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시작 4 >
회색 하늘과 회색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곳을 유유히 걷고 있었다.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의 몸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오는군.”
미카엘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 강력한 존재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과 비슷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고, 손톱은 칼처럼 날카롭고 길었다.
머리에 난 뿔은 다들 제각각이었는데, 뿔에는 강력한 마력이 맴돌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은 미카엘을 다짜고짜 공격했다.
그리고 미카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카엘은 엄청나게 강했다. 하지만 나타난 존재들도 만만치 않았다.
만일 한 놈만 나왔다면 미카엘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겠지만, 이들은 무려 일곱이나 되었다.
제법 오랫동안 이어진 전투 끝에 미카엘이 승리했다.
미카엘은 바닥에 쓰러진 일곱 존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를 먹을 때마다 미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양과 질이 급격히 상승했다.
“크으으. 이제 여기도 끝인가?”
방금 미카엘이 먹어치운 존재는 마족이었다. 그것도 그동안 현석이 상대했던 힘이 다한 어설픈 마족이 아니라 진짜 마족이었다.
그리고 그 마족들이 존재하는 이곳은 당연히 마계였다.
미카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감고 사방으로 마력을 퍼트렸다.
거칠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 맹렬한 기세로 사방을 장악해 나갔다.
잠시 후,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방으로 퍼트렸던 마력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꽈과과광!
마력이 장악하고 있던 공간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힘이 너무 강해져서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룰 수 있는 1의 힘이 다룰 수 없는 10의 힘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그건 1과 10 정도의 차이일 때나 하는 얘기다.
만일 그 차이가 1과 1000 정도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니, 1과 10000정도로 벌어지면? 혹은 그 이상으로 벌어지면 어찌될까?
“컨트롤이고 뭐고 아무 의미 없어지는 거지.”
미카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범위한 공간을 박살 내버렸지만, 조금도 지치거나 힘들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뿜어냈던 마력을 회수했다면 훨씬 힘들었을 테지만.
미카엘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화이트홀을 향해 몸을 던졌다.
세상이 뒤바뀌었다.
밖으로 나온 미카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였는데, 그는 미카엘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렸다.
“그놈은 어쩌고 있지?”
“새로 얻은 힘을 못 써서 안달이 났습니다. 조만간 큰 전쟁 한 번 벌일 것 같습니다.”
미카엘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판을 더 키워.”
로브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어 미카엘을 바라봤다. 그러자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그놈, 에너지 기업들의 힘을 이용해 미래산업과 전쟁을 벌이려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 전쟁을 더 키우라고. 돈으로 하는 전쟁 말로 진짜 힘으로 하는 전쟁으로.”
사내의 머릿속에 몇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진짜 힘을 쓰게 만드는 거야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면서 전쟁의 범위를 더 크게 확장해. 그 싸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도록.”
그제야 로브 사내가 다시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의 눈에 무수히 많은 화이트홀들이 보였다.
이 모든 화이트홀을 다 먹어치울 생각은 없었다. 이 중 강력하고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들만 취할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병력이지. 나중을 위한 병력.’
마족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세상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걸 떠올린 미카엘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맴돌았다.
‘이걸 다 먹을 수 있다면…… 굳이 열쇠 따위 필요 없지.’
미카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번째 화이트홀로 들어갔다.
* * *
하루를 푹 쉰 현석은 직접 자신이 머무는 곳에 찾아온 족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족장은 긴급회의가 끝나자마자 찾아오고 싶었지만 하루를 꾹 눌러 참았다.
현석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꼬박 하룻밤을 거의 새다시피하고 현석을 찾아온 족장은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마왕의 길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왕의 길?”
현석의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딱 원하는 대로 되었다. 사실 현석은 이곳에서 마왕만 처리하면 끝이었다.
신의 파편은 없는 것 같으니 마왕을 처리하고 하나 남은 파편을 찾으러 갈 계획이었다.
물론 그게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마왕을 처리하고 나가면 인연이 닿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마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왕이 사는 곳과 이어진 통로에 데려다 주겠다는 말인데, 그 얘기를 들으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 통로를 마왕은 이용하지 못하나?”
현석은 이미 마왕을 겪어봤기에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만일 마왕이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오면 이 바다의 전사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아무리 마왕이라도 한계가 있으니 모든 사람을 싹 죽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쳐 시도하면 결국 모든 인간의 씨를 말릴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부려먹거나.
“마왕은 통로에서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안 나오는 건지 못 나오는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 당장 뛰쳐나와도 이상할 게 없겠군.”
“그야 그렇습니다만…… 수천 년 동안이나 안 나왔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현석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서두르지. 마왕 마음이 바뀌어서 튀어나오면 곤란하니까.”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족장은 황급히 앞장서서 현석을 안내했다.
일단 마왕의 길은 섬 안에는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 있기에 존재나 길을 모르는 사람은 아예 찾을 수 없다고 보면 된다.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아니면…… 날아가거나. 바다 한가운데 있습니다.”
족장의 말을 들은 현석은 즉시 용을 불러냈다. 배를 타고 언제 거기까지 간단 말인가. 날아가야지.
용을 본 족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용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실 섬에는 용을 목격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특히 섬 가장자리의 탑을 지키던 전사들은 용을 분명히 목격했다.
족장도 그들의 보고를 받았고, 마르티우스에게 용에 대한 얘기를 들었기에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현석은 용에 매달아 놓은 철판을 제거한 다음, 용에 올라탔다.
후웅!
용이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훅 날아 앞발로 족장을 꽉 쥐었다.
족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순간, 용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슈아아악!
족장은 귀를 두드리는 바람소리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는 방향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석을 태우고 족장을 쥔 용이 마왕의 길에 도착하는 데까지 정확히 15분이 걸렸다.
* * *
현석이 마왕의 길로 날아갈 무렵, 더 정확히는 그 전날 긴급대회의가 끝난 직후, 바다의 모든 섬들이 들썩였다.
각 섬들에서 최정예 전사들을 모아 배에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현석이 데려가는 바람에 족장이 사라진 섬에서는 마르티우스가 그 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이 배가 마족들이랑 싸울 때 쓰는 무기인가보지?”
라이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선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배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척 보기에도 그냥 대충 만든 배가 아니라 고도의 마법이 가미된 배였다.
모든 범선에 최정예 전사들이 탑승했고, 지금은 범선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마르티우스도 이제 더 할 일이 없기에 라이언 일행과 함께 다니면서 그들의 호기심을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풀어주고 있었다.
“그때 보니까 위력이 굉장하던데. 이 정도 배를 만들 기술이 있으면 힘을 모아서 마왕을 처리해도 되는 거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마르티우스는 그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확실이 이들이 외부인이긴 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우리 기술로 만든 무기가 아닙니다. 그냥…… 전해지는 무기일 뿐입니다.”
“전해진다고?”
“예.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무기입니다. 각 섬에서 보유한 무기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은 그 말에 눈을 빛내며 바다에 떠 있는 범선들을 둘러봤다.
“유물 같은 건가보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배인가?”
“정확히는 배가 아니라 무기입니다. 배는 그저 무기를 싣고 다니는 용도에 불과하지요. 무기를 배에 장착하는 방법까지 한꺼번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무기를 전해 받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섬에 사람이 정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전해진다.
지금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해양 마수도 심심찮게 발견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섬 가장자리에 세워진 탑은 사실 해양 마수로부터 섬을 지키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겁니다.”
라이언은 그 뒤로도 궁금한 점을 계속 물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여기도 예전 그 숲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은 마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고 말이다.
“이제 준비가 끝난 모양입니다. 출발해야겠습니다.”
마르티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언을 바라봤다. 라이언이 씨익 웃으며 일행을 둘러봤다.
“같이 갈 거지?”
일행이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티우스의 안색이 밝아졌다. 라이언 일행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범선에 싣고 함께 가는 모든 전사들을 다 합해도 라이언 일행만 못하다는 것이 마르티우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르티우스의 말과 함께 범선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같은 일이 바다 전역에 흩어진 섬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섬이 맡은 구역으로 갈 것이다. 그쪽에서 마족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전설의 예언에 따라 대비하는 것이다.
만일 마족들을 놓치게 되면 두고두고 골치 아파진다.
마족은 정말로 음험하고 강하고 잔인한 족속이니까.
* * *
마왕의 길에 도착한 현석은 만일 족장이 제대로 안내해주지 않고 혼자 여길 찾아 나섰다면 아마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 위였다. 말이 바위섬이지 파도가 조금만 높아지면 섬이 아닌 암초가 되는 곳이었다.
현석이 혼자 이곳을 찾으려면 사방에 마력을 뿌려 위화감이 드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마왕의 길 자체가 가지는 마력의 양이 너무 적어서 그조차 쉽지 않았다.
“저…… 이제 저는 어쩝니까?”
족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두 사람은 그 좁은 암초 위에 서 있었는데, 현석이야 마왕의 길에 들어가면 되지만 족장은 그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려야 할 판 아닌가.
하지만 그런 족장의 염려는 갑자기 나타난 배 한 척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이게 대체……!”
족장은 시야를 전부 가려 버리는 거대한 배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석은 족장을 배에 태우고 방향을 잡아 배를 출발시켜버렸다.
족장 역시 뛰어난 전사이기 때문에 섬 근처에 가기만 하면 알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족장을 태운 배가 점점 멀어져갔다. 현석은 서 있던 암초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여기가 바로 마왕이 사는 곳이다. 무슨 마왕인지는 아직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마 이 마왕을 처리하고 심장을 얻으면 또 하나의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겠지.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에 마력을 집중했다.
이곳의 문을 여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암초에 마력을 흘려 넣으면 되는 것이다.
아마 보통 사람은 그냥 시키는 대로 마력을 흘려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력을 품은 물건을 보면 분석부터 하고 보는 것이 현석이었으니까.
이곳에는 함정이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마왕에게 가는 길 중간에 함정이 마련되어 있기에 보통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현석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함정을 교묘히 피해 마왕에게 가는 길을 뚝딱 만들어냈다.
이내 현석의 모습이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 변화의 시작 4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