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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8화 (278/326)
  • < 여섯 번째 파편 2 >

    세상이 자욱한 안개로 꽉 채워졌다. 노인이 폭발했지만 피나 살점이 튀지는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안개로 이루어진 사람이 폭발한 것 같았다.

    여섯 번째 파편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먹었을 때 깨어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날 기다렸다는 건데.’

    현석은 주술력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안개에 휩싸인 채 생각을 정리했다.

    노인, 신의 파편은 현석을 기다렸다.

    ‘신의 파편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람을 기다린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자신이 첫 파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퀘스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냥 현석 자체를 기다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슬슬 시작해야겠군.’

    현석은 상념을 접고 주변을 둘러봤다. 안개가 어찌나 자욱한지 근처에 있던 일행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존재는 느껴졌다. 아무리 안개가 특별해도 현석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일행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현석의 감각에 잡힌 일행들의 상태도 딱 그랬다. 다들 당황하고 있었다.

    현석은 팔을 한 차례 휘저었다. 현석의 팔에서 비틀린 마력, 주술력이 뿜어져 나갔다.

    그 주술력은 주변에 채워진 주술력의 안개에 간섭해 그것들을 쭉 밀어냈다.

    이내 거대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마치 비눗방울 같은 공간 안에 현석과 일행이 서 있었다.

    다들 현석을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며 달려갔다.

    “젠장! 이건 대체 뭐야? 이 안개 정말 이상하다고!”

    라이언이 불만부터 토해냈다. 물론 현석의 반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현석은 가운데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해서 그런지 아주 익숙하고 능수능란했다.

    다만 이번이 다른 점은 마력이 아니라 주술력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거나 저거나 현석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사방의 마력이 움직여 그 근원을 향해 뻗어나갔다.

    ‘노인이 아니었어. 그건 그저…… 사념 같은 거야.’

    노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건 그저 파편의 사념에 불과했다. 진짜 신의 파편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이 거대한 공간을 메운 그 마법진과, 그 안에 흐르고 있는 물이었다.

    현석의 의념이 지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마법진에 닿았다.

    콰아아아!

    자욱한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마법진에 있는 물에 흡수되었다.

    그러니까 근처에 흐르는 강에 모든 안개가 빨려 들어갔다는 뜻이다.

    근처에 있던 나무와 수풀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졌다.

    숲의 모든 나무와 풀이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강 근처에 있던 것들만 그랬다.

    어쨌든 이 숲을 유지하는 물도 모두 그곳에서 기인한 것, 근처의 수분을 싹 빨아들이고 있으니 식물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강까지의 시야가 확보되었다.

    현석은 직감적으로 저 강이 이번 파편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은 일단 파편을 깨우는 동안은 움직인 적이 없었다. 파편과 동화되어 주변 모든 세상과 마력을 관조하고, 각성을 통해 나타난 결과에 의해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그 자리에 그냥 있어선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현석은 눈을 뜨고 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석이 움직이자, 일행도 조심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직감과 예감이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내 현석은 강 앞에 도착했다.

    강물은 마치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곳곳에 소용돌이가 보였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파도가 치고 있었다.

    현석은 지하로 스며드는 의념을 모조리 회수한 다음 그것을 강에 투영시켰다.

    그게 정답이었다.

    촤아아악!

    강물이 위로 쭉 치솟아 오르며 물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숲 곳곳에서 물줄기가 쫙쫙 치솟아 올랐다. 마치 간헐천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런 현상이 숲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었다.

    현석의 의념과 마력이 물에 서서히 동화되어갔다. 그렇게 솟아난 물이 곳곳에 장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장막에 마력패턴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물로 이루어진 마력패턴이 숲 전체를 뒤덮었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이 현석 일행을 덮쳤다. 그들은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버티긴 버텼다. 그렇게 끝까지 버텨내기만 하면 분명히 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버티는 와중에도 다들 눈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봤다.

    물의 장막이 곳곳에 펼쳐지고, 위에서 줄줄 흐르는 물의 벽 위로 특별한 문양이 새겨지는 광경은 그냥 보고 있어도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현석 일행은 마력에 대한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자체가 큰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물의 장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력패턴의 집합체가 완성되었다.

    이걸 만들어 내는 데 지하수로에 있던 물 대부분이 사용되었다.

    이제 지하수로에는 바닥에 잘박하게 깔릴 정도의 물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정도 물만으로도 지하수로 마법진은 충분히 작동 가능하니까.

    사실 마법진의 작동 여부는 이곳 세상에서 상당히 중요했다. 지속적으로 마력을 주술력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애초에 사람들이 가지는 힘의 근원이 주술력뿐이었다.

    즉, 갑자기 주술력이 사라지면 숲을 활보하는 마수들을 상대할 방법도 함께 사라지는 셈이 된다.

    마법진이 사라지면 주술력도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주술력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인간들이 마력에 적응하는 시간이 훨씬 느릴 것이 뻔했다.

    한데 어떻게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숲의 상공은 온통 물의 마법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현석의 의념이 그 마법진에 고스란히 깃들었다.

    현석은 순식간에 의식이 확장되는 걸 느꼈다. 신의 파편을 깨울 때마다 느끼던 바로 그것이었다.

    현석의 시선은 하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광활한 숲이 보였고, 그 숲을 뒤덮은 물의 마법진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물의 장막이 그저 아무렇게나 툭툭 떠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정밀한 계산에 의해 딱 제 위치를 찾고 있었다. 물의 마법진은 숲 지하에 수로를 이용해 만든 마법진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현석의 시야가 더 높이 올라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그 구름은 마력의 물이 만들어낸 구름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구름이 이동했다.

    현석은 이 바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확인했다.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물의 마법진이었다.

    그곳에서 엄청난 주술력이 느껴졌다. 그 주술력이 구름에 지속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마 이 구름을 이용해 뭔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 뭔가를 위해 마법진이 구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석의 시야가 구름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절벽을 막고 있는 거대한 젤리웜을 발견했다.

    ‘목표가 저 젤리웜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구름의 규모가 너무 광범위했다. 이 정도라면 저런 젤리웜 수백 마리를 동시에 뒤덮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석의 의념이 구름을 모두 훑었다. 구름에 흐르는 주술력이 느껴졌다. 그 흐름은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고, 그 패턴을 분석하는 건 현석의 전문분야 중 하나였다.

    현석은 차근차근 구름 속 주술력의 흐름을 분석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현석의 시야가 미치는 범위가 점점 넓어져 이내 절벽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절벽 너머에는 엄청난 언데드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강력했다.

    언데드들이 품고 있는 죽음의 마력이 하나하나 굉장한 수준이었다.

    ‘저 정도면…… 흑시 정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겠는데?’

    그보다 현석은 이 언데드들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예전 분명히 흑시 쪽에서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저곳에서 특별한 아티팩트들을 많이 얻었다고 했다.

    한데 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시 언데드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시야가 더욱 확장되었다. 언데드들이 나타나는 광경이 군데군데 보였다.

    놀랍게도 언데드들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퍼진 죽음의 마력이 점점 농밀해지면서 땅 깊은 곳에 있는 시체나 망령들이 언데드가 되어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 있는 시체나 망령일수록 더 오랫동안 죽음에 담겨 있었기에 그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죽음의 마력이 필요했다.

    더 많은 죽음의 마력을 품고 있으니 훨씬 강력한 게 당연했고 말이다.

    그런데도 죽음의 마력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죽음의 마력을 뿜어내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대체 그게 뭐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저곳은 이제 모조리 쓸려 나갈 테니까.

    쏴아아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젤리웜은 물론이고 죽음의 대지 전역에 내렸다.

    그냥 비가 아니라 정화의 마력으로 꽉 채워진 비였다.

    언데드들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다시 죽음으로 되돌아가 비에 씻겨 땅으로 스며들었다.

    당연히 그 과정은 현석의 감각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현석은 온몸에 차오르는 마력 파동의 희열에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마력 파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현석의 레벨을 폭발적으로 높였다.

    벽이고 뭐고 없었다.

    땅 위의 언데드를 모조리 정화해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도 모자라 정화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의 시체와 망령들도 정화해 나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젤리웜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레인보우 엘릭서의 제조법을 알아냈으니 젤리웜의 몸체가 필요 없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아까울 뻔했다.

    그렇게 킹 젤리웜까지 소멸해 버렸다.

    킹 젤리웜의 역할은 죽음의 대지에 퍼진 죽음의 마력이 숲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대지에는 죽음의 마력이 없으니 그렇게 될 염려는 없었다.

    대신 숲의 농밀한 생명력과 주술력이 죽음의 대지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킹 젤리웜은 죽음의 마력만 막고 있는 게 아니라 주술력도 막고 있었으니까.

    죽음의 대지에는 여전히 정화의 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위로 숲의 주술력이 스며들었다.

    땅에서 싹이 투두둑 움트기 시작했다.

    죽음의 대지가 생명의 대지로 뒤바뀌고 있었다.

    현석은 이제 끝날 거라고 여겼다. 보통 신의 파편을 깨울 때, 이 정도면 그 과정이 끝나고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한데 이번엔 좀 달랐다.

    처음 시작부터 다르더니 끝도 달라진 것이다.

    현석의 의념이 그대로 지하로 빨려 들어갔다. 현석은 그 순간 의념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직감했다.

    그래서 의념을 끊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석의 의념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순백의 알에 닿았다.

    쩌저저적!

    알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틈 사이로 어마어마한 죽음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석은 그제야 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순백의 알은 안에 있는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한 정화의 힘이 응축된 장벽이었다.

    그리고 지하수로 마법진은 이 정화의 장벽에 주술력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였고 말이다.

    이제 신의 파편이 깨어나면서 이곳으로 오던 주술력이 대폭 줄어들게 되어 정화의 장벽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그 얘기는 이 순백의 알이 봉인하고 있던 존재가 정말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석은 순백의 알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통해 죽음의 대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죽음의 대지에 끊임없이 공급되던 죽음의 마력이 바로 이 순백의 알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순백의 알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미처 차단하지 못한 여분의 마력을 그쪽으로 보내도록 말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한계를 넘어서며 그쪽으로 가는 죽음의 마력이 대폭 늘어났고 말이다.

    현석은 직감적으로 지금 저걸 그냥 보고만 있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저놈이 이대로 저 알을 깨고 나타나면 거대한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진은 위에 있는 숲을 모조리 파괴하겠지.

    현석의 의념이 순백의 알에 새겨진 마력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순식간에 변형시켰다.

    후우우웅!

    순백의 알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금이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현석은 당황하지 않고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후웅!

    순백의 알이 지하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미리 준비된 길을 통해 빠져나갔다.

    죽음의 대지로.

    현석의 의념이 순식간에 죽음의 대지에 놓인 순백의 알로 이동했다.

    쩌저저저적!

    금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현석은 그 순간 눈을 떴다.

    일행이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현석은 그대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용을 불러냈다.

    콰우우우!

    현석을 태운 용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죽음의 대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 광경을 남은 일행이 멍하니 올려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 여섯 번째 파편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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