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조 3 >
현석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일행도 뒤를 따라가고 있긴 했지만,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사실 현석은 일부러 일행과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일단 자신이 먼저 만나 상대한 다음, 나중에 일행이 도착해야 차근차근 적과 싸워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먼저 적의 진형을 휘젓는다거나 피해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 얻은 새 스킬은 이럴 때 써먹기 딱 좋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이쪽 피해가 너무 커져.’
지금 현석을 따라오는 자들은 같은 일행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뒤에서 따라오긴 하지만, 500명이 넘는 전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500여명의 전사를 이끄는 사람은 무팔룬이었고 말이다.
현석은 뜬금없이 무팔룬과 전사들이 자신을 왕이라 칭하는 걸 듣고는 즉시 메디나툰을 벗어나 전장을 향해 달렸다.
거기 더 오래 있다간 괜한 일에 엮일 것 같은 귀찮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 자체는 사실 나쁘지 않았다.
전사들은 현석을 숲의 왕이라 칭했다. 그건 그들이 뽑으려 했던 왕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들은 숲에서 살아가는 숲의 사람들이다. 한데 그런 자들이 숲의 왕이라 칭하면 그게 뭘 뜻하겠는가.
그들이 모시는 신을 돌려 말한 셈이다.
숲의 왕은 그들의 터전인 숲을 지키는 존재였다.
그리고 숲의 전사들은 그런 숲의 왕을 지키는 존재였다.
그것이 그들이 믿는 숲의 왕과 숲의 전사에 대한 전설이자 역할이었다.
그러니 다들 쫓아오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만일 이 전쟁이 끝난다면 현석의 영향력은 그저 메디나툰의 왕이 되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질 것이다.
어쩌면 현석이라는 숲의 왕의 존재 하나로 인해 모든 숲의 부족들이 서로에 대한 경쟁과 은원을 잊고 하나로 뭉칠지도 모를 일이다.
메디나툰이 힘으로 하려던 일을 현석은 그저 상징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석은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념을 털어버렸다.
지금은 그런 속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싸움에 모든 걸 집중할 때다.’
현석은 마력과 주술력을 비비꼬아서 다리로 보냈다. 그러자 달리는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그렇게 현석이 숲으로 진격해 오는 군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중무장한 병사들이 숲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험한 숲길을 가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같았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팔뚝에 방패를 찼으며, 등에는 길쭉한 창을 매달고 있었다.
그렇게 앞장서서 진군하는 병사의 수가 천 명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병사들 뒤로 가벼운 가죽갑옷에 검 하나만 달랑 찬 사내들이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몸에서는 진한 마력이 마구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기사였다.
기사들 뒤로 수천의 병사가 뒤따랐고, 그 병사들 뒤로 네 사람이 짊어진 가마에 올라탄 자들이 보였는데, 다들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흐르는 마력은 특별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이 부대의 마법사들이었다.
당장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지 마력이 끊임없이 그들의 몸으로 빨려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행의 가장 후미에 거대한 말을 타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이 부대의 총사령관임이 분명했다. 또한 이 부대에서 가장 강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현석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수가 생각보다 많은데?”
총사령관으로 보이는 자 뒤로 수만 명은 될 법한 병력이 뒤따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앞에 선 병사들에 비해 좀 더 약해 보였다. 머릿수가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한 병력들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하나하나 강력한 병사들이었다. 웬만한 마수는 혼자서도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석은 군대 전체에 흐르는 마력을 파악했다. 각 병사와 기사, 마법사가 내뿜는 마력이 일정 패턴을 가지고 흘렀는데, 그것 역시 거대한 마법진의 일종이었다.
‘체력을 늘려주는 마법진처럼 보이는군.’
어쨌든 생명이긴 하다는 뜻이다. 만일 생명이 아니라 언데드였다면 체력 따위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현석은 저 마력의 흐름을 통한 마법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파악해봤다.
이건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한참 동안 마력의 흐름을 파악하던 현석은 눈을 빛냈다.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마법사들이었구나!’
마법사들이 큰 마법을 준비한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지금 군대를 둘러싼 마력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데 참여한 마법사의 수가 무려 100명이나 되었다.
근원과 방법을 알았다면 대처하지 못할 게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석이었으니까.
현석은 일단 마력의 흐름에 자신의 마력을 편승시켰다. 그렇게 잠깐의 동화과정을 통해 거대한 마법진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때부터는 순수한 마력 컨트롤 싸움이었다. 이 마법진의 흐름을 미묘하게 비틀어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보통은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무려 100명이나 되는 마법사와 마력으로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현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100명이 부담을 나눠 가진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마력 컨트롤 능력 자체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현석 혼자서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압도할 때는 하더라도 시간은 좀 필요했다. 현석은 거대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군대가 진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력에 대한 집중력을 올렸다.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자신의 의지 하게 두는 데 성공했다. 물론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선 안 된다.
마법진을 깨뜨리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면서 지극히 미묘하게 흐름을 비틀어 적 마법사도 모르게 마법진의 성능을 바꿔버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석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걸 이뤄냈다.
본래 체력을 공급하던 마법진이었는데, 역으로 체력을 빼앗고 민첩성을 줄여 몸을 둔하게 만드는 마법진으로 변화했다.
일단 마법진이 완성되자, 현석은 자신이 손을 떼더라도 마법진을 취소할 수 없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강한 흐름을 만들어 버리면 된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흐름을 말이다.
당연히 그 강한 흐름의 원천은 저 군대가 갖고 있는 마력이었다.
각 병사와 기사, 마법사들이 가진 마력을 뽑아 마법진의 흐름에 얹었다.
애초에 버프형 마법진이었기에 그들의 마력에 간섭하는 것도 마법진을 이용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현석은 그 와중에 총사령관의 마력은 건드리지 않도록 세심히 조율했다.
다른 병사나 기사와 달리 총사령관은 뭔가 좀 달라 보였다. 그만이 진짜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아니, 왠지 그는 플레이어에 더 가까워 보였다. 심안을 통해 보이는 것도 플레이어의 스타일이었다.
[프레도]
프레도라는 이름을 가진 플레이어가 분명했다. 물론 그 플레이어가 이쪽 세상의 플레이어인지, 아니면 지구의 플레이어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현석은 모든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마법진의 흐름을 가속시키며 빠져나왔다.
후우웅!
강렬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맹렬히 흐르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이 그 변화를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얼른 그 변화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군대는 진짜로 사람이 아닌지 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데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현석은 거기까지 확인한 다음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저 쪽이다!”
라이언이 외치며 속도를 높였다. 그 뒤를 나머지 일행이 뒤따랐다.
사실 좀 더 빨리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착해서 싸울 힘은 남겨둬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체력과 마력을 조절하며 달렸다.
“일단 나무에 올라가서 상황부터 확인해요!”
류지혜의 외침에 라이언이 근처에서 가장 큰 나무를 타고 휙휙 올라갔다.
나머지 일행도 따라서 올라가 나무 꼭대기에 섰다.
생각보다 나무나 수풀이 많지 않은 곳이었기에 그런대로 전황이 보였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네요.”
현석이 혼자서 그야말로 날뛰고 있었다.
검에서 나온 길쭉한 마력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었고, 그렇게 휩쓴 다음에는 뚝 떨어져 나와 가장 병력이 많은 곳에 작렬해 주변을 날려 버렸다.
그런 식으로 싸우니 병사들이 뭉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채 현석과 싸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더 진군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쪽이 총사령관인 모양인데요?”
말에 탄 사람이 현석이 싸우는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척 봐도 그가 총사령관이었고, 정말 굉장히 강해 보였다.
라이언이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해볼 만하겠는데?”
일단 라이언이 보기엔 자신보다 좀 못해 보였다. 최근 현석이 신의 파편을 깨울 때 마력에 대한 이해가 한 단계 올라가지 못했다면 좀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서 저 총사령관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여기 발이 묶여 있는 거죠? 이해할 수가 없네요.”
류지혜의 의문은 당연했다.
현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즉, 어느 정도 병력이 남아 현석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그냥 진군하면 된다.
애초에 여기서 현석과 싸우는 건 저 군대의 입장에서 가장 하책이었다.
저렇게 강한 사람과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건 또 무슨 병신 짓이란 말인가.
‘총사령관이 그렇게 멍청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더 이상했다. 총사령관은 다른 병사나 기사와 달리 정말 사람 같았다. 그리고 뭔가 생기가 느껴졌다.
그런 자가 이런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긴, 그냥 보는 걸로는 모르지.’
하지만 잠시 후,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을 강요받은 거였다.
현석에 의해서.
사방에서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땅을 뚫고 스켈레톤들이 솟아났다.
그 중에는 시커먼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다수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자 적군의 총사령관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까도 이렇게 당했음이 분명했다.
꽈과과과광!
채채채채챙!
연달아 폭음이 울렸고,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언데드들과 병사들이 격돌하는 소리였다.
수는 양측이 비슷했지만, 병사들의 힘은 언데드보다 훨씬 대단했다. 또한 언데드 기사보다 적의 기사가 더 강했다.
하지만 아무 피해 없이 막아낼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기사들도 쓰러졌다.
마법사는 아예 없었다. 가장 먼저 전멸한 것이 마법사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죽은 마법사가 다시 일어나 전장 밖으로 몸을 피하더니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현석이 지금까지 아껴두다가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판단해 죽은 마법사를 깨워 일으킨 것이다.
“정말…… 말이 안 나오네요.”
이젠 현석 혼자서 저 정도로 대규모 병력을 혼자 막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마 지금 일으키는 언데드는 이번에 얻은 능력인 모양이었다.
“우리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할 거 같긴 한데…… 저 마법이 좀 신경 쓰이는데?”
“저런 눈 먼 마법에 맞을 정도라면 우리 대장님 따라다니면 안 되죠.”
류지혜의 말에 라이언이 발끈했다.
“저기 있는 총사령관은 내가 맡는다.”
라이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마법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총사령관에게 달려갔다.
꽈앙! 꽈앙! 꽈앙!
옆에 마법이 마구 쏟아졌다. 그 마법이 적병과 언데드를 가리지 않고 박살 내는 광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직 총사령관을 향해 달려갔다.
“으라차차!”
어느새 총사령관 앞에 도착한 라이언은 점프하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쩌어어엉!
총사령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이언?”
라이언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날 알아? 설마 플레이어?”
두 사람 사이에 싸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 전조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