살과,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달려온 숲의 전사들에 의해 깔끔히 해체되었다.

    래리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만일 이곳에 저런 던전이 만들어져서 폭발한다면 과연 자신들은 그걸 해결할 수 있을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지.’

    래리는 그런 마음을 담아 동료들을 둘러봤다. 다들 래리의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으니 서두릅시다.”

    만일 서둘러 현석을 제압했다면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래리는 더 화가 났다.

    포위망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현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현석의 몸에 깃든 파편의 힘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밖으로 튀어나가 힘을 과시하고 싶다고 마구 졸라댔다.

    그저 제어를 놓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 주변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물론 현석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한다는 건 황궁이 부서진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 황궁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잘 아껴서 오랫동안 써먹어야 한다.

    아마 앞으로 아틀란티스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시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힘을 잘 제어해서 최소한의 힘으로만 적을 쓸어 버려야 한다.

    쉬아아악!

    현석의 몸에서 마력의 채찍 수십 줄기가 쏟아져 나갔다. 그것은 근처에 다가온 플레이어들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콰과과과광!

    달려들던 자들은 몸에 마력을 칭칭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채찍과 만나면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채찍의 파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몸에 두른 마력이 터져 나간 것이다.

    수십의 플레이어가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현석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현석의 몸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황궁으로 들어오는 출입구 앞에 나타났다.

    아무도 나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슈슈슈슈슉!

    현석의 몸에서 마력의 화살 수백 발이 쏟아져 나갔다.

    쩌저저저정!

    이번엔 막아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번 공격으로 플레이어가 아닌 특수부대원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현석이 날린 마력의 화살은 빠르고 강했다. 또한 그 안에 강력한 마비를 일으키는 마력패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마력의 화살에 맞은 특수부대원들은 그렇게 마비되어 허무하게 바닥에 몸을 뉘어야 했다.

    래리는 당황했다. 아직까지 자신은 멀쩡했지만, 남은 플레이어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왜 가장 앞에 나선 자신이 아직까지 멀쩡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일 약한 플레이어이기도 했고, 가장 많은 걸 아는 사람이기도 해서였다.

    래리는 아예 싸움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의 상황을 칼슨에게 알리는 걸 선택했다.

    현석이 나머지 플레이어들을 정리하는 데, 채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래리는 그 30초의 시간을 이용해 특별한 장비 하나를 작동시켰다.

    ‘성공했다.’

    그건 최첨단 전자장비와 마력 기반 아티팩트를 적절히 섞어서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일종의 정보 전송 장치였는데, 그 어떤 방해도 피해갈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물론 현석은 그걸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건 칼슨, 그러니까 지금 깊은 바다에 웅크리고 있는 잠수함으로 날아갔다.

    이내 모든 플레이어가 쓰러지고 래리만 남았다.

    현석은 래리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래리는 질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이런 괴물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아마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다.

    ‘서두른 게 패착이야.’

    모두 힘을 모아서 진짜 큰 전쟁을 벌였어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군대를 움직였어야 한다.

    ‘아마…… 이제 그렇게 되겠지.’

    그들이 지금은 던전에 신경이 몰려서 이쪽을 못 보고 있지만, 조만간 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면 아마 여긴 쑥대밭으로 변할 것이다.

    엄청난 화력으로 차근차근 쓸어버리면 아무리 크고 강한 대륙이라 하더라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 점령전에 렉스턴 에너지의 이 삽질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결국 렉스턴 에너지는 얻는 건 없이 남에게 퍼주기만 한 셈이 되었다.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죽일 거면 얼른 죽여.”

    현석은 래리의 말에도 그저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래리가 답답해서 뭐라고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현석이 호흡을 끊고 말을 던졌다.

    “넌 렉스턴 에너지에 대해 얼마나 알지?”

    “뭐?”

    래리는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으로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흐릿한 검은 안개 때문에 여전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현석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칼슨이 죽으면 렉스턴 에너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말을 듣는 순간, 자신에게 삶으로 기어 올라갈 수 있는 가느다란 동아줄 하나가 드리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 * *

    “래리?”

    양동욱은 난데없이 현석과 함께 등장한 래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사실 래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미래산업일 줄이야!’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곳이 이렇게 덜컥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여기 오고 나서야 현석의 얼굴에 드리워진 흐릿한 검은 안개가 사라졌다. 그제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여왔으면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현석은 그동안 렉스턴 에너지에서도 예의 주시하던 인물이었다. 미래산업을 무너뜨리기 위한 열쇠가 되는 인물이라고 판단해 제법 신경을 쓰고 있었다.

    래리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가벼워졌다.

    그냥 협조하면 된다. 협조하고 얻을 건 얻고, 잃을 건 잃으면 된다.

    그게 전부였다. 렉스턴 에너지에서 자신이 하던 역할이 있고, 가진 권력이 있긴 하지만, 그건 칼슨이 살아있을 때에나 해당하는 얘기다.

    칼슨이 죽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래리는 칼슨이 죽는 순간이 떠올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 장면 역시 천장에서 펼쳐지는 홀로그램을 통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정말로 허무한 최후였다. 바다 속 절벽 아래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절벽이 무너지면서 거기 파묻혀 버렸으니까.

    어찌나 거대한 바윗덩이가 떨어졌는지, 단번에 잠수함이 반으로 우그러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보통 바위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래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양동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방식을 원하십니까? 회사를 흡수할 수도 있고, 그냥 지금처럼 운영하면서 배후에 자리 잡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자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결과가 확실하고, 후자는 즉시 써먹을 수 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불확실하다.

    혹시 중간에 일이 비틀리기라도 하면 갑자기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고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래리가 배신한다거나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 렉스턴 에너지를 포장지까지 벗겨서 래리의 손에 잘 쥐어준 셈이 된다.

    물론 안전장치는 마련하겠지만 그게 100% 완벽하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나중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결국 양동욱은 현석을 바라봤다. 이런 문제는 자신의 의견보다는 현석의 생각이 훨씬 중요했다.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결정도 이제는 양동욱이 알아서 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앞으로는 더더욱 현석이 미래산업에 대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 것이다.

    물론 미래산업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그것이 현석의 것이라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현석이 더 신경을 쓸 여유는 없을 것이다.

    현석에게는 아틀란티스가 있다. 그거 하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온 심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른다.

    양동욱도 현석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왔을 때 받을 타격이 더 클 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동욱을 보며 현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고작 렉스턴 정도에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나?”

    그 말을 들은 양동욱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역시 지금 당장 효과를 보는 쪽을 선택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양동욱의 선택은 지금 당장 렉스턴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칼슨이 갖고 있던 힘을 휘둘러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그렇게 해서 아틀란티스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아마 누구도 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틀란티스가 가지는 잠재력은 양동욱이 보기에 거의 무한했으니까.

    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간 현석은 곧장 아틀란티스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아틀란티스에 이쪽의 문물을 지속적으로 전해주면서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큰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현석이 사라지자 양동욱은 날카로운 눈으로 래리를 쳐다봤다.

    “그럼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지?”

    이제부터 칼슨이 없는 렉스턴 에너지를 조종해서 양동욱이 원하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

    래리는 상당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온몸을 휘감는 걸 느끼며 양동욱을 바라봤다.

    칼슨은 죽었지만, 그가 죽지 않은 걸로 해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일을 자신이 주도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렉스턴 에너지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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