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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4화 (274/326)
  • < 숲의 왕 4 >

    다음 날, 무팔룬은 집에 연이어 도착하는 숲의 전사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자잘한 일은 저택을 관리하는 시녀와 하인들이 해주었지만 어쨌든 찾아온 전사들은 손님이었으니 최소한 인사는 해야 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500명이 넘는 사람을 맞아 인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팔룬은 정말 성심을 다해 모든 전사를 차별 없이 맞이했다.

    현재의 지위나 실력은 아무 의미 없었다. 이제 이들은 강제 각성의 시간을 가질 테니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강제 각성을 하겠다는 거지?’

    무팔룬은 강제 각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의구심을 가졌다. 과연 그게 가능하긴 할까?

    그리고 과연 각성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갖게 될까?

    하지만 숲그림자를 보게 되고 메디나툰 중앙의 첨탑에서 도시 전체를 감각에 두고 확인한 뒤로 그 의구심이 싹 사라졌다.

    현석이 얘기한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문제는 하나밖에 안 남는다. 과연 어떻게 강제 각성을 할까?

    무팔룬은 방문한 전사들을 위해 저택 곳곳에 숙소를 마련했다. 그리고 시녀와 하인들에게 지시해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했다.

    아마 당분간은 별 잡음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무팔룬이 그렇게 한 이유는 현석이 시켰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건지 모르지만 현석은 강제 각성의 시기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이제 슬슬 그 답을 들을 때가 되었지.’

    자기가 할 일을 다 마무리 했으니 이제 알 권리가 생겼다고 믿었다.

    무팔룬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현석을 찾아갔다.

    현석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무팔룬은 눈을 크게 떴다. 라이언이 현석 앞에 앉아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무팔룬은 라이언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환하게 웃었다. 호적수라고 여기는 사람이기에 상당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웬일이시오? 하하하. 미리 연락을 줬으면 제대로 대접할 수 있을 텐데 이거 아쉽소이다. 하하하.”

    라이언은 무팔룬의 환대에 기분이 좋아져 빙긋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차피 금방 돌아가 봐야 합니다. 말 몇 마디 전하러 온 거라서.”

    “말을 전하러 왔단 말이오?”

    무팔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방금 그 말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들을 수 있겠소?”

    라이언이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무팔룬에게 말을 꺼냈다.

    “라일라 가문의 정보력을 통해 얻은 몇 가지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정보?”

    무팔룬이 눈을 빛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대전사가 된 자신과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진 귀족 가문에는 각자 나름의 정보력이 있었다.

    그 정보력은 무팔룬이 항상 부러워하던 거였기에 관심이 아주 높았다.

    “네 가문을 찾아냈습니다.”

    “네 가문?”

    “말리쿤, 후쿠문, 하르분, 무카파툰.”

    무팔룬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네 가문의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메디나툰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 귀족가문들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대체 그들이 뭘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 그 가문들이 뭘 어쨌다는 거요?”

    “숲그림자의 주인들이라더군요.”

    “뭐요? 그게 정말이오?”

    무팔룬은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아쉬울 게 없으니 더더욱 그런 겁니다. 앞으로도 아쉬울 상황을 만들기 싫을 테니까.”

    “하긴…….”

    무팔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권력자가 무리수를 두는 건 지금 가진 권력을 잃기 싫을 때다.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오히려 더 얻을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권력자의 속성이었다.

    “예비 숲그림자들을 감시해서 그들을 통해 배후를 역으로 짚어갔습니다. 어렵지 않게 네 가문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제야 현석이 왜 저들을 건드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석의 노림수는 방금 무팔룬이 생각한 것보다 한 단계 더 깊었다.

    “그들이 강제 각성을 준비 중입니다.”

    라이언은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확인해보니 들어가는 재료가 어마어마하더군요.”

    무팔룬은 그 말을 듣고서야 현석이 노린 두 번째를 알 수 있었다. 그가 감탄어린 시선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두려움도 살짝 섞여 있었다.

    현석이 진짜 노리는 건 힘과 자금의 소모였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팔룬은 이내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한데……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이쪽에는 한두 명도 아닌 500명이나 있습니다.”

    실제로는 512명이다. 무팔룬은 과연 현석에게 그 정도 자금의 여력이 있을지 걱정이었다.

    무팔룬의 말을 들은 라이언이 기겁을 하며 현석을 바라봤다.

    “500명? 500명을 각성시키겠다고? 대충 알아본 것만 한 명 각성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1000골드가 넘는 것 같던데?”

    그것도 재료비만 그 정도다. 거기에 들어가는 인력은 따로 계산해야 한다.

    뛰어난 주술사도 여럿 필요하니 그들에게 지급할 돈까지 생각하면 웬만한 가문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라이언은 현석이 얼마나 많은 금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흩뿌리는 건 반대였다.

    현석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직접 나서는데 그런 것에 돈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그럼 그렇지.”

    라이언이 그제야 안심한 듯 씨익 웃었다.

    하지만 무팔룬은 웃을 수가 없었다.

    강제 각성은 분명히 그 네 가문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끝에 찾아낸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은 최선의 방법이 1000골드나 되는 재료비라는 뜻이다.

    한데 그걸 그냥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라이언은 경악에 찬 무팔룬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나도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매일 저 표정을 지었겠지.’

    그건 현석과 함께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거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라이언은 약간의 동감을 담아 무팔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 * *

    커다란 공터에 500여명의 전사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서 있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다들 한 마디도 불평을 내뱉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무팔룬의 부탁으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렇게 무팔룬이 전사들을 한데 모은 이유는 오늘이 바로 이들을 강제 각성 시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무팔룬은 단상 위에 서서 전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전사들의 눈빛이 온통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늘이 숲그림자를 각성하는 날이라고 했지?’

    그래서 이들의 각성일도 오늘로 잡았다. 저쪽에서 하던 일을 포기하고 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나저나…… 상위의 선택자들이 다 저쪽에 있는데 수가 많다고 상대가 될까?’

    무팔룬은 현석 일행이 이제 곧 메디나툰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뒤의 일은 자신과 라일라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오늘 각성하는 512명의 전사들이 제 몫을 해줘야만 한다.

    한데 왠지 그러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으니 불안한 게 당연했다.

    “저…… 다 모였소이다. 이제 어쩌면 되겠소?”

    무팔룬이 옆에 서 있는 현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석은 무팔룬은 쳐다보지도 않고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전사들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숨김없이 다 말해줘.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왜 선택받지 못했으며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까지 전부 다.”

    무팔룬이 경악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얘기는 해주는 게 좋다.

    굳이 그런 걸 감추고 갈 이유는 없었다. 괜히 나중에 분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한데 과연 저들로 가능성이 얼마나 올라가겠소? 솔직히 지금이라도 새 숲그림자들을 처리하러 가는 게 낫지 않겠소?”

    무팔룬의 생각은 그랬다. 이제 그들도 강제 각성을 시작했을 테니 다시 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기습해서 싹 정리해 버리는 편이 훨씬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힘의 급이 떨어지는 전사들을 데리고 그들과 싸울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솔직히…… 이대로는 저들을 그냥 이용만 하고 버리는 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현석이 의외라는 듯 무팔룬을 보며 물었다. 저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저들로 새로운 숲그림자들을 상대하긴 어렵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현석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숲그림자와 저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르다고? 뭐가 다르단 말이오?”

    현석이 손가락을 들어 무팔룬을 가리켰다.

    “너.”

    무팔룬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숲의 무예를 말하는 거요?”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있지. 나머지는…… 그냥 보면 안다.”

    무팔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끝까지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결국 무팔룬은 전사들에게 숲의 선택과 대전사에 대한 모든 얘기를 해 주었다.

    숲그림자에 대한 얘기도. 또 네 가문이 숲그림자를 양산해서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숨김없이 다 얘기해 주었다.

    또한 무팔룬은 라일라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여기 모인 전사들을 강제로 각성시킬 계획이라는 얘기를 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무팔룬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현석이 차지했다.

    현석은 좌중을 한 차례 슥 훑어봤다. 대번에 침묵이 찾아왔다. 다들 현석의 시선에 담긴 기세에 눌린 것이다.

    “죽지 마라.”

    현석의 입에서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들 깜짝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숲의 선택을 받을 때처럼. 그때와 다른 점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현석의 말에 다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 그때까지 고통에 패배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마라.”

    모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 강제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그 어떤 소리도 입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가지 않았다.

    또한 몸부림을 칠 수도 없었다. 몸이 굳은 채 움직여지지가 않았으니까.

    그들의 뇌리 한구석이 번득였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서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건 숲의 선택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들의 한계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다들 자신이 언제까지 견뎠는지 기억해냈다. 하지만 같은 시점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시점을 지나 시간이 계속 흐르는데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왜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이런 고통을 참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닌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문제는 그럴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현석에게로 향했다.

    현석은 더없이 담담한 눈빛과 표정으로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사들의 시선에 원망과 독기가 어렸다.

    ‘대체 뭘 어쩌란 거야!’

    속으로 아무리 외쳐봐야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답답함마저 고통이 되어 온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저 이 지독한 고통의 시간을 그저 견뎌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무팔룬은 멍하니 전사들과 현석을 바라봤다.

    그는 현석이 아까 말했던 자신 때문에 다르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와 똑같은 시간을 견뎌내게 할 셈이구나.’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각성의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 숲의 왕 4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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