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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96화 (296/326)
  • < 변화의 시작 2 >

    꽈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라이언 일행은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굉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가 마치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충격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진짜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마족들의 공격에 당한 줄 알았다. 한데 그렇다고 치기에는 너무 뜬금없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몸이 너무 멀쩡했다.

    18마족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굳이 싸워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만 제대로 마음먹고 힘을 쓰면 라이언 일행이 버티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아마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이다.

    라이언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눈을 떴다. 여전히 충격파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 공기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을 뜬 라이언의 시야에 아주 익숙한 등 하나가 보였다.

    “대장…….”

    대체 언제 왔단 말인가.

    현석이 18마족 앞을 막아선 채 오연히 서 있었다.

    라이언은 그 와중에 18마족의 발치에 길쭉한 선이 그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저놈들이 밀린 거야?’

    그 선은 마족들의 발에서 나온 자국이었다. 충격을 못 이겨 뒤로 쭉 밀린 것이다.

    라이언은 입을 쩍 벌렸다.

    그동안 현석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 무시무시한 18마족을 밀어내다니.

    하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건 아무리 라이언이라도 알 수 없었다.

    현석이 한 발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주변에 남아 있던 충격의 잔향이 싹 사라졌다. 마치 눈 위에 뜨거운 물을 끼얹어 녹여버린 것처럼 스르륵 없어졌다.

    나머지 일행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갑자기 몸이 가볍고 편해지니 눈을 뜨기가 한결 쉬워졌다.

    눈을 뜬 사람은 예외 없이 깜짝 놀랐다. 아니, 경악했다. 현석이 마족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안 된다고 소리치려는 찰나, 그들은 기묘한 광경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현석이 걷는 만큼 마족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겁에 질린 거야?’

    틀림없었다. 마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방금 한 번의 강력한 충돌을 통해 힘의 우위를 아주 명확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사실 마족들은 아무리 힘의 우위가 가려진다고 해도 저렇게 겁을 먹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 힘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라이언 일행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현석이 나타났고, 덕분에 살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현석은 계속 마족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현석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18마족들도 그에 맞춰 빠르게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현석이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18마족 중간에 스윽 나타났다.

    슈가가가가각!

    현석의 손에 나타난 검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사방을 난자했다.

    그 한 번의 공격에 18마족이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 죽어 버렸다.

    쉬이이이이!

    육편으로 바뀌어 바닥에 흩어진 마족의 몸체에서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검은 연기는 모조리 현석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마족의 피와 육체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을 현석이 흡수한 것이다.

    현석이 천천히 돌아섰다.

    라이언 일행은 그때까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은 채 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석의 시선이 일행을 한 번 훑고는 저 멀리 바다로 향했다.

    바다 위에는 여전히 수십 척의 범선들이 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현석에게 다가간 사람은 류혜연이었다.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현석은 류혜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말과 함께 현석의 시선이 다시 범선 쪽으로 향했다. 범선에서 작은 보트들을 우수수 내리고 있었다.

    각각 대여섯 명 정도를 태운 보트들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수십 척의 범선에서 우수수 보트들이 떨어졌으니, 그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100명도 넘겠는데?”

    어느새 평소 모습을 되찾고 다가온 라이언이 손을 눈 위에 대고 멀리 보는 포즈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마력도 상당하다.”

    현석의 말에 라이언이 살짝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가 다시 다가오는 보트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통은 아닌 것 같네.”

    물론 라이언이 느끼는 건 한계가 분명했다. 그저 마력이 제법 뛰어나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함께 있던 류혜연은 조금 더 자세한 의견을 냈다.

    “마력이…… 굉장히 거치네요.”

    “바다에 오래 살면 저런 마력을 갖게 되지.”

    현석의 말에 류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맞아요. 듣고 보니 정말 닮았어요!”

    마침 이곳이 바다이니 바다가 품은 마력과 즉시 비교가 가능했다. 정말로 저 보트에 탄 사람들이 가진 마력은 바다와 상당히 흡사했다.

    이내 보트들이 해변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에 탄 사람들이 내려 보트를 더 위로 쭉 끌어올려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현석 일행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은 상당히 위압감이 넘쳤다.

    하지만 현석 일행 중 그런 모습에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척 보기에도 싸움에 익숙해 보였다. 각각 작살이나 커틀러스를 들고 있었는데,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투기가 흘러 넘쳤다.

    그 100여 명의 전사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제일 앞에 나와 있는 자였다. 자연스럽게 그가 나머지 전사들을 이끄는 모양새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 현석 일행 앞에 섰다.

    “검은 바다의 일족 세 번째 검인 마르티우스입니다.”

    마르티우스는 자신을 소개하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는 현석이 인사를 받아주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이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나타나던 마족들과 많이 달라서 당황하던 중이었습니다.”

    현석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 얘기는 그동안 마족들과 싸워왔단 뜻 아닌가.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라이언이 얼른 나섰다.

    “마족들이 자주 나타납니까?”

    라이언의 물음에 마르티우스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는 잠시 살피듯 라이언과 현석 일행의 모습을 슥 둘러봤다.

    “어느 섬에서 나오신 분들인지 혹시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라이언이 슬쩍 현석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진실을 말해도 될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현석의 얼굴에서 별다른 표정변화를 찾지 못하자, 그냥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우린 섬에서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저기서 왔죠.”

    마르티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마족의 땅인데? 설마 당신들은 마계에서 온 겁니까?”

    “왜 저기에 마계만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르티우스가 놀란 눈으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럼 아닙니까?”

    “우린 인간의 땅에서 왔습니다.”

    마르티우스의 눈에 불신의 빛이 살짝 맴돌았다. 강력한 마족들을 막아주긴 했지만 라이언의 말을 믿기가 어려워서였다.

    “그쪽에는 바다도 섬도 없습니다.”

    라이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린 섬에서 온 게 아니니까요.”

    마르티우스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이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모든 걸 설명했다.

    일단 기본적인 정보는 줘야 얻을 것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티우스의 얼굴에 깃들었던 의구심이 순차적으로 변해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바다와 섬, 그리고 마족과의 싸움만으로 살아왔다. 한데 난데없이 다른 인간의 땅이 있다니.

    “이제 그쪽의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거든요.”

    마르티우스는 잠시 머뭇거리며 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현석에게 시선을 맞췄다.

    현석을 멍하니 보던 마르티우스가 결심했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 섬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현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티우스는 반색하며 보트 쪽으로 손을 펼쳤다.

    “일단 편한 배에 타시지요. 최대한 편히 모시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젓고는 용을 불러냈다. 이런 곳에서야말로 용의 진가가 나타난다.

    현석 일행에게는 용을 보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지만 마르티우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마르티우스를 비롯한 바다의 전사들이 경악한 눈으로 용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서, 설마 요, 용입니까?”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다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섬에 가는 건가?”

    현석의 물음에 마르티우스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잠시 바라봤다.

    “예. 마, 맞습니다. 혹시 예전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현석은 대답 없이 용에 올라탔다. 용이 살짝 떠오르자 그 아래에 매달린 철판도 허공에 둥실 떴다.

    라이언 일행은 자연스럽게 그 철판에 타고 자세를 낮췄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데 어설프게 대응했다가 떨어지면 진짜 험한 꼴을 볼 테니까.

    후우웅!

    용이 높이 날아오르더니 마르티우스가 말한 섬을 향해 훅 날아갔다.

    마르티우스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돌아간다! 서둘러라!”

    날아가는 용보다야 빨리 도착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서둘러야 혹시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마르티우스는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보트의 노를 힘차게 저었다.

    * * *

    렉스턴 에너지.

    높고 거대한 빌딩의 최상층, 사방이 유리로 이루어진 사무실에 칼슨이 서서 창밖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슨의 표정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더없이 날카로웠다. 아니, 날카로운 걸 넘어서 섬뜩할 지경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는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래리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지?”

    “잘 끝났습니다. 시체조차 남지 않더군요. 덕분에 처리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시체조차 안 남았다고? 장비는?”

    “장비도 싹 사라졌습니다.”

    “부서졌나?”

    “연기처럼 변해 모조리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래?”

    칼슨이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래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쪽도 작업이 다 끝났습니다.”

    그 말에 칼슨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그래? 다 끝났단 말이지?”

    “예. 수뇌부를 모조리 장악했으니 이제부터 이사님의 말을 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칼슨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군. 그럼 시작해야지. 지금까지 당했던 걸 단숨에 갚아줄 차례가 됐어.”

    그렇게 말한 칼슨이 불현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역시 미카엘이야.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어.”

    래리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 그 사람이 제일 의심스럽고 무섭습니다.’

    미카엘이 이번에 칼슨을 위해서 해준 일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세계의 에너지 산업을 주무르는 가문을 모조리 복속시킨 것이다.

    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수뇌부를 말로 설득하거나 협박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 지독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충성심이 향하는 곳은 이사님이 아니라 미카엘이라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래리의 마음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미카엘에 대한 불신의 말을 꺼내는 건 절대 슬기롭지 못한 일이 될 테니까.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칼슨이 보여주는 미카엘에 대한 신뢰는 엄청났다. 본인보다 오히려 미카엘을 더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끝났다.

    미카엘이 원한 모든 걸 렉스턴 에너지에서 준비해 끝내 주었고, 칼슨은 그 대가로 세계 에너지 산업을 한 손에 쥐게 되었으니까.

    래리는 칼슨을 바라보며 새삼 그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 칼슨은 몇 년 동안이나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걸 해결한 것이다.

    물론 그조차 절반 정도는 미카엘의 힘이었지만, 칼슨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래리는 체념의 숨을 훅 내쉬었다.

    어차피 미카엘에게 딴 맘이 있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믿고 따르고 달콤한 과실을 따먹으며 즐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래리는 진심을 담아 칼슨에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자, 그럼 우리도 슬슬 일을 시작해야지?”

    칼슨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맴돌았다.

    < 변화의 시작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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