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302화 (302/326)

< 마지막 파편을 찾아서 1 >

모든 섬의 족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실 그들은 그동안 아티팩트를 통한 대회의만 열었지, 이렇게 실제로 다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 첫 모임인 셈이었다.

거대한 테이블을 빼곡히 채워 앉은 족장들의 눈에 상석에 앉은 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극도로 공경하는 태도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죽으라고 하면 당장 죽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과 표정이었다.

바다의 일족은 다른 화이트홀에 사는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삶은 마족과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신이 내려준 사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언제 이뤄질지 모를 전설이었다.

그리고 그 전설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용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마왕을 무찌르고 마족들을 몰아낸 신의 사자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 이들이 이런 눈빛과 표정, 태도로 현석을 바라보고 대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현석은 자신을 향한 열기 어린 눈빛을 보면서도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할 법도 한데, 현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모여 있는 족장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주 오랫동안 왕을 기다려 왔습니다.”

현석은 계속 해보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는 현석의 눈빛을 보며 더욱 힘 있게 말을 이었다.

“우리의 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이어져 온 전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용을 타고 온 신의 사자에 관한 얘기였다.

그 신의 사자이자, 신의 전사가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왕이라고 말했다.

현석은 무심히 그들을 슥 둘러봤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왕이 되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그들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은 이미 현석을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왕은 존재치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저 조용하기만한 침묵은 아니었다.

조용한 가운데 뜨거운 눈빛이 끊임없이 오갔다.

이내 현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가 맡은 임무가 무엇이지?”

현석의 물음에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족장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바다를 지키는 일입니다.”

다들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숨을 바쳐 외적으로부터 바다를 지켜내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소리 없는 환호성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드디어 왕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회의장에서 나간 현석은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등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새삼 이런 걸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습을 되새겼다.

마치 미리 준비된 길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회의장에서 나와 저택을 벗어난 현석의 눈에 라이언 일행이 보였다.

그들은 이번 마족 토벌로 제법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슬슬 이들도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벽에 부딪힌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 현석에게는 한가득 있었다.

“돌아간다.”

현석의 말에 라이언 일행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들은 다시 용을 타고 처음 들어왔던 화이트홀로 날아갔다.

그렇게 세 군데 퀸급 생성지역에서의 일이 대충 마무리 되었다.

* * *

화이트홀을 넘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현석 일행을 맞이한 건 지독한 혼란이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플레이어들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래산업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칼슨이 장악한 거대 가문들이 모든 힘과 역량을 발휘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돈으로 싸움을 건 게 아니라 힘으로 싸움을 건 것이다.

물론 대놓고 도심지에서 총격전을 벌이거나 마력을 이용한 전투를 벌이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은밀히 벌어졌다.

하지만 그런 은밀한 싸움이 더 어려운 법이다.

“하나 간신히 해결하고 왔더니 더 큰 놈이 기다리고 있네.”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용에 비해 표정은 밝았다. 그는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라이언뿐 아니라 추광열도 기대감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 역시 이번에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리고 팀 메인퀘스트 역시 그 비슷한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현석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현석이 가는 곳은 미래산업이었다.

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와버린 것이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아마 이번에 성장하지 않았다면 몇몇은 중간에 떨어져 바다의 표류자가 되었을 것이다.

미래산업에 들어간 현석은 양동욱의 사무실로 향했다. 현석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현석의 눈에 초췌한 양동욱의 모습이 보였다.

양동욱은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현석을 발견하고는 힘없이 웃었다.

“오셨습니까.”

그런 양동욱의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그의 여동생인 양세희였다.

“괜찮은 거야? 얼굴이 대체 왜 그래? 밥은 제대로 먹으면서 일 하고 있는 거지?”

양동욱이 영혼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이놈들 내가 아주 뒤까지 탈탈 털어서 박살을 내 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에는 언뜻언뜻 광기까지 내비쳤다.

양세희조차 그 눈빛에 질려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몸 생각하면서 일해.”

그 말을 끝으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 양세희를 힐끗 쳐다본 현석은 성큼성큼 양동욱에게 다가갔다.

“레인보우 엘릭서는?”

“차질 없이 생산 중입니다. 한데…… 이걸로 성장하는 것에도 뭔가 한계가 있는 것 같던데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한계 없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말이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먹으면 신이 될 수도 있는 약이 될 테니까.

“어쨌든 이제 제가 1차적으로 뽑은 플레이어들은 한계에 봉착한 것 같습니다. 양을 늘려봤는데, 이젠 열 병을 한꺼번에 마셔야 간신히 성장이 이뤄지니까요. 뭐…… 개인차는 조금씩 있습니다만…….”

레인보우 엘릭서를 생산하는 양이 워낙 많고, 뽑은 플레이어는 500명밖에 안 되니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효율이 떨어진다. 당연히 양동욱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가 한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성장을 위해 그 귀한 엘릭서를 100병씩 먹일 수는 없으니…….”

양동욱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빛내며 현석을 바라봤다.

“2차 인원을 선별 중에 있습니다. 이미 데이터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으니 한 병으로 성장할 수 있는 평균 한계선까지만 지급할 계획입니다.”

양동욱은 그런 식으로 플레이어의 수를 늘려나갈 계획이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렇게 엘릭서를 쏟아 부었는데 배신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인원 선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쪽으로 턱짓을 했다. 자연스럽게 양동욱의 시선이 현석의 뒤쪽으로 향했다.

라이언과 추광열, 그리고 팀 메인퀘스트가 보였다.

“다음은 저들이다. 레인보우 엘릭서로 한계까지 키워봐.”

양동욱은 눈을 빛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떠올랐다.

“아주 제대로 팍팍 키워보겠습니다.”

라이언 일행은 양동욱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저도 좀 알면 안될까요?”

결국 류지혜가 나서서 궁금한 걸 물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뭔가를 해야 해는 것 같은데, 모르고서 부딪히는 것보다는 미리 알고 있는 것이 나을 테니까.

양동욱이 환하게 웃으며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어른 손가락 세 개 정도 겹쳐놓은 크기의 투명한 병이었는데, 그 안에는 무지개빛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레인보우 엘릭서입니다.”

“레인보우…… 엘릭서?”

양동욱이 씨익 웃었다.

“기적의 약이지요. 이걸 한 병 마시면, 강제로 레벨이 하나 올라갑니다.”

라이언 일행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레인보우 엘릭서와 양동욱, 그리고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마탑을 겪어봤으니 알고 있을 텐데?”

그제야 예전 크락실리아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을 여행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의 일이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마탑에서 개발한 약인가요?”

사실은 과정이 좀 복잡하지만 현석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양동욱이 나서서 부연설명을 했다.

“얼마 전에 레인보우 엘릭서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차로 500명의 플레이어를 선별해 레인보우 엘릭서를 공급했지요.”

그때 선별한 사람들은 나름 열심히 하고 인성도 괜찮지만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는 플레이어들이었다.

“이제 저희는 평균레벨이 250을 넘어가는 플레이어 500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제법 괜찮지요?”

양동욱의 말에 다들 또 한 번 경악했다. 250레벨이라니. 이런 사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 현석의 개입이 없이 원래의 흐름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레인보우 엘릭서 자체가 워낙 귀한 약이 되었을 테니까.

레인보우 엘릭서의 재료가 되는 마력의 정수를 구하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거나 마찬가지로 극히 희박한 확률을 자랑하니까.

물론 아직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마력의 정수를 품은 재료가 점점 일반 재료로 변해갈 테니까 말이다.

“이거 뭔가…… 좀 허탈한데요?”

물론 지금의 라이언이나 팀 메인퀘스트에게 250레벨은 별 거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300레벨을 넘은 강자들이었으니까.

또한 250레벨과 300레벨의 격차가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탈했다. 그들이 어떻게 250레벨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면 정말 지옥 같았으니까.

양동욱이 그런 라이언 일행을 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눈이 기대감으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정말 기대되는군요.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기대됐다. 한데 그 기대감 못지않게 불안하기도 했다. 대체 저 음흉한 웃음은 뭐란 말인가.

현석은 그 모든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난 앞으로 혼자서 다닐 생각이다. 그러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충분히 성장하도록.”

“걱정 딱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양동욱이 환하게 웃으며 현석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어쩌면 세상이 더 많이 변할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성장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어질 거야.”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왠지 모를 여운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현석이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양동욱의 손뼉 소리였다.

짝짝!

“자자, 다들 집중합시다.”

라이언 일행의 시선이 양동욱에게 집중되었다.

양동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가 볼까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경험하실 테니까요.”

< 마지막 파편을 찾아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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