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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9화 (279/326)
  • < 죽음의 마왕 1 >

    쩌적! 쩌적! 쩌저저적!

    죽음의 대지 한가운데 놓인 순백의 알이 갈라지고 있었다. 거미줄 같은 금이 쫙쫙 가더니 껍질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우웅!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진득한 죽음의 마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때마침 현석이 그곳에 도착했다.

    현석은 알의 상태를 보자마자 용을 돌려보냈다. 괜히 싸움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으면 회복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니까.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현석은 가볍게 몸을 푼 다음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검으로 변환시켰다.

    “1분쯤 남았나?”

    알의 상태를 보아하니 1분 정도 후면 박살 나고 안에 있는 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현석은 그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적을 쉽게 상대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 아니겠는가.

    현석은 즉시 생명수를 꺼냈다.

    처음 알이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죽음의 마력을 본 순간부터 생명수를 떠올렸다. 그것이 저 기운과 상극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현석은 엄청난 양의 생명수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촤아아아악!

    사방에 생명수의 비가 내렸다. 물론 생명수를 가장 집중시킨 곳은 순백의 알이었다.

    치이이이이익!

    생명수와 죽음의 마력이 만나 뿌연 수증기가 일어났다. 놀랍게도 틈새를 비집고 나오던 죽음의 마력을 생명수가 그대로 중화시켜 버린 것이다.

    순백의 알이 부서지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생명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현석은 좀 더 많은 생명수를 뿌렸다.

    치이이이익!

    또 뿌연 수증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생명수에 젖은 주변 대지에 생명의 힘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닥을 뚫고 솟아난 싹을 빠르게 키워냈다.

    물론 갑자기 숲이 생겨나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이 이어졌다.

    줄기가 쭉쭉 자라났고, 잎을 피워냈다. 그러면서 더 두꺼워지고 더 높아졌다. 잎도 더 풍성해졌다.

    현석은 알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계속 생명수의 비를 내렸다.

    처음 가져온 생명수의 양이 워낙 많았는지라 이렇게 썼는데도 별로 쓴 티도 나지 않았다.

    사실 다 써도 상관없었다. 근원의 나무로 가서 또 가져오면 되니까.

    처음 생명수를 얻었을 때야 숲의 부족장으로부터 받았지만,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현석은 그때의 현석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까.

    쩌저저저저적!

    어느 순간부터 알이 갈라지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아무래도 안에 있는 놈이 위기감을 느끼고 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현석은 뿌리던 생명수의 양을 더 많이 늘렸다.

    치이이익!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에 안개를 만들었다.

    그러자 순백의 알로부터 폭발적인 죽음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그 마력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 현석은 피식 웃었다.

    아주 지독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꽈아아아앙!

    순백의 알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죽음의 마력이 뿜어져 나갔다.

    어찌나 지독한지 근처에 있던 생명력을 모조리 불태웠다.

    치이이이익!

    자욱한 수증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짙은 안개가 만들어졌다.

    현석은 그걸 보며 남은 생명수를 모조리 뿌려 버렸다.

    쏴아아아아!

    현석의 마력에 휘말려 위로 올라간 막대한 양의 생명수가 비가 되어 내렸다.

    죽음의 대지 전역에 생명수의 비가 내렸다.

    아까 내렸던 정화의 마력이 담긴 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땅과 공기가 농밀한 생명력으로 꽉 채워졌다.

    그렇게 죽음의 대지에 숲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현석이 굳이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현석은 어느 정도 자라난 풀과 나무들이 뿜어내는 숲의 기운을 느끼며 슬쩍 웃었다.

    드디어 죽음의 대지가 진짜 숲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현석은 숲에서 회복력이 두 배로 늘어나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물론 가상의 숲을 소환해 싸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과 진짜 숲에서 싸우는 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진짜 숲에서 싸우면 이 짙은 숲의 기운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어 주니까.

    그리고 어차피 했어야 할 일이었다.

    이 화이트홀은 숲으로 채워진 곳이어야만 한다. 죽음의 대지를 결국 숲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냥 방치하면 언제 숲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이 생명수의 비를 맞고 나면 이곳은 금세 밀림으로 변할 것이다.

    물론 저 앞에 서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놈과의 싸움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온몸이 새까만 자였다. 머리에는 짧은 뿔이 일곱 개나 솟아 있었다.

    각각의 뿔에서 새까만 뇌전이 번득였다. 그 뇌전으로부터 짙은 죽음의 힘이 느껴졌다.

    그냥 온몸이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존재였다.

    “짜증나는군.”

    검은 자, 죽음의 마왕이 짜증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그는 현석에게 시선을 꽂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마왕은 한동안 현석을 노려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생명수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마왕은 굳이 비를 막기 위해 마력을 쓰지 않았다. 그냥 몸으로 비를 맞았다.

    그게 훨씬 타격이 덜했다. 굳이 마력을 써서 비를 튕겨내는 데 들어가는 힘이 더 컸다.

    그냥 몸으로 맞고 회복시키는 게 훨씬 나았다.

    더구나 지금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이럴 때 제법 유용했다.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외부의 타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니까.

    다만 지속적으로 내구력이 깎여 나간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거야 이 싸움을 끝내고 다시 회복시키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곳을 꽉 채우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생명의 기운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죽음의 기운이 전혀 없었다.

    죽음의 기운을 굳이 끌어내려면 땅속 깊숙한 곳을 뒤져야 하는데, 그곳을 뒤지는 데 들어가는 힘이 거기서 뽑아내는 데 들어가는 힘보다 못하니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계속 내리는 생명수의 비가 지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죽음의 힘을 계속 없애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곳은 죽음은 없고 생명만 가득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 비, 계속 내리게 할 건가? 이대로라면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국은 멎는다.”

    현석도 조화와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 가지 힘이 일방적으로 자라면 결국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 조화를 적절히 메워줄 수 있는 존재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죽음의 마왕?”

    현석의 말에 죽음의 마왕이 씨익 웃었다.

    “그래. 날 아는 모양이지? 그럼 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도 잘 알겠구나. 영원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기 싫으면 그냥 자결해라. 그럼 네 영혼은 건드리지 않으마.”

    현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마왕이 하는 말을 믿으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마왕이든 마족이든 그냥 하는 말을 지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키게 하려면 뭔가를 걸고 해야 한다.

    “네 영혼과 마력을 모두 걸고 약속하면 그렇게 해주지.”

    “뭐?”

    죽음의 마왕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생명수의 비가 증발하며 사방으로 수증기를 내뿜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왕이 분노하는 걸 표현하는 듯해서 더 괴기스러웠다.

    “감히!”

    죽음의 마왕이 그대로 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어떤 예비동작도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죽음의 마왕도 이번 기습에서 분명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이걸로 생명수의 비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꽈아아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마력의 폭풍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강렬함에 비해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부분 죽음의 마력을 통한 충격이었기에 생명수의 비가 그것조차 어느 정도 중화시킨 것이다.

    마왕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한 번의 충돌 후 뒤로 훌쩍 물러난 마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현석을 노려봤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검을 촥 털었다.

    “이 비, 정말 짜증나는군.”

    본래 죽음의 마왕은 이렇게 싸우며 주변을 죽음으로 물들인다. 그렇게 죽음의 대지를 만들어 그곳으로부터 힘을 얻어내는데, 지금은 생명수의 비 때문에 그게 안 되니 짜증이 났다.

    현석은 생명수의 비가 곧 멈춘다는 걸 알기에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죽음의 마왕은 정말로 강력한 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싸움으로 인해 이곳 숲이 망가지는 것이었다. 생명수의 비가 멈추기 전에 마왕을 끝장내면 숲을 최대한 많이 보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까지 생각한 현석은 빠르게 마왕에게 돌진했다. 현석의 검을 중심으로 무수한 마력패턴이 만들어져 맴돌았다.

    탁탁탁탁!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현석의 발이 바닥을 짚을 때마다 그곳에 마력패턴이 새겨졌다.

    어느새 현석의 검이 마왕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마왕은 그것을 가볍게 쳐냈다.

    꽈앙!

    “크윽!”

    마왕이 당황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검과 검이 격돌하는 순간 현석의 검 주변에 맴돌던 마법진이 일제히 발동한 것이다.

    모든 마법진에서 정화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화의 마법은 죽음의 마력을 다루는 마왕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마왕이 비틀거린 순간 그 빈틈을 현석의 검이 파고들었다.

    슈가각!

    마왕의 옆구리가 길게 갈라졌다. 마왕은 황급히 뒤로 빠져나갔다.

    갈라진 옆구리에서 시커먼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석은 그걸 보면서도 전혀 동요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마왕의 마력을 소모시켰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당분간 저렇게 소모된 마력을 회복할 길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보면 마왕의 힘이 급격히 약해질 테니까.

    현석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정면으로 달리지 않고 옆으로 크게 휘돌아 비스듬하게 달렸다.

    탁탁탁탁!

    달릴 때마다 바닥에 마력패턴을 찍는 건 잊지 않았다. 현석이 발로 찍은 마력패턴은 순간 빛을 내뿜고 사라졌다.

    한 번 마력패턴을 찍을 때마다 현석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나중에는 마왕이 다급히 검을 들어 올렸을 정도로 빨랐다.

    현석이 마왕의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크윽!”

    마왕은 또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지 않았다면 아마 못 막았을 것이다.

    마왕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번엔 정화의 마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워낙 힘과 속도 자체가 강하고 빨라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마왕은 흠칫한 표정으로 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게 조금 늦었다.

    슈가각!

    오른쪽 허벅지를 깊이 베고 말았다.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이다.

    마왕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정면에서 치고받으면 현석의 공격이 아무리 빨라도 못 막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도 죽음의 마왕, 힘과 속도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쩌저저저정!

    마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점점 현석의 검을 막기가 어려웠다. 현석은 그저 힘과 속도에 의존해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교묘한 속임수가 무수히 섞여 있었고, 가끔 예측 불가능한 검로를 섞어서 쓰는데, 그때마다 진땀을 빼야만 했다.

    실제로 힘과 속도는 마왕 쪽이 월등한데도 계속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마왕이 이를 악물고 검에 막대한 힘을 밀어 넣었다.

    꽈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현석과 마왕이 각자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마왕이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현석을 밀어낸 이유는 현석의 몸 주위로 떠오르던 무수한 마법진을 봤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정화의 마법진을 쏟아내는 마법진이었다.

    아마 방금 저것들이 동시에 폭발적으로 정화의 마력을 쏟아냈으면 정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화의 마력에 타격 받는 게 아니라 그 빈틈을 노린 현석의 일격에 당했으리라.

    그것만으로 마왕이 죽거나 패배할 리는 없지만, 향후 싸움에 안좋은 영향을 미칠 건 분명했다.

    “제법이군. 정말 제법이야. 내가 잘못 봤다는 걸 인정해야겠어.”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석을 노려봤다. 마왕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마왕은 자신이 가진 근원의 마력을 쓰기로 했다. 죽음의 마왕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마력이기에 함부로 써선 안 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현석은 갑자기 거대해지는 마왕의 기세와 마력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처음과 똑같은 담담한 표정과 눈빛을 유지했다.

    마왕은 그게 불만이었다. 어떻게든 저놈의 표정을 일그러뜨리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보자.”

    마왕이 검을 꽉 움켜쥐었다. 검에서 피어나는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힘을 다 끌어 모은 마왕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현석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마왕이 보기엔 한없이 불길했다.

    “준비는 너만 끝난 게 아니야.”

    그 말과 동시에 현석이 손가락을 튀겼다.

    따악!

    < 죽음의 마왕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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