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조 8 >
인도의 밀림 상공에 도착한 현석은 용을 돌려보냈다. 아래로 뚝 떨어져 바닥에 착지한 다음, 퀸급 생성지역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퀸급 생성지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생성지역에 맴도는 마력만 찾아내면 되니까.
밀림을 헤치고 쭉 달려가다 보니 갑자기 공터가 나타났다. 생성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생성지역은 상당한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이 밀림 한가운데에 어떻게 저런 시설을 만들었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엄청났다. 다들 블랙홀을 위해 동원된 인원이었다.
인도의 블랙홀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편이라서 인원이 많이 필요했다.
그 많은 인원을 감당하기 위해 숙소와 편의시설의 규모를 대폭 늘렸다.
원래 있던 공터 근처의 밀림을 좀 더 개발해서 건물을 짓고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다수의 플레이어를 상주시키면서 교대로 블랙홀을 클리어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단 지금은 5교대였고, 조만간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늘어나면 4교대 정도로 줄일 예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 레벨이 좀 떨어지는 플레이어들을 이쪽으로 파견해서 성장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아직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정해진 게 없었다.
이곳은 인도의 밀림 한가운데 있기에 경계가 정말로 철저했다.
여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장소였다.
그러니 이렇게 갑자기 현석이 나타났는데,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경계를 서던 플레이어들이 현석을 발견하고는 비상 신호를 보냈다.
안에서 쉬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다들 각자의 무기보다는 총을 비롯한 현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솔직히 웬만한 레벨에서는 마력 기반 무기를 쓰는 것보다 현대 무기를 쓰는 게 훨씬 강력하고 위험했다.
물론 그 웬만한 레벨을 넘어서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지만 말이다.
다행히 현석의 얼굴을 아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미래산업의 플레이어들뿐 아니라 피라밋 암시장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현석은 상당히 유명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현석이 유명하게 된 것은 임형석 덕분이었다.
아닌 블러디퀸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가 유명해지는 거야 너무나 당연했고, 그런 임형석이 현석의 얘기를 어찌나 자주 했는지 그를 한 번 만나본 사람은 현석에 대해 정말로 잘 알았다.
임형석은 현석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이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계 제일의 강자라는 수식어를 항상 붙였다.
그들이 보기엔 임형석이 딱 그런 존재였는데, 그런 존재가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강자라는 말이 얼마나 강렬하겠는가.
어쨌든 현석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심지어 얼굴까지 아는 사람도 있었다.
현석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화이트홀과 투명 던전을 확인했다.
다들 현석을 대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현석은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 현석의 머릿속에는 투명 던전부터 갈지 아니면 화이트홀에 들어갈지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라이언 일행에게는 투명 던전부터 공략하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그게 더 안전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현석은 안전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현석은 그런 문제는 그냥 씹어먹을 정도로 강했다.
잠시 고민하던 현석은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물었다.
“화이트홀에 들어가본 적 있는 사람?”
현석의 질문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화이트홀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상부에서 엄중한 지시가 내려진 상태였다.
한데 대놓고 그걸 묻다니, 그 의도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현석은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들어가려고 해서 정보를 구하는 거다. 들어가 본 사람 없나? 절대 비밀을 보장해준다고 약속하지.”
현석 정도 되는 사람이 하는 약속은 천금의 가치를 가진다. 그제야 눈빛이 달라진 사람이 몇 명 보였다. 물론 대놓고 앞으로 나서진 않았다.
현석은 그 사람들을 확인한 다음 해산시켰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찾아가 직접 안의 정보를 확인한 다음 결론을 내렸다.
화이트홀부터 공략하기로.
* * *
“숲 다음에는 사막이라…… 남은 하나는 대체 어디일지 궁금하긴 하군.”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야말로 피부를 꿰뚫을 것처럼 강렬한 태양이 쏟아졌다. 그리고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모래였다.
두 개의 화이트홀 중 하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언데드들이 있다고 했다.
현석은 그곳으로 가지 않고 나머지 하나로 왔다.
사막과 모래괴물이 있다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말이다.
현석의 눈에 저 멀리 모래가 강처럼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바로 이 사막을 지키는 괴물, 모래뱀이었다.
모래뱀의 크기는 정말로 거대했다.
촤아악!
모래뱀이 고개를 쫙 치켜들고 입을 쩍 벌렸다. 수십 층짜리 빌딩 한 채가 불쑥 올라오는 듯했다.
그리고 벌린 입의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모래뱀이 현석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현석이 있던 자리를 입으로 콱 물어 버린 것이다.
퍼엉!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모래뱀의 공격은 빠르고 강력했지만 현석을 상대하기에는 좀 모자랐다.
모래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따라 주변 모래가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모래뱀의 몸체를 더 크게 부풀려 주었다.
놀랍게도 크기가 더 커졌는데, 속도가 오히려 더 빨라졌다.
현석은 다급히 몸을 피했다.
퍼버버버벙!
모래뱀의 몸에서 어른 몸통만한 두께의 모래 구렁이가 마구 쏟아져 나가 현석을 공격했다.
일단 공격을 실패한 모래 구렁이는 다시 모래로 변해 모래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모래뱀이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점점 더 빠르고 강해졌다.
현석은 모래뱀의 공격을 피하면서 눈을 빛냈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승산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굳이 모래뱀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봐야 힘만 빠질 뿐이다.
그저 공격을 피하면서 약점을 찾아내는 게 훨씬 나았다.
‘찾았다!’
현석의 눈이 번득였다. 이 거대한 모래뱀의 핵을 찾아낸 것이다.
놀랍게도 모래뱀이 가진 핵의 크기는 고작 모래알 하나만 했다.
현석은 만일 자신이 여섯 번째 파편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 모래뱀과의 싸움에서 이렇게 간단히 이길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운이 좋은 셈이었다.
진짜 강하고 까다로운 놈을 나중에 만났으니 말이다.
현석은 마력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리고 바늘처럼 가느다랗게 뽑아냈다.
바늘만 한 빛이 현석 앞에 나타났다.
그 빛에 막대한 마력이 집중되었다. 현석은 가진 마력의 절반 이상을 거기에 쏟았다.
크기를 가지고 강도를 판단하면 안 된다.
모래뱀의 핵은 모래알만 하지만, 어설픈 공격으로는 생채기도 못 낸다.
적어도 현석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래서 더 까다로웠다. 현석이 가진 마력의 9할 이상을 쏟지 않으면 파괴가 불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모래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현석은 아슬아슬하게 그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점점 위험한 상황이 잦아졌지만, 그럼에도 어찌되었건 피하긴 피했다.
그리고 마침내 힘의 9할 이상을 쏟아서 만든 마력의 바늘이 완성되었다.
푸슉!
꽈득!
마력의 바늘은 너무나도 정확히 모래뱀의 핵에 명중했고, 그야말로 딱 맞춘 힘으로 그것을 파괴했다.
촤르르!
모래뱀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현석은 그것을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로 힘든 싸움이었다. 힘의 9할 이상을 쏟아야 한다는 추측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아마 조금만 더 힘이 모자랐어도 모래뱀의 핵은 완벽하게 부서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현석이라도 모래뱀을 당해내진 못했으리라. 물론 죽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밖으로 다시 도망쳐야만 했을 것이다.
어쨌든 모래뱀을 죽였고, 그 덕분에 또 한 번 폭발적인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과연 500레벨을 찍을 수 있을까?’
현석이 생각하는 정체기의 시작점이 바로 500레벨이었다.
아마 남은 두 개의 파편을 더 깨우고 그 도움을 받으면 거기까지는 성장하지 않을까?
그 전에 마탑에 가서 생명수를 전해줘야 한다. 그래야 최상의 엘릭서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현석은 충분히 쉰 다음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이곳 사막에도 부족들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명히 여기서도 할 일이 있을 것이다.
현석은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정리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 * *
라이언 일행은 마족들을 계속해서 따라갔다. 대체 이놈들이 어디로 저렇게 열심히 가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물론 상당한 거리를 두고 쫓아갔다. 시야가 확 트인 벌반이었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들킬 염려가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
“글쎄. 지금 고민 중이야. 그냥 빨리 쫓아가서 다 쓸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지금 라이언 일행의 수준이라면 저 정도 마족들은 전혀 어렵지 않게 몰살시킬 수 있었다.
최근 다들 광역스킬을 하나씩 개발했기에 그걸 써먹어 볼만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류지혜가 반대했다.
“병사도 없잖아요. 마족들과 싸우다가 다 죽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여기랑 이어진 세상으로 간 거겠지.”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류지혜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저놈들 빨리 쓸어버리고 이곳의 병사들이 간 세상으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이언의 말에 류지혜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병사들을 우리끼리 막을 수 있을까요?”
라이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건 좀 어렵지.”
그 병사들은 기이한 힘을 쓰고 있었다. 광역 버프를 항상 걸고 다니는데,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버프가 유지되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얼마 전 숲에서 싸웠던 병사들을 떠올린 라이언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지 않아? 저 마족들만 보면 병사들이 압도적으로 강해야 하지 않나?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게 웃기는 상황이잖아. 안 그래?”
“그러게요.”
두 사람의 의문에 대한 답은 류혜연에게서 나왔다.
“이 땅 자체가 마족에게 호의적이에요.”
“호의적이라고? 마계라면 모를까…… 여긴 마족의 땅도 아닌데?”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이곳은 마계에 더 가까워요. 아마 병사들도 제 힘을 발휘하진 못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좀 말이 되긴 한데…….”
그 순간 박승희가 나직이 말했다.
“다 온 모양이에요.”
그 말에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마족들이 어딘가로 달려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화이트홀이었다.
“마족들이…… 화이트홀로 들어가는데? 저 화이트홀 설마 마계로 가는 통로인가?”
마족들은 화이트홀을 통과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 가설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설마…… 저거 마계가 아니라 지구로 통하는 화이트홀은 아니겠죠?”
류지혜의 한 마디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록 마족 중에는 약한 놈들이지만 그거야 여기서 라이언 일행과 싸울 때의 얘기다.
만일 저놈들이 지구로 가게 된다면 그 피해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할 것이다.
“일단 막아!”
라이언이 그렇게 외치며 돌진했다.
나머지 일행이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잡아 버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흐아아압!”
꽈아아아앙!
모두가 작정하고 광역스킬을 쏟아냈다.
마족 군단의 후위가 봄에 눈 녹듯 무너졌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진형으로 라이언이 파고들며 사방을 휘저었다.
마족과 팀 메인퀘스트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화이트홀과 가까이 있던 마족들은 속속 화이트홀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전조 8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