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의 전사들 2 >
용은 도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굳이 도시 사람들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현석의 판단 때문이었다.
현석이 용을 돌려보내자, 카니스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머지 전사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머지는 정신 차리면 오라고 하고 먼저 가지. 어차피 멀지도 않으니 괜찮겠지?”
“예. 문제없습니다. 저래 보여도 다들 사막의 전사들이니까요.”
현석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자 카니스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어차피 도시의 위치는 확인했으니 도시까지의 안내는 필요가 없었다.
도시에 들어간 다음의 안내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사막 위에 우뚝 선 도시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이대로 그냥 걸어가면 몇 시간은 가야 할 듯했다.
생각보다 사막의 규모도 컸고, 사막 군데군데 위치한 도시도 제법 컸다.
도시에 가까워 가니, 카니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는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입구를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카니스. 벌써 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입구를 지키던 전사가 카니스를 잘 아는 듯했다.
“나중에 올 거야. 손님이 있어서 난 좀 서둘러서 왔지.”
“손님?”
현석에게 향하는 전사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어진 카니스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래 거인을 만났는데, 이분이 도와주셔서 간신히 살았거든.”
“모래 거인?”
전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카니스의 몸 곳곳을 살펴봤다.
“괜찮은 거야?”
“나야 괜찮지. 일곱이 죽었어.”
일곱이나 죽었다고 하는데도 전사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모래 거인을 만났는데 그 정도면 운이 좋았군. 그나저나…… 요즘 부쩍 모래 거인이 자주 나타나는 것 같지 않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제사장님이랑 전사장님이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야.”
“그래? 뭔가 대책이 나오려나?”
카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은 모양이야. 아차하는 순간 근처 도시들에 먹힐 수도 있으니까.”
“하긴…… 모래 거인이랑 싸우다가 우리만 당하면 곤란하지.”
카니스는 얘기를 하다 보니 더 답답해졌다. 모래 거인의 출몰은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그걸 해결해야 할 도시들은 정작 나 몰라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짜증났다.
“그냥 근처 도시들이 연합을 해서 처리하면 될 텐데…….”
“그게 쉽겠어? 어느 하나가 싹 집어 삼키지 않는 한, 안 되지.”
카니스는 전사의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먹힌 도시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아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될 것이다.
“아무튼 난 제사장님을 좀 만나야 해서 그만 가볼게.”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군.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카니스는 손을 한 번 휙 들어서 흔들어 주고는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석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전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도시에 드나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저렇게 날카롭게 관찰하는 것이 저들의 일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모래 거인이 원래는 잘 안 보였나보지?”
현석은 사막에 흐르는 마력을 온몸으로 분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모래 거인뿐 아니라 변종 모래 괴물둘이 제법 많이 등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곳곳에 마력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 얘기는 그 부분에 마력이 고도로 응집될 것이고, 그로인해 아까 현석이 모래 거인을 죽이고 얻은 마정석처럼 마력의 결정화가 일어나기 쉽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마력의 결정화가 일어나는 동안 근처에 쌓인 모래로 인해 모래 형태의 마수가 태어나는 듯했다.
보통은 생명체에 마정석이 깃들면서 마수가 되거나, 애초에 마수로 태어나서 자라나는 경우가 많은데, 참으로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래 마수가 태어날 때, 근처에 부정적인 마력이 고여 있으면 변종이 되기도 하는데, 아까 만났던 모래 거인이 딱 그런 식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이곳 화이트홀의 상황은 모래 거인 같은 마수가 다수 태어나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었다.
현석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카니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전에는 1년에 한 번 만나면 운이 좋다고 할 정도로 드물었습니다.”
“운이 좋다고?”
카니스가 씨익 웃으며 품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걸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 중에서 변종을 만날 확률은 더 적었으니까요.”
확실히 변종이 아니라면 아까 봤던 그 전사들만으로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저 빠르고 힘만 센 놈이라면 지속적인 타격을 통해 데미지를 쌓아 모래 응집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
대신 그렇게 해서 얻은 마정석은 질이나 크기가 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 현석이 한 것처럼 단숨에 그 연결을 끊어내고 마정석을 확 뽑아내는 것이 모래 거인 같은 마수를 상대하는 정석이었다.
“한데 요즘은 장난이 아닙니다. 한꺼번에 세 마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변종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래 거인이 세 마리나 나타나면 웬만한 전사들은 당해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어디서 모래 거인이 계속 생겨나고 있을지 모르는데 솔직히 다들 너무 안일함에 젖어 있습니다.”
카니스의 한탄을 듣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 한가운데 제법 화려하고 큰 규모의 건축물이 있었다. 아랍의 궁전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살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최소한 도시를 지배하는 지배계층의 저택일 것이다.
“제사장님과 전사장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사실 제사장과 전사장은 도시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왕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의할 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렇게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아주 특이한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둘이 함께 거주한다고 보면 맞다.
어쨌든 현석은 카니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정문 앞에도 지키는 전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카니스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예를 표했을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카니스의 지위가 높은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지붕으로 햇볕을 가려놓은 긴 복도가 보였다.
건물 주변을 이동할 때 쓰는 길인 모양이었다.
그 복도를 지나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들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시녀들이었다.
다들 카니스를 발견하면 더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카니스는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주며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현석은 사람들의 시선이 카니스에 이어서 자신에게 머물렀다가 가는 걸 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를 관찰하는 데 특별한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카니스가 현석을 데리고 간 곳은 건물에서 가장 큰 홀이었다.
그 안에 백발이 성성한 남자 두 명이 앉아서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아하니 노인이긴 하지만 둘 다 아직 정정해 보였다. 웬만한 장정 못지않은 생동감과 힘이 느껴졌다.
카니스는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왔느냐?”
노인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카니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카니스 옆에 서 있는 현석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손님을 모셔왔구나.”
의자 옆에 칼을 세워둔 노인이 말했다. 그가 이 도시의 모든 전사를 지배하는 전사장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는 노인이 도시의 행정을 비롯한 모든 걸 관리하는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의자에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세워놓았는데, 거기에서 제법 맑고 뛰어난 마력이 감지되었다.
카니스가 당당히 말했다.
“외부에서 오신 분입니다.”
“외부?”
두 사람의 눈이 대번에 달라졌다. 둘은 현석을 잠시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복장부터 예사롭지 않긴 하구나. 한데 그것만으로 외부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화와 행동을 통해 유추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카니스의 말에 두 노인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판단력이나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건 우리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알고 있습니다.”
카니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품에서 마정석을 꺼냈다. 현석이 보수로 준 마정석이었다.
그걸 본 제사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마정석보다 질이 뛰어나고 크기도 컸기 때문이다.
“제 은인이시기도 합니다. 이분께서 이걸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분을 찾으셔서 이쪽으로 모셔왔습니다.”
제사장이 놀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카니스가 조용히 뒤로 살짝 물러났다.
이제 제사장과 전사장의 시선이 오직 현석에게 집중되었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석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 사람을 슥 둘러봤다.
현석은 이들이 말한 외부인이라는 것이 화이트홀 밖에서 온 사람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세상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외부인과 접촉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 현석은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이들의 말과 행동을 기다렸다.
전사장의 몸에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쓰는 마력 역시 숲의 부족들이 쓰던 주술력과 마찬가지로 약간 변형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곳의 마력은 주술력보다는 순수한 마력쪽에 더 가까웠다. 아주 약간 뒤틀려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미묘한 뒤틀림 때문에 마력에 불의 힘이 미약하게 깃들어 있었다.
아마 사막 특유의 환경 덕분에 이렇게 된 듯했다.
현석은 전사장의 마력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마력을 통해 자신을 파악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제사장이 입을 열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은 보통 우리말을 못 하는 법인데, 좀 특이하긴 하군.”
그 말에 현석이 눈을 빛냈다.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까?”
현석의 질문에 제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었네. 다만……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얘기라서 문제지.”
현석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던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플레이어가 생겨난 지 아직 몇 년 되지 않았다.
한데 아주 오래전에 외부에서 여기로 사람이 들어왔다는 건 그때도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그 통로가 화이트홀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었다.
현석은 아닌 쪽에 살짝 무게감을 더 주었다. 만일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이 생겨났다면 아마 그건 다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화이트홀은…… 포화된 이곳의 마력을 못 이겨서 생겨난 구멍일 테니까.’
그것이 현석이 생각하는 화이트홀의 생성 원인이었다.
물론 블랙홀은 좀 얘기가 다르다. 블랙홀은 화이트홀과는 달리 뭔가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 의도를 갖고 만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외부인이 들어왔는지 다른 화이트홀도 확인해봐야겠군.’
어차피 현석이 다녀온 두 화이트홀에서는 정보를 얻기가 아주 수월했다.
메디나툰의 경우 현석이 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그 전에 다녀온 화이트홀도 마탑을 장악하고 있으니 정보 수집이야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쪽은 접촉이 없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짚어두는 편이 나았다. 뭐든 작은 방심에서 무너지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현석은 자신의 주위를 슬그머니 감싸는 전사장의 마력을 내려봤다.
‘굉장히 거슬리는군.’
아마 전사장의 마력은 다른 전사들에 비해 굉장히 은밀할 것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운용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의 마력 자체가 불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은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얼마나 신경이 거슬리겠는가.
현석은 고개를 돌려 전사장을 쳐다봤다. 특유의 담담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하지만 현석과 눈이 마주친 전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순간 현석이 주변에 있던 마력을 자신의 마력으로 콱 붙잡아 크게 흔들었다.
“쿠웨엑!”
전사장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경악어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그런 전사장을 그저 가만히 내려다봤다.
장내에 싸늘한 분위기가 착 내려앉았다.
< 사막의 전사들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