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조 4 >
쩌저저저정!
라이언과 총사령관이 격돌했다.
총사령관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밀린다는 걸 싸우면 싸울수록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여유가 없어서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병사들도 계속 깎여나가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남아나는 병사가 없을 것 같았다.
“젠장!”
총사령관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마구 휘둘렀다. 검에 막대한 마력이 담겨 라이언 근처를 휩쓸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여유롭게 그것들을 피하고 쳐내며 오히려 총사령관에게 한 발 파고들었다.
“장소가 별로 안 좋지?”
라이언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어느새 라이언의 검이 총사령관의 검을 쳐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이 총사령관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뻐엉!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총사령관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뒤로 날아갔다.
갈비뼈가 일곱 개는 아작 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부서진 뼈가 폐를 찌른 모양이었다.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허겁지겁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상처에 뿌리고 벌컥벌컥 마셨다.
라이언은 그런 총사령관을 가만히 지켜봤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잡아서 물어볼 말이 많았으니까.
“금방 끝나진 않겠네.”
라이언이 총사령관과 싸우는 동안 팀 메인퀘스트가 전장에 난입해 적병을 말 그대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싸움 자체가 끝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현석이 꺼낸 언데드의 수도 차근차근 줄어들고 있어서 적병이 쓰러지는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으니까.
힘 자체는 압도적이었지만, 수가 너무 많으니 그 부분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쪽의 병력은 이게 다가 아니다.
아마 조만간 무팔룬이 이끄는 숲의 전사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강하다. 그리고 수도 많다.
아마 그들이 오면 순식간에 이 전투가 마무리될 것이다.
라이언은 총사령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생각보다 포션이 잘 안 듣지? 싸울 때 힘도 제대로 못 쓰겠고.”
라이언이 씨익 웃었다.
자신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겪었던 일이다. 아마 그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긴 공기가 달라.”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총사령관 앞에 섰다.
“자, 이제 우리 다정한 대화의 시간을 좀 가져볼까?”
씨익 웃은 라이언이 발을 들어 총사령관의 가슴을 꽉 밟았다.
꽈득!
간신히 붙으려던 갈비뼈들이 다시 부서졌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했던 뼈들도 추가로 몇 개 부러졌다.
라이언은 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알아본 순간의 눈빛에 적의가 깃들어 있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쿨럭!”
총사령관이 피를 토했다. 그는 독기 어린 눈으로 라이언을 노려봤다.
“눈빛 좋네. 일단 자기소개의 시간부터 가져볼까?”
라이언의 눈에도 비슷한 독기가 맴돌았다.
* * *
무팔룬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전수해준 숲의 무예를 익혔다지만 아무래도 숙련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따라오는 속도가 너무 더뎠다.
사실 가진 바 힘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순전히 숲의 힘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 자체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격이 달랐다.
그래서 무팔룬은 계속 따라오는 전사들에게 속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는데…….’
무팔룬의 다급한 심정을 읽었는지 따라가던 전사들이 그동안 몇 번이나 먼저 가라고 권했지만 무팔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선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은 이들을 이끄는 숲의 전사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에게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당분간은 함께 하며 생사의 순간을 나눠야 한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다들 힘 내!”
무팔룬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전사들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일단 자신이라도 먼저 싸우고 있으면 나머지는 잠깐 쉬면서 힘과 체력을 회복하고 전투에 끼어들면 된다.
그렇게 달리던 무팔룬은 온몸을 쩌릿쩌릿하게 만드는 힘의 파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단 무팔룬만 느끼는 건 아닌지 다른 전사들의 표정도 일제히 달라졌다.
“그분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다들 몸을 추슬러라!”
무팔룬의 말에 다들 달리는 걸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숲의 힘이 폐부 깊은 곳으로 들어와 몸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그렇게 잠시 전사들이 힘을 되찾는 동안 무팔룬은 신중하게 현석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혹시 뭔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역시 대단하시다.’
현석의 존재감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무팔룬은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이내 전사들이 회복을 마쳤다. 완벽한 몸상태가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싸움에 도움이 될 정도는 된 것이다.
“가자!”
무팔룬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그러자 전사들이 우르르 뒤를 이었다.
무팔룬의 눈에 병사들이 보였다. 더 기다릴 것도 볼 것도 없었다.
“하아아압!”
강렬한 기합과 함께 무팔룬의 몸이 화살처럼 병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꽈드득!
병사가 그대로 뭉개졌다.
그 뒤를 이어 512명의 전사들이 짓쳐들었다.
꽈앙!
강렬한 격돌이 이어졌고, 난전이 펼쳐졌다. 512명의 전사는 하나같이 용맹했고,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병사들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싸움이 서서히 끝을 향해 치달아갔다.
* * *
무팔룬은 현석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그 뒤로 512명의 전사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라이언을 비롯한 일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현석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예를 받고 있었다.
“왕을 배알합니다.”
무팔룬의 말에 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무팔룬과 전사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서 다음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너희는 돌아가서 숲의 부족을 하나로 만들어라. 나중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현석의 말에 나머지 일행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설마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팔룬은 당연하다는 듯 현석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왕의 명령을 이행합니다.”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나 말도 필요 없었다. 무팔룬과 전사들은 그대로 돌아서서 메디나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 때보다는 느린 속도였지만 어쨌든 달려서 가는 중이었다.
무팔룬은 메디나툰에 전쟁의 결과를 얘기하고 숲의 왕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이제 숲의 왕이 나타났으니 모든 부족을 통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불가능해도 해내야 한다. 그것이 왕의 명령이니까.
무팔룬과 숲의 전사들이 사라지자, 현석은 돌아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총사령관을 쳐다봤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얘기를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현석의 눈에 총사령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보였다. 아주 특이한 마력이 담긴 반지였다.
현석은 그 반지를 심안으로 확인했다.
[지배의 반지]
이름을 확인한 순간 반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퍽!
그리고 그대로 터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미처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대충 유추가 가능했다.
아마 이 반지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상급자의 명령에 반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한 것이고 말이다.
반지를 뺄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반지가 몸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으니까.
“이제 어쩌지?”
라이언의 물음에 현석이 고개를 들어 병사들이 진군해온 쪽을 쳐다봤다.
“우린 저쪽으로 간다.”
일행이 긴장한 눈으로 현석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저쪽에 투명던전이 있다. 이곳과 연결된 던전이.
* * *
“으와! 여기는 진짜 황량하네요.”
그냥 황량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투명던전이면 마계로 이어지는 화이트홀도 있는 거 아닌가요?”
류지혜의 물음에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아직 그건 현석도 모르는 일이니까.
회귀 전에도 이곳 투명던전은 그저 들어가서 전쟁에 휘말려 병사들과 싸워본 게 전부였다.
그래서 사로잡은 병사를 통해 이곳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정말 그곳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치 않다. 그저 유추만 했을 뿐이니까.
현석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한도 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을 불러냈다.
“일단 타고 위에서 확인하자.”
현석 일행은 용에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높이 올라가니 아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정말 넓은 곳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만 이어진 장소는 아니었다. 저 멀리 요새처럼 생긴 게 있었다.
현석 일행은 그제야 숲을 공격한 병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요새에 있던 병사들이었다.
요새의 규모가 상당했다. 아까 왔던 병사들 정도는 충분히 주둔하고 있을 법했다.
“아까 그게 다가 아니었군.”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요새를 향해 날아갔다. 저 안에서 병사가 아닌 그냥 사람이 가진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저 요새 안에 플레이어들이 머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현석의 뇌리에 의문이 들었다. 이곳은 투명 던전이다. 현석 외에 투명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현석은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 외에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화이트홀이 열려 그곳을 통해 이곳으로 저들이 들어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요새 너머를 확인해봤다. 현석은 저 멀리 투명 던전의 출입구가 있는 걸 발견했다.
과연 저기로 들어온 걸까?
현석은 일단 요새에 좀 더 다가간 다음, 용에서 내렸다. 그리고 은밀히 요새에 잠입했다.
요새 안에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몇 명 되지 않기에 외부를 감시하거나 지켜보는 건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요새 안의 플레이어들은 한 군데 모여 있었다. 한데 그들의 중심에 화이트홀 하나가 보였다.
현석 일행은 서로 눈짓을 했다. 일단 저 플레이어들을 다 제압한 다음 저 화이트홀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투명 던전 안에 있는 화이트홀이니 저곳이 마계일 확률이 높았다.
현석 일행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플레이어들이 깜짝 놀라 움직이려 했지만 애초에 방심하고 있던 상황에서 현석 일행처럼 강한 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뭐야! 어디서 온 놈들이야!”
플레이어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무기를 휘둘렀다. 상당히 강한 플레이어들이었기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하더라도 굉장한 공격이 날아왔다.
현석 일행은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내며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촤촤촤촥!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들도 아까 그놈과 같은 놈들이었다. 손가락에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 굳이 잡아서 심문할 필요도 없었다. 말하고 싶어도 한 마디도 못할 테니까.
플레이어들이 죽자, 그들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에 금이 가더니 팍 하고 부서졌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화이트홀로 들어갔다. 아마 마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머지 일행도 현석을 따라 서둘러 화이트홀로 들어갔다.
세상이 확 뒤바뀌었다.
예상대로 화이트홀은 투명 던전과 이어진 마계였다.
하지만 마족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아까 그 플레이어들이 다 정리한 모양이었다.
“이쪽을 통해 들어온 걸까요? 마계로 이어진 다른 통로가 있는 거겠죠?”
류지혜의 질문을 들으며 현석은 감각을 최대한 넓게 퍼트렸다.
생각보다 넓지 않은 마계였기에 대부분의 공간을 감각의 범위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화이트홀 하나를 또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이제야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이 되었다. 투명 던전을 찾아 들어온 게 아니라 화이트홀을 이용해 들어온 것이다.
“화이트홀인가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계와 연결된 화이트홀도 있었던 모양이네요.”
좀 특이한 케이스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석은 서둘러 화이트홀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화이트홀을 넘은 현석은 그 자리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온통 화이트홀 천지였다.
< 전조 4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