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번째 파편 1 >
현석은 자신을 신의 파편이라 주장하는 노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표정이나 눈빛은 더없이 담담했지만, 사실 속마음까지 담담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노인이 한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신의 파편에 대해 아는 게 있는 모양이지?”
현석이 떠보듯 묻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내가 신의 파편인데 그걸 모를까.”
“사람은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제일 모를 때가 많거든.”
노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지. 합리화를 위해 자신을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말이야.”
현석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극도로 집중한 감각을 통해 노인이 가진 마력의 흐름까지 세세히 살폈다.
하지만 노인은 정말 인간이었다. 적어도 현석의 지식이나 감각 안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날 계속 지켜본 거지?”
“느낌이 왔거든. 딱 너라고.”
“무슨 느낌을 말하는 거지?”
노인이 씨익 웃었다.
“날 찾고 있을 거라는 느낌. 아니, 확신. 왜, 내 확신이 틀렸나?”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일 이 노인이 정말로 신의 파편이라면 그의 확신은 정말로 정확한 것이니까.
노인은 현석 뒤에 있는 일행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잠시 대화의 시간이 필요할 거 같은데, 혹시 저들도 데려갈 생각인가?”
현석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만일 지금 신의 파편을 깨워야 한다면 저들과 함께 하는 게 맞다. 현석이 바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듣는 자리라면 그건 현석 혼자여야만 한다.
신의 파편과 관련된 퀘스트는 오직 현석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나마 파편이 깨어나는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도 굉장한 배려였다. 아마 저들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 자리를 마련해 볼까?”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 지팡이를 살짝 들었다가 바닥을 쿡 찍었다.
우우웅!
지팡이가 박힌 바닥을 중심으로 새하얀 동심원이 나타나 사방으로 쫙 퍼져 나갔다.
강렬한 주술력의 파동이 현석과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주술력은 일정 반경이 되자 그대로 위로 치솟아 올랐다.
우우웅!
나직한 진동과 함께 주술력으로 이루어진 반구형 막이 생겨났다.
현석과 노인은 자연스럽게 그 막 안에 자리했다.
일행이 당황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현석을 찾는 모습이 보였다.
“어때? 제법 쓸 만하지? 시야와 감각을 모두 차단해 버리는 가림막이지.”
현석은 이 투명한 막을 보며 주술력에 대한 걸 생각했다.
주술력은 마력을 비틀어 만들어낸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으로는 좀 힘들고 복잡하게 가야 할 길을 단숨에 질러 갈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또한 그 역도 성립한다. 마력으로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일인데, 그걸 주술력으로 하려면 아주 복잡한 길을 가야만 한다.
지금 노인이 펼친 이 가림막이 그렇다. 이걸 마력을 통해 펼치려면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술력으로 하니 훨씬 간단해졌다. 주술력을 이용하는 건 여러 기능이 복합적으로 발현되어야 할때 편한 듯했다.
기능 몇 개를 빼거나 덧붙여 세밀한 조절이 필요하게 되면 단연 마력이 유리했다.
어쨌든 현석은 주위를 둘러싼 가림막에 들어간 주술을 분석하며 노인을 쳐다봤다.
주변에 흐르는 마력을 분석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건 이제 굳이 신경 쓰고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자, 먼저 궁금한 게 있으면 하나만 물어봐.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껏 대답해주지.”
현석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물었다.
“신의 파편을 다 깨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호오. 난 나에 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조금 예상 밖이군. 날 어떻게 해야 파편이 깨어나는지 궁금하지 않나?”
현석은 노인의 말에도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내 노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말을 꺼냈다.
“별 거 없지. 신의 파편을 모두 깨우고 나면 신이 잠든 곳으로 가는 길이 열릴 뿐이니까.”
“그게 다라고?”
현석이 눈을 번득이며 다시 물었다. 그게 다일 리가 있는가. 파편 하나를 깨울 때마다 커다란 변화가 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인데 말이다.
“뭐……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하겠지.”
“그 약간의 변화라는 것이 이곳 화이트홀이 이루는 세상과 지구가 연결되는 것인가?”
그 말에 노인이 씨익 웃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착각?”
“화이트홀과 지구가 서로 다른 곳이라고 생각되나?”
“그럼 여기가 지구라고?”
현석의 표정에 살짝 놀란 감정이 드러났다. 설마 여기가 지구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질감이 컸다.
“원래는 여기도 지구였다는 뜻이야. 비록 지금은 이렇게 따로 분리되었지만 말이야.”
현석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만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계는 지구와 하나로 합쳐지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훨씬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니, 어쩌면 내가 굳이 신의 파편을 깨우지 않아도 어차피 그 흐름에 올라탔을지도 모르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애초에 세상의 흐름이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내가 굳이 그걸 얘기하지 않은 건 어차피 파편을 깨우지 않아도 그렇게 될 일이기 때문이지.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나? 그게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말이야.”
현석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파편을 깨우는 건, 그저 그 흐름을 조금 더 가속시키는 것에 불과해.”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가속이 뭔가 세상의 역사를 뒤틀고 있었다. 지금은 예전에 현석이 살았던 그 세상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신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건…… 결국 내가 신을 만나야 한다는 건가?”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만난다기에는 좀 그렇고…… 그냥 가서 한 번 보는 거지. 지금은 잠들어 있으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잠든 신을 만나면 당연히 깨워야 할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테니까.
현석의 생각을 알아차린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든 신을 꼭 깨울 필요는 없어. 그저 가서 살펴보기만 하면 충분해.”
“살펴보라고? 뭘?”
“신이 진짜로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죽은 건지.”
상당히 충격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현석은 거의 변화 없는 담담한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파편이라면서 그건 모르나보지?”
“파편이니까 모르지.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으니까. 이름이 파편일 뿐이지 그렇다고 신의 부속품 같은 걸로 취급하면 곤란해.”
그렇게 여길 생각도 없었다. 척 봐도 독립적인 존재 아닌가. 그저 신과 유기적인 소통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된다고 하니 살짝 실망했을 뿐이었다.
“깨워도 소통은 안 되는 모양이지?”
“깨어나는 건 그저 내 힘에 스위치를 넣는 것과 비슷한 일이야. 그것과 소통은 별개의 문제지. 그러니 신으로 가는 길을 열어서 생사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
“부탁이라…….”
이게 과연 부탁인지 강요인지는 좀 혼동되는 문제였지만 일단은 넘어갔다. 그게 부탁이든 강요든 무조건 할 생각이었으니까.
현석은 노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지하수로를 이용한 마법진. 네가 만든 건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만들었지. 주술력이 좀 필요했거든.”
현석은 노인의 대답을 들으며 그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만난 신의 파편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내재된 힘이 턱없이 모자랐다.
노인이 가진 힘 자체는 강력했지만 그건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였다.
다른 신의 파편과 비교하면 비교 자체가 미안해질 정도로 까마득한 차이가 났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 내가 신의 파편 같지가 않나?”
노인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척 보고 아는 걸 보니 제법 많은 파편을 깨운 모양이군. 이거 아주 든든해. 난 내가 처음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현석은 노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진짜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알아낼 것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예를 들면 시간 회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노인은 현석의 질문을 받고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현석은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렇게 조각조각 찢어지고 분리된 이유 말인가?”
현석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의 침공 때문이지.”
“마족?”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야. 그런 놈들이 마계와 이어진 차원의 장벽을 찢고 쳐들어왔지.”
차원의 장벽이라는 말에 던전이 떠올랐지만 현석은 입을 다문 채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인간들이 나서서 전쟁을 치렀지. 하지만 제대로 싸움이 될 리가 있나. 형편없이 당하고 말았어. 그때 신이 개입한 거지.”
현석은 문득 투명 던전에 연결된 마계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많은 마족들과 싸웠다.
‘그 마족들이 그렇게 강한 거였나? 하지만…….’
마족들이 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다.
현석이 경험한 인간들은 고작 황궁에 있던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의 힘은 웬만한 마족은 닥치고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강했다.
그런 강자들이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할 리 없으니 그걸 토대로 유추해보면 마족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마족인가?’
현석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에도 노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신이 개입했어도 마족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야.”
“신도 못 막았다고?”
현석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내가 겪은 마족은 그리 강하지 않던데? 신의 파편이 가진 힘만으로도 그런 마족 수백만은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닌가?”
“마족을 겪었다고? 아, 틈새에 낀 마족을 말하는 건가? 그놈들은 마계의 힘이 끊어지는 바람에 약해진 마족이야. 진짜 마족이랑은 좀 다르지.”
노인은 그 뒤로도 마족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신조차 막아내지 못한 놈들이라는 것이 뭔가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마족이 가지는 힘의 근간은 마계로부터 나온다. 한데 그들이 머무는 틈새는 마계의 힘이 끊어진 공간이었다.
그 얘기는 존속을 위해 지속적으로 힘을 소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힘이 약화되는 것이다.
현석이 상대한 마족들은 그렇게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족이었다.
‘그럼 원래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현석은 그제야 노인이 한 말들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그 정도라면 이 정도 힘을 가진 문명이 마족들에 의해 멸망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마족만 있었으면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마왕이 개입했다는 거야. 하긴, 당연한 일이지. 마왕의 힘이 아니라면 차원의 장벽을 누가 찢겠어?”
“마왕도 이쪽으로 넘어온 겁니까?”
“거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되었지.”
노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신이 나서서 마왕을 죽인 거야. 그리고 그 대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
현석이 눈을 빛내며 노인을 쳐다봤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얘기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왕은 그냥 죽인다고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말이 마왕이지 사실은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지. 그래서 제대로 죽이려면 조각조각 해체해서 흩어 놔야 해.”
현석은 거기까지 듣다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한데 대체 마족이 왜 침공한 거지? 마계가 아니면 힘도 못 쓰는 놈들이라면서.”
노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그게 의문이야. 대체 그놈들이 여기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쳐들어왔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시작한 대화였는데, 오히려 새로운 의문을 얻었다.
노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마왕을 조각내 전혀 다른 공간에 흩어 놓는 과정에서 신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그럼…….”
“그래. 여덟 개의 조각에 힘을 담아 격리된 공간을 만들었어. 그 공간에 마왕의 조각을 보관한 거지.”
현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공간이 변형된 건가?”
“맞아. 마왕의 힘을 너무 얕봤지. 공간이 변형되었고, 신의 파편들은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다시 공간을 나누는 걸 반복했지.”
그 각각의 공간에 마왕의 조각들이 나뉘어 보관된 것이다. 마계와의 연결이 끊어져 힘을 계속 소모할 수밖에 없는 공간에 말이다.
현석은 어렴풋이 이것이 바로 화이트홀을 비롯한 던전의 생성 원인이 아닐까 여겼다.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야.”
노인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쳐다봤다.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 알 때문인가?”
노인이 깜짝 놀라 현석을 바라봤다.
“알고 있었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주술력을 보내는데 모르길 바랬나?”
노인이 피식 웃었다.
“하긴. 아무튼 이제 시간이 없어. 그놈이 깨어나려고 하니까.”
“깨어난다고?”
“곧 알게 될 거야.”
노인은 그 말과 동시에 가림막을 제거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현석의 일행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노인은 그 광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폭발했다.
꽈앙!
< 여섯 번째 파편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