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276화 (276/326)
  • < 숲의 왕 6 (11권 끝) >

    현석 일행은 엄청난 속도로 숲을 내달리고 있었다.

    쫓아가는 자들은 전부 죽을 맛이었지만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그저 달리기만 했다.

    솔직히 그럴 기운도 없었다. 입을 열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아서 그저 이를 악물고 현석을 쫓아 달리는 데 집중했다.

    신기한 것은 한계를 넘어도 벌써 넘은 것 같은데 묘하게도 쓰러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은연중에 현석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현석이 그냥 무작정 일행을 몰아붙여 강행군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항변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계속 달리니 처음 메디나툰으로 갈 때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목적지, 그러니까 주술력이 깃든 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속도를 유지한다면 하루 안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달리던 일행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용을 불러서 타고 가면 안 되나? 그럼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현석의 등을 보고 달리던 일행은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설마 자신이 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건 아닐 거야. 암, 그렇고말고.’

    어쨌든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달린 일행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이나 마수조차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텅 빈 숲을 질주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하툰 족 근처에 있던 바로 그 강이었다.

    강을 내려다보던 일행들이 묘한 표정으로 강과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예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강에…… 주술력이 흐르네요?”

    류혜연이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강물을 유심히 살폈다.

    애초에 여기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가 이 강의 쓰임새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메디나툰의 지하에서는 강이 흐르는 부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직접 와서 두 눈 뜨고 확인하는 것이다.

    현석은 강을 따라 걸으며 안을 유심히 확인했다. 그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직접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은 그 자체로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그것도 주술력을 이용하는 마법진이었다.

    이렇게 직접 마법진을 확인하고 거기에 흐르는 주술력을 파악하고 나니 그 역할이 제법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정화였군.’

    이 강을 통해 숲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마법진에 쌓인 혼탁한 기운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강에 흐르는 물은 지하수를 흐르는 물과는 좀 달랐다.

    일단 지하수로를 통과해 강으로 들어온 물에 깃든 주술력은 주술력이라기보다는 마력에 좀 더 가까웠다.

    그걸 강을 통해 정화해 다시 주술력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주술력에 대한 집착이 보이는 마법진이었다.

    이러니 이렇게나 많은 주술력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화이트홀을 채우고 있어야 할 것은 순수한 마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강을 확인하고 나니 더 큰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게 정화까지 하면서 만들어낸 그 막대한 주술력이 집중되는 순백의 알은 대체 뭘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했다.

    강을 끝까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워낙 길기도 했거니와 갈수록 지형이 험난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강의 끝이 세상의 끝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정말 그럴 것이다. 이 강의 끝은 이 화이트홀의 벽으로 이어져 있을 테니까.

    아마 강은 그 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신기한 세상이야.’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현석은 강을 확인하는 건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몸을 돌린 현석은 하툰 족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때 의문의 시선을 보내던 자가 아직도 하툰 족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으로선 그곳부터 방문하는 게 순서였다.

    ‘왠지…… 그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들고.’

    좀처럼 틀리는 법이 없는 그 예감 말이다.

    * * *

    “우리는 굳이 안 따라와도 되지 않았을까?”

    묵묵히 현석을 따라가던 라이언이 불쑥 말했다. 그 말에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쪽의 일이 훨씬 더 급할 것 같았다. 현석이야 혼자 있든 같이 있든 별 상관이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쩌면 이건 그냥 시간낭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현석의 도움을 받아 뭔가 변화가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그렇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기에 다들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우리 그냥 메디나툰으로 돌아갈까? 길은 대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현석에게 물었다. 하지만 현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덧붙이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어조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모든 불만이 쑥 들어가 버리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일행은 좀 의아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솔직히 그냥 가라고 할 줄 알았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현석의 판단이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일행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만을 접고 다시 묵묵히 현석을 따라갔다.

    사실 현석이 일행을 달고 다니는 건 일종의 감이었다. 왠지 이번 일은 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든 거지?’

    현석은 문득 자신이 지금 이 동료들에 대한 믿음이 제법 굳건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굳건한 믿음이 지금의 마음이 생겨나게 만든 원인인 듯했다.

    ‘그 얘기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현석의 예감이 말하는 대로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일행을 달고 하툰 족을 향해 걸어가던 현석은 갑자기 느껴지는 이질감에 걸음을 멈추고 팔을 슥 들었다.

    현석의 신호를 본 일행도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현석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이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건 정말 알아차리기가 어렵군.’

    이 이질감의 정체는 당연히 마력이었다. 아니, 주술력이었다.

    주술력을 가진 누군가가 현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데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러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솔직히 의외였다. 마력의 주인인 현석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라면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필시 평범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현석이 가진 마력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은 이제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물론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고 해서 그게 끝일 리는 없다. 아마 그렇게 진화한 다음에도 지금처럼 완숙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현석이 마력에 대해 굉장한 장악력을 갖고 있고, 상당히 민감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현석이 마력을 통한 이질감을 빠르게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석은 경각심을 끌어올리며 마력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석은 결국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현석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면서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 마력을 주입해 검으로 변형시켰다.

    일행은 그런 현석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현석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점점 강해졌다.

    그러자 저 멀리 서 있는 나무 뒤에서 노인 한 명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구불구불 휘어진 긴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몇 살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이 늙은이를 그 흉측한 검으로 작살을 내려고 하는 겐가?”

    노인의 말에 현석이 걸음을 멈추고 검을 팔찌로 되돌렸다. 이질감의 근원이 바로 저 노인이었다.

    현석은 노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불명확했다. 주름이 너무 많고 허리가 구부정한데다가 옷도 너무 펑퍼짐해서 그걸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날 계속 지켜본 이유가 뭐지?”

    “그냥 신기해서 잠깐 훔쳐본 것뿐이라네. 그저 늙은이의 소일거리라고나 할까?”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이 아니다. 내가 처음 이 화이트홀에 들어왔을 때부터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그렇지 않은가?”

    현석의 물음에 노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걸 알고 있었나?”

    “그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살펴보는데 모르길 바랬나?”

    노인이 클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현석에게 다가갔다.

    “내 정체가 궁금하지?”

    현석은 대답대신 목걸이를 쥐고 거칠게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하툰 족의 족장, 싸킨이 현석에게 준 하툰 족의 신물이었다.

    “이것도 네가 준 거지?”

    노인의 눈이 또 한 번 커다래졌다. 물론 눈이 주름에 뒤덮여 있어서 커졌는지 아닌지 알아보기는 좀 힘들었지만 말이다.

    “대체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지 궁금하군.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이것을 통해 날 지켜봤다는 것도 알고 있지.”

    “정말 할 말이 없군. 내가 자넬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한데 그걸 알면서 왜 그걸 안 버리고 갖고 있었나?”

    현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당신이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았을 것 같아? 설마 그냥 짐작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가?”

    노인은 그 말에 정말로 크게 감탄했다.

    “호오. 설마 목걸이에 걸린 주술을 역추적했나? 그게 가능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현석의 표정은 다시 담담해졌다. 그리고 노인에게 목걸이를 휙 던졌다.

    “이제 말해봐. 대체 날 왜 지켜본 거지? 그리고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노인은 빙긋 웃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내 정체를 알려주는 게 대화하기 편하겠군.”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난 신의 파편일세.”

    장내에 자욱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크윽.”

    마지막 남은 숲그림자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가슴에서는 연신 피가 꿀렁꿀렁 쏟아졌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처참했다. 아니, 그의 동료들이 처한 상태만 처참했다.

    라일라와 무팔룬을 감시하기 위해 동원된 모든 숲그림자들이 당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절반은 숨이 끊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그와 마찬가지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바닥은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물론 그 모든 피는 숲그림자로부터 나왔다.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무팔룬과 라일라 주변에 있던 전사들은 하나하나가 숲그림자를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그들은 그냥 강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건 대전사에게나 가능한 줄 알았다. 한데 이곳에 있던 모든 전사들이 대전사와 비슷했다.

    사실 대전사와는 좀 격차가 있었지만 숲그림자들이 보기엔 그랬다.

    “크으으.”

    마지막 남은 숲그림자가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그렇게 모든 숲그림자가 끝장났다.

    그 광경을 라일라와 무팔룬이 무거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왕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네요.”

    “일단 소문을 흘렸으니 그렇게 될 겁니다.”

    숲그림자의 주인인 네 가문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소문을 잔뜩 흘렸다. 아마 그들이 왕이 될 확률은 이제 없을 것이다.

    애초에 현석이 일을 벌일 때, 여기까지 염두에 두었기에 무팔룬과 라일라는 그저 계획대로만 하면 됐다.

    그리고 이렇게 결과가 나왔다.

    “결국…… 누구도 왕이 될 수 없게 되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 사람이 이걸 원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후련함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전 왕이 될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뿐이었죠. 그러니 이제 와서 아쉬울 것도 없어요.”

    무팔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라일라님 답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숲의 전사들을 바라봤다.

    “이제…… 저들이 바라는 숲의 왕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라일라의 말에 무팔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숲의 왕을 기다리는 건 저들뿐이 아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예감이 맞았다. 무팔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 숲의 왕 6 (11권 끝)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