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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5화 (275/326)
  • < 숲의 왕 5 >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512명의 새로운 각성자가 탄생했다.

    무팔룬의 예감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숲의 전사들은 무팔룬이 숲의 시험에서 견뎌낸 것과 정확히 같은 시간 동안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다들 진이 빠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늘 하루는 푹 쉬게 하고 내일 아침부터 숲의 무예를 가르치도록.”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런 현석에게 무팔룬이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랬소!”

    현석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섰다. 무팔룬은 그런 현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나와 똑같은 시간을 견디게 했소?”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현석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한계니까.”

    “한계?”

    “네가 견딘 만큼이 딱 숲이 전사들에게 줄 수 있는 힘의 한계다.”

    “그럼…… 내가 그 한계까지 견뎌냈기 때문에 대전사가 된 거였소?”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은 버텨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어떤 대전사라도 그보다 더 많은 힘을 받아낼 수는 없어. 그 다음은 받은 힘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들이 너만큼 견뎌냈다고 해서 너만큼 강해질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숲그림자보다는 좀 낫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현석이 성큼성큼 걸어서 공터를 벗어났다.

    무팔룬은 멀어지는 현석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석이 해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 곱씹었다.

    이내 현석이 사라지자 무팔룬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공터에 늘어져 있는 전사들을 바라봤다.

    그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전사들에게 다가가 두 명을 동시에 들쳐 메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모든 하인을 동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걸었다.

    * * *

    “뭐야? 이대로 그냥 가는 거야?”

    라이언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머지 다른 일행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뭔가 일을 하다가 말고 가는 느낌이었다. 왠지 라일라를 왕으로 만든 다음 떠나야 할 것 같은데 그냥 간다고 하니 허전하고 뭔가 빼먹은 것 같이 찜찜했다.

    “그럼? 남아서 뭘 더하려고?”

    현석의 물음에 라이언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좀 더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숲그림자인가 뭔가 하는 암살자들이 200명이나 더 생겼다면서?”

    현석이 라이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라이언은 현석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러니까…… 싸우고 싶다는 건가?”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좀 더 도와주는 게 나중을 위해서 더 좋은 게 아닌가…… 그런 거지.”

    현석은 라이언을 비롯한 일행을 슥 둘러보고는 돌아섰다.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표정과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 메디나툰에서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나머지는 라일라와 무팔룬이 알아서 해야만 한다.

    현석 일행은 그들의 성공을 속으로 빌며 현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걷던 일행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현석이 앞장서서 가는 길이 도시 밖으로 이어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현석은 오히려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현석은 대답 없이 계속 걸었다. 결국 일행도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더 걷자, 목적지의 윤곽이 잡혔다. 현석이 가는 곳은 도시 중앙에 있는 첨탑이었다.

    첨탑이 서 있는 공터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현석 일행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첨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왜 오신 거죠?”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말없이 첨탑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갖다 댔다.

    첨탑에 문이 생겨났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석이 첨탑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황급히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사라졌다.

    첨탑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신기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다들 몸의 감각이 살짝 깨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실제로 이곳은 감각에 도움을 주는 장소였다. 무팔룬도 그 특헤를 받지 않았던가.

    사방을 둘러보던 일행이 갑자기 깜짝 놀라 첨탑 중앙에 서 있는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의 몸에서 막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현석은 예전 무팔룬과 함께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틀린 마력의 거미줄을 뽑아내 첨탑 벽에 착착 붙이는 중이었다.

    “뭐, 뭘 하시는 거죠?”

    현석이 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류혜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건 단연 류혜연이었다.

    그녀는 마력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예민했다. 그 덕에 빠르게 친화력을 높여가는 중이었는데, 오늘 일은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다 끝났을 테니 이제 되돌려야지.”

    “되돌린다고요?”

    류혜연은 현석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법에는 빈틈이 많은 법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현석의 마력이 꿀렁거리며 거미줄을 따라 첨탑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첨탑 위에 떠 있는 새하얀 구체가 맹렬히 회전하며 사방으로 주술력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 주술력은 순식간에 메디나툰 전역을 뒤덮었다.

    첨탑 안에 있던 일행은 얼마 전 무팔룬이 겪은 것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도시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마력의 눈을 통해서 말이다.

    그제야 현석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다들 크게 감탄했다.

    그들의 눈에 비정상적으로 뭉쳐 있는 주술력 덩어리가 그 응집력을 잃고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불과 얼마 전에 새로 힘의 각성을 이룬 숲그림자들의 힘이 다시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정말 빠른 속도로 힘이 흩어졌다.

    반면 숲그림자가 된 지 제법 오래 된 자들의 힘은 잘 흩어지지 않았다.

    그 자체로 육체와 끈끈하게 결합하게 되었기에 실제 각성한 전사와 큰 차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가진 힘의 크기나 발현 방식은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현석도 그들까지 어떻게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그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후웅!

    사방에 뿌려졌던 주술력이 일제히 되돌아왔다.

    현석 일행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들은 무팔룬에 비해 상당히 잘 견뎌냈다.

    무팔룬은 거의 피를 토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현석 일행은 그저 강렬한 충격파 한 번 견뎌낸 정도에 불과했다.

    그건 그들이 가진 힘의 근간이 무팔룬과 달리 마력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석이 은연중 도움을 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현석은 되돌아오는 주술력의 대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냈다.

    일행이 받은 건 그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충격이 덜할 수밖에.

    어쨌든 그걸 마지막으로 메디나툰에서의 일이 모두 끝났다.

    이젠 진짜 라일라와 무팔룬이 알아서 할 일만 남았다.

    ‘아마 무난하게 왕이 되겠지.’

    모두의 뇌리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현석이 움직여 벽에 문을 만들어냈다. 다들 황급히 현석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하여간 여유가 없어.”

    라이언이 투덜거렸다. 물론 아무도 그 말에 반응하진 않았다.

    그렇게 현석 일행이 메디나툰을 떠나갔다.

    * * *

    말리쿤, 후쿠문, 하르분, 무카파툰.

    네 가문의 수장이자 가문을 대표하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의 복장이나 모습은 다 달랐지만 표정과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다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제일 먼저 힘겹게 입을 연 사람은 후쿠문이었다.

    그는 메니나툰의 모든 가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일반 전사일 뿐이었다. 그들을 숲그림자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가장 돈이 많은 가문의 수장인 하르분이 그 말을 받았다.

    “그걸 알면 우리가 여기 이러고 있겠습니까?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각성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다들 그러고 있을 때, 은연중 네 가문을 이끄는 위치에 있던 말리쿤이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대책이 필요합니다.”

    말리쿤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슥 훑어봤다.

    그러자 무카파툰이 말리쿤을 보며 물었다.

    “힘을 잃은 숲그림자들은 어찌 합니까? 그들이 다시 힘을 찾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말리쿤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무카파툰도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그저 미련이 남았기에 언급한 것뿐이었다.

    이번에 새 숲그림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무리를 했다.

    숲그림자들이 멀쩡했다면 그 손해를 모두 벌충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들이 사라진 이상,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일단 우리는 모든 걸 감춰야 합니다.”

    말리쿤의 말에 다들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네 가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걸 극복할 방법은 그들 중 하나가 왕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남은 숲그림자들이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그들이라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그들을 충분히 이용해야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용하느냐였다.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라일라와 무팔룬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라일라가 왕에 도전할 모양입니다. 다들 알고 계시지요?”

    그 사실 역시 다들 알고 있었다. 네 가문은 서로의 정보도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일단 그 두 사람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합니다. 모든 숲그림자를 거기에 투입하고자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그들 역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남은 숲그림자를 전부 투입하겠습니다. 절반으로 나눠 라일라와 무팔룬에게 붙이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말리쿤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빛내며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봤다.

    “우린 감춰야 한다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몸집을 크게 부풀려 상대를 겁줘야 하는 시기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염려 마시지요.”

    하지만 말과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 결심을 하는 네 사람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가문은 위기 상황이었다. 만일 이번에 이 중에서 왕이 나오지 않는다면,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역사가 끝장날 것이다.

    다들 그 불안감을 억지로 감추며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가문의 수장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말리쿤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 전쟁이 더 필요하게 됐어. 그것만이 살 길이야. 그리고…….’

    그리고 저들의 효용이 끝났다. 이번에 왕이 되고 나면 저들도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만 한다.

    ‘바쁘게 움직여야겠어.’

    이제 저들을 버리기로 한 이상, 다른 가문과 손을 잡아야 한다.

    물론자신의 가문이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사실은 숨겨야 한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말리쿤이 왕으로 선출되고 나면 없던 일이 될 테니까.

    말리쿤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어느 가문을 끌어들여야 이용해 먹기 좋을지 고민과 계산을 반복했다.

    < 숲의 왕 5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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