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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99화 (299/326)
  • < 변화의 시작 5 >

    후웅!

    마치 길고 급격한 경사를 가진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진짜 그런 곳을 통과하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쭉 따라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굉장한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마력이 짙어졌는데, 이 짙은 마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마왕은 정말 굉장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질이나 양 모두 엄청났다. 그건 그저 피부로 느껴지는 마력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퉁!

    현석은 자신이 어딘가로 빠져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지독한 어둠 속이었다.

    굳이 시력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기에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주변 상황이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여긴 거대한 공간이었다. 차원과 차원의 균열에 위치한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마왕의 마력이 꽉 채우고 있었다.

    ‘마왕이 공간을 모두 장악했군.’

    그러니 이곳은 마왕에게 훨씬 유리한 장소였다. 여기서의 마왕은 밖에서보다 최소한 몇 배는 더 강해질 테니까.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다 보니 바닥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현석은 미리 준비를 하고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고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밝은 곳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옥좌에 앉은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현석이 만나 싸웠던 기존의 두 마왕과는 생김새 자체가 확연히 달랐다. 풍기는 분위기도 달랐다.

    옥좌에 앉은 마왕은 미소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체형은 여리여리했고, 얼굴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왕의 표정에는 권태가 가득했다. 가만히 현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 표정, 마력 어느 것에서든 투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현석은 마왕의 머리 위에 있는 이름을 읽었다.

    [경계의 마왕]

    죽음이나 어둠의 마왕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달랐다.

    ‘경계라면 공간과 공간의 경계를 말하는 건가?’

    확실히 이해가 가는 이름이었다. 이곳 자체도 공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에 마련된 곳이었으니까.

    아마 이런 장소를 찾아내는 것만 해도 보통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특이하군.’

    공간과 공간 사이에 있기에, 이곳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모양이다.

    기존의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물들이는 건 정말 어렵지만, 전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서 그걸 자신의 것으로 물들이는 건 정말 쉬우니까.

    반면 이렇게 마왕의 마력으로 물들어 버린 공간을 현석이 바꾸려 한다면 그건 또 다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물들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권태로운 눈으로 현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왕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너, 함정에 안 걸려들었구나?”

    마왕이 비스듬하게 기울였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의 눈빛에 흥미가 살짝 감돌았다.

    “몸에 품은 힘도 제법이야. 호오. 죽음이랑 어둠을 이겼어? 이거 보통이 아닌데?”

    마왕의 말을 듣고 있던 현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현석의 몸에서 마력이 뭉클 일어나 안개처럼 주변을 감쌌다.

    하지만 마왕의 눈빛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파악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 일곱 가지나 깃들어 있군. 설마 신의 파편이라도 깨운 건가? 그랬다면 더 대단한데?”

    마왕의 말에 현석은 다시 마력을 거둬들였다.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곳은 마왕의 공간, 다시 말해 마왕이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웬만해선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실 그 얘기는 웬만하지 않으면 막거나 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석은 그 웬만하지 않은 일을 해낼 힘과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건 마왕과 싸울 때를 대비해 아껴둬야 한다.

    고작 신경전에 힘을 낭비하면 진짜 싸움은 시작해보기도 전에 끝날 테니까.

    마왕은 잠시 현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이며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현석은 그 순간 표정이 변해 마력을 확 뿜어냈다.

    공간을 꽉 채운 마력이 저 끝에서부터 순차적으로 패턴을 이루며 변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왕이 손가락을 두드릴 때마다 마력 패턴이 변화하고 있었다.

    현석의 마력이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뽑혀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왕의 표정이 달라졌다. 손가락 두드리는 것도 멈춰 버렸다.

    “너…… 진짜 끝내주는구나! 어둠이랑 죽음이 왜 죽었는지 알겠어.”

    마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현석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실 그런 거 다 무시하고 현석이 먼저 덤벼도 된다. 한데 현석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압박감이 들었다. 싸워선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현석과 마주선 마왕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마왕은 현석의 몸 곳곳을 찬찬히 살펴봤다.

    현석은 왠지 저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놈의 안배이긴 한데…… 반쪽짜리네?”

    마왕의 입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투기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현석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로 쭉 물러났다.

    공간 전체의 마력이 투기와 살기를 품고 현석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큭큭큭큭. 역시 예상대로야. 잠시 헷갈렸지 뭐야. 네놈이 가진 힘이 예상보다 커서 내 계획이 뒤틀린 줄 알았잖아. 큭큭큭큭.”

    마왕의 표정에는 더 이상 권태로움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광기였다.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크하하하핫!”

    현석은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여자 같이 생긴 미소년이 저러고 있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생긴 것만 저렇지 속은 그 누구보다 시커먼 욕망이 꿈틀대는 마왕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내 마왕이 웃음을 뚝 그쳤다.

    “내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설마 그 어설픈 신이라는 놈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마왕의 입가가 길게 늘어났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너만 처리하면 끝이야. 그놈은…… 내 계획에 맞춰서 움직여줄 테니까.”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공간의 모든 마력이 현석을 적대하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콰콰콰콰콰콰!

    현석은 다급히 마력을 끌어 올려 그것을 막으며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이곳에서 승리하려면 머뭇거려선 안 된다.

    어느새 나타난 현석의 검이 마왕을 향해 정신없이 쏟아져 나갔다.

    꽈과과과과광!

    마왕의 손에도 어느새 검이 나타났다. 얼굴과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양손검이었다.

    그 양손검을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휘두르는데, 어찌나 빠르고 강한지 현석은 부딪힐 때마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큭큭큭큭! 당황스럽지? 다른 마왕들이랑 별반 차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큭큭큭큭.”

    마왕은 칼질을 하면서도 여유가 남는지 끊임없이 현석의 신경을 건드렸다.

    “과연 마왕이 여기로 넷이나 넘어왔을까? 아니, 애초에 마왕이라는 게 넷이나 존재할까?”

    콰과과과광!

    마왕의 검격이 훨씬 더 강해졌다. 현석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 내가 만든 거야. 크하하핫! 어때? 재미있지?”

    꽈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에 현석이 휘말려 멀리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현석은 바로 균형을 잡아 일어났지만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마왕이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현석에게 다가갔다. 손에 든 대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는데, 마치 이제 싸움은 다 끝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고 실제로는 온몸에 투기와 전투의 긴장감이 꽉 차 있었다.

    그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마치 방심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우.”

    현석은 심호흡을 했다. 이번 싸움은 결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안배라는 게 무슨 말이지?”

    “큭큭큭. 어차피 죽을 건데 알아서 뭐하게?”

    현석이 검을 겨누며 담담히 말했다.

    “그거야 아직 모르지.”

    마왕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그거 진짜 재미있는 말인데?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게 놀라워. 힘의 격차는 이미 느꼈잖아? 그리고 설마 내가 지금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현석은 마왕이 최소한 3할의 전력을 감추고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이렇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니 정말 엄청난 놈이긴 했다.

    “뭐, 여흥삼아 말해줘도 되겠지. 네놈이 열심히 찾아다닌 그 신이라는 놈이 뭔가 수작을 부렸거든. 그 결과물이 바로 너야.”

    현석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표정 보니 대충 짐작은 했던 모양이지? 어때? 신의 선물을 제대로 받은 기분은? 세상 정말 살만 하지?”

    현석은 마왕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저놈, 정확히 어떤 안배인지 모르는구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안배? 선물? 대체 내가 뭘 받았단 말이지? 난 내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웃기고 있네.”

    마왕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넌 결국 말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그걸 바치겠지. 제발 받아달라고 애원하면서.”

    마왕의 몸에서 폭발적인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마왕이 현석을 향해 돌진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현석도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꽈앙!

    둘의 격돌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양동욱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미래산업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자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들과 싸우고 대처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그나마 레인보우 엘릭서로 키운 최정예 플레이어들이 막 완성되었기에 버텼지, 아니었다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이러는 거지?”

    차라리 돈으로 덤비면 그에 걸맞은 대처를 하겠는데, 아예 힘으로 밀고 들어오니 대처할 방법도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나았다. 그저 그것만 막고 대비하면 되었으니까.

    한데 이제는 그조차 쉽지 않아졌다.

    싸움의 규모와 범위가 좀 커졌기 때문이다. 지금 각 플레이어들의 싸움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길드들 간의 싸움도 빈번했고, 또 각 기업체들이 힘의 논리를 내세우며 싸우기도 했다.

    뭔가 세상이 지금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혼란이 극으로 치닫지 않는 것은 다들 그래도 나름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든 길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선을 크게 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소란스럽기는 해도 위기감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래산업은 정말 힘든 길을 가는 중이었다.

    그 대부분의 싸움이 크든 작든 미래산업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꾸민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양동욱은 이제 슬슬 그 원흉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한창 일하고 있는 양동욱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본 양동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르포르 기사단의 단장인 케틀러였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이렇게 절 찾아오는 건 아마 처음이시죠?”

    케틀러는 양동욱 앞으로 다가가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예?”

    양동욱은 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케틀러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휘휘 저었다. 양동욱은 못 보고 못 느끼겠지만, 그의 손가락에 마력이 걸려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마력이 짙어지고 있어.”

    “예?”

    “아침과 비교해서 대기의 마력이 세 배 정도 늘어났다.”

    그제야 양동욱의 표정이 좀 심각해졌다. 이런 식의 급격한 변화는 뭔가 좋지 않은 원인이 있기 때문일 테니까.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케틀러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마력이 계속 높아지면…… 예전 내가 살던 곳과 아주 흡사한 환경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양동욱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얘기는 지구가 던전처럼 변한다는 뜻 아닌가.

    양동욱은 과연 그렇게 되면 미래산업과 현석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길지 맹렬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마력이었다.

    < 변화의 시작 5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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