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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3화 (273/326)
  • < 숲의 왕 3 >

    무팔룬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이쪽 먼저 가는 거요?”

    현석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강제 각성한 전사, 숲그림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솔직히 무팔룬은 나머지 흩어진 전사들을 먼저 모아 각성시킨 다음,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숲그림자를 정리할 거라고 여겼다.

    아니, 자신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데 지금 현석이 가는 방향을 보니 숲그림자 먼저 정리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우리 둘만으로 숲그림자를 처리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무리할 필요 없지 않소?”

    당연히 현석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무팔룬은 그런 현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된 사람이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얘기를 안 해주는군.’

    답답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답을 알게 되니 참을 수는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복안이 있기에 무작정 그놈들을 찾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무팔룬은 물끄러미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얼마나 강한지는 안다. 자신이 손도 못 써보고 형편없이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숲그림자는 그냥 무작정 달려든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답인데…….’

    그들의 은신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숲그림자가 작정하고 숨으면 그걸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무팔룬도 작정하고 숨은 숲그림자를 찾아낼 자신은 없었다.

    지금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런 숲그림자가 무려 50명이나 모여 있었다.

    초반에 기습해서 타격을 주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 다음은 어쩌겠는가.

    은신과 기습에 능하다는 건, 상대의 약점과 빈틈을 잘 포착하고 파고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자들 수십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지. 내가 셋을 맡는다 치고 나머지는…….’

    무팔룬은 걱정이 됐지만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왠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현석의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담담했다.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을 하면 비웃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그럴 사람 같진 않지만.’

    걱정을 잔뜩 안고 걷던 무팔룬은 갑자기 드는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기묘한 주술력의 파장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숲그림자!’

    이건 숲그림자들이 가진 주술력의 파장이었다. 아무리 은신에 능해도 이걸 완벽하게 감추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극미하게 흘러나온 주술력의 부스러기를 자신이 감지한 것이고.

    ‘내 감각이…… 달라졌어!’

    그냥 단순히 달라진 게 아니었다. 주술력에 대한 부분만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숲그림자가 흘리는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을 리 없으니까.

    사실 무팔룬은 방금 숲그림자의 기척을 잡아내며 감각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다.

    아마 이후로는 다른 감각도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숲그림자들이 주는 강렬함이 너무 컸으니까.

    ‘지금이라면…… 저 사람과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감각 좀 올라갔다고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당찮은 생각이다.

    무팔룬은 일단 숲그림자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저들과의 일전은 이제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숲그림자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아마 예전이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각일 것이다.

    무팔룬이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현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넌 끝까지 버티기만 해라.”

    “뭐요?”

    무팔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버티는 것만으로도 용하다 이건가? 이건 완벽한 무시였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현석은 발끈하는 무팔룬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나 표정이 어찌나 담담한지 보고 있던 무팔룬은 오히려 섬뜩했다.

    “숲그림자 50명의 기습에서 버티는 게 쉬울 것 같은가?”

    무팔룬은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싸우고 싶었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건 전사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현석은 그런 무팔룬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다.

    “그럼 한 번 싸워보든가.”

    무팔룬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요?”

    현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죽지만 마라. 아, 팔다리도 잘리지 말고. 다시 붙이기 힘들 것 같으니까.”

    무팔룬은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섬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투지가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갑시다.”

    무팔룬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말겠다는 결심이 그의 뇌리를 꽉 채웠다.

    ‘그나저나…… 기습으로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겠네.’

    숲그림자들이 벌써 다 알아차렸는데 기습은 무슨 놈의 기습이란 말인가. 이젠 그냥 정면으로 마주쳐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무팔룬은 심호흡을 통해 긴장을 풀었다. 한데 그 순간 현석이 사라져 버렸다.

    당황한 무팔룬의 눈에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는 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어?”

    현석에게 숲그림자들이 전광석화처럼 기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섯의 숲그림자가 무팔룬의 빈틈을 노리고 칼을 찔렀다. 마치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불쑥 솟아난 것 같았다.

    물론 무팔룬은 거기에 당하지 않았다.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 다가오는 숲그림자들이 걸려들었으니까.

    하지만 첫 공격을 허용하는 바람에 수세에 몰려 버렸다.

    ‘젠장! 이게 아닌데!’

    다섯의 숲그림자들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움직임으로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공격을 했다.

    매 공격이 무팔룬의 빈틈과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그걸 막는 것만 해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결국 허덕허덕 공격을 막고 피하는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격은 아예 꿈도 못 꿨다.

    ‘이래서야 발끈한 의미가 없잖아!’

    무팔룬은 현석이 말한 대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슬슬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움직임이나 감각이 조금씩 둔해졌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라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다.

    문제는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촤자자작!

    몸에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팔룬은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고통도 참았고, 팔다리에 밀어 넣는 주술력의 힘도 줄이지 않았다.

    점점 패색이 짙어졌다.

    그 순간 다섯의 숲그림자가 동시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무팔룬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멍하니 쓰러진 숲그림자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목에서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이 꿰뚫린 것이다.

    “가자.”

    무팔룬은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현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 현석이 습격을 받았던 곳을 바라봤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동안 숲그림자들을 모조리 끝장낸 것이다.

    게다가 숲그림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즉, 막상 현석과 싸운 숲그림자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

    다들 숨거나 도망치는 와중에 죽었다. 현석은 그 모든 숲그림자를 다 쫓아가 격살한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무팔룬의 시선이 다시 현석의 등으로 향했다. 아까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던 단어가 다시 생각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낸 무팔룬은 얼른 현석을 따라잡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요? 예비 숲그림자들을 잡아야겠지?”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버려둬. 이제부터 숲의 전사를 영입하러 간다.”

    “영입한다고? 이놈들은 다 죽여 놓고?”

    무팔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의 전력을 줄이는 계획이라면 예비 그림자들도 다 없애는 게 정석이었다.

    그들의 세뇌는 이미 풀 수 없을 지경일 테니까. 또 세뇌를 풀 수 있어도 쓸모가 없다. 혼란에 휩싸여서 제대로 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무팔룬은 더 이상의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현석을 따라가며 숲의 전사들을 영입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왠지 모를 무력감이 심장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앞서가는 현석의 등을 보고 있으니 다시 좀 힘이 났다.

    ‘저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되지. 저분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무팔룬이 서둘러 현석의 뒤를 따라갔다.

    * * *

    말리쿤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숲그림자의 근거지가 박살 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 그래서 며, 몇이나 남았지?”

    “근거지에 있던 자들은 전멸입니다. 그리고 임무 수행 중이던 자들 중에서도 일곱이 당했습니다.”

    굳어 있던 말리쿤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총 100명의 숲그림자가 있었는데, 라일라의 저택에서 20명을 잃었다.

    그리고 임무에 나가지 않고 대기 중이던 50명이 추가로 죽었고, 임무 중이던 자들 중 7명이 죽었으니 총 77명이 죽고 23명만 남은 셈이었다.

    고작 23명으로 뭘 하겠는가. 이쪽의 주요 인물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릴 숫자였다.

    “후쿠문 가문과 하르분 가문, 무카파툰 가문에 연락을 넣어라.”

    “뭐라고 할까요?”

    그들은 숲그림자의 지분을 나눠가진 가문들이었다. 또한 현재 메디나툰을 지배하는 가장 상위의 귀족들이기도 했다.

    “예비 그림자들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전해라.”

    “예.”

    수하 전사가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 자리에 숲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아무 행동도 없었습니다.”

    그의 혐의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엄청나게 강한 적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강력한 적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힘을 갖춰야 한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숲그림자가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감췄다.

    말리쿤은 소파에 앉아 중얼거렸다.

    “무리를 해서라도…… 남은 200명을 전부 각성시켜야겠어.”

    아마 그렇게 하려면 말리쿤 가문뿐 아니라 함께 하는 세 가문에서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지출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가문이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왕이 되어 전쟁만 일으킬 수 있으면 모두 해결될 테니까.

    말리쿤의 눈에 탐욕과 야망 그리고 살기와 잔혹함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며 빛났다.

    * * *

    숲의 전사를 포섭하는 일은 현석이 아닌 무팔룬의 몫이었다.

    현석은 그저 따라다니면서 가끔 걸려드는 숲그림자만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 정확한 임무 분담이기도 했다.

    솔직히 숲의 전사들이 현석이 따라오라면 뭘 믿고 따라오겠는가.

    이런 일에는 명성과 인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팔룬에게는 그 두 가지가 흘러넘칠 정도로 많았다.

    만난 모든 숲의 전사들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강제 각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전사인 무팔룬은 선망의 대상이자 꿈이었다.

    또한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전사는 절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묘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현석은 그 믿음이 숲의 선택을 받고 시험을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얘기해주진 않았다.

    숲그림자와 예비 그림자를 제외하고 남은 숲의 전사는 500여명에 불과했다.

    그동안 제법 많은 수가 마수와의 싸움에 죽었기 때문이다. 숲의 전사는 결코 몸을 사리는 법이 없고, 언제나 가장 앞장서서 싸움에 나섰다.

    당연히 부상을 입거나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그렇게 모든 숲의 전사를 만나 설득에 성공한 무팔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다들 내일까지 우리 집에 오기로 했으니 일단 우리 집에 갑시다.”

    라일라의 저택에 모으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 좀 편하겠지만,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고, 길을 설명하기도 복잡해서 가장 찾기 편한 유명한 장소로 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숲의 전사들 중에서 무팔룬의 집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그들은 무팔룬에 대한 관심이 과할 정도로 높았다.

    현석은 그걸 보면서 지구의 아이돌과 팬클럽 같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물론 그것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고 무팔룬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발견한 두 명의 숲그림자를 더 처리한 건 덤이었다.

    < 숲의 왕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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