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의 왕 1 >
무팔룬은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현재 그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그리고 멍이 안 든 곳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이 무슨…….’
어이도 없었고 허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극심한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 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더구나 대전사가 된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맞아본 기억도 거의 없었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으니까.
무팔룬의 몸에 생채기라도 내려면 다수의 강한 전사가 동시에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 하고서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호적수의 존재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것 때문에……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자만심 때문이다. 알량한 힘 하나 믿고 너무 자만했어.’
몇 대를 맞았는지는 헤아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정말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현석은 무팔룬의 모든 공격을 막지도 않고 다 피해냈다. 그것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말이다.
상대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니 공격 후에 나타나는 빈틈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 번 검을 휘두르면 열 대가 넘는 주먹질을 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갈 무렵 알게 되었다. 현석이 자신을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진짜 마음먹고 제대로 싸웠다면 한 방에 끝날 싸움이라는 것을.
“끄응.”
무팔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셨지만 그래도 이를 악무니 어찌어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디행스럽게도 뼈가 다치진 않았다. 근육은 많이 놀랐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프긴 해도 어디가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프긴 정말 아팠다. 이렇게 아파본 적이 언제일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정작 몸이 크게 상해 오랫동안 치료해야 하거나 아예 제 기능을 쓰지 못하는 부분이 없었다.
고통을 감내하면 당장에라도 다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정말로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킨 무팔룬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다시 천천히 주먹을 쥐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자, 기겁을 하며 양손을 맹렬히 내저었다.
“그만! 내가 졌소! 이제 그만합시다!”
표정이 어찌나 간절한지 지켜보는 사람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현석이 걸음을 멈추고 주먹에서 힘을 뺐다.
“약속은?”
무팔룬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일난다는 듯이.
“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무팔룬의 선언에 라일라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무팔룬님!”
무팔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약속을 지키는 것일 뿐인데 내게 감사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절 이긴 저분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저분께는 따로 충분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사례도 할 거예요.”
현석은 라일라와 무팔룬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불쑥 물었다.
“한데 정말 두 사람만으로 왕이 될 수 있을까?”
그 말에 무팔룬은 자신만만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나서기만 하면 세력의 향방을 단숨에 바꿔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라일라의 표정은 더없이 신중하기만 했다.
“장담할 수 없지만…….”
라일라는 무팔룬을 힐끗 바라본 다음 말을 이었다.
“무팔룬님을 추종하는 전사의 수는 상당히 많답니다. 그들의 지지와 무력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현석은 라일라와 무팔룬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라일라를 보며 물었다.
“아까 내가 잡아낸 잠입자들, 실력이 어느 정도일 것 같았지?”
“예? 그야…….”
솔직히 잘 모른다. 현석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잡아냈으니까.
하지만 방금 무팔룬과 싸운 현석의 모습을 보면 그들도 어쩌면 굉장한 강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들 중 셋이 모이면 무팔룬을 이길 수 있다.”
“말도 안 돼요!”
“웃기는 소리!”
라일라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팔룬은 발끈해서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석의 말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이젠 잘 알기 때문이다.
무팔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숲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 어쩌다 이 정도로 전락했단 말인가.
현석은 두 사람이 마음을 냉정하게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자신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든 저들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현석은 아까 잡은 놈들의 정보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단 심안을 통해 그들의 레벨과 스탯, 그리고 스킬까지 확인했으니까.
무팔룬과 라일라가 냉정을 되찾았다고 판단한 현석은 준비한 말을 꺼냈다.
현석의 시선이 무팔룬에게 향했다.
“넌 숲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뭐?”
무팔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숲의 선택을 현석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선택받은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라 또 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현석이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물었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넌 유일하게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유일하게 견뎌낸 전사다.”
그제야 무팔룬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건 맞다. 선택받은 사람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고통을 주어 다른 사람을 걸러내는 것뿐이지.
얘기를 듣고 있던 라일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숲그림자가 대단한 곳이긴 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말에 무팔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숲그림자? 그들이 여기에 왔다고?”
숲그림자는 잠입, 감시, 암살에 특화된 조직이었다. 그 세 분야에 한해서는 최고였다.
“몇이나 왔지?”
“스무 명이었어요.”
“그렇게나?”
무팔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역시 숲 그림자를 쓰는 데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이 쓰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무팔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 한데 뭉치면 그들을 당해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무팔룬의 말에 라일라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들이 모이면…… 세력도 세력이지만 자금력의 차이는 메우지 못할 테니까요.”
그때 현석이 끼어들었다.
“자금력의 차이를 메우면 이길 수 있나?”
그 물음에 무팔룬과 라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정말로 가능성이 있는지, 또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나름대로 계산을 해봤다.
“역시…… 장담할 순 없네요. 워낙…… 세력의 차이가 커서요. 하지만 맥없이 당하진 않을 거예요.”
라일라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와 확고한 신념이 담겨 타오르고 있었다.
무팔룬도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날 따르는 전사들을 모두 합해도 적의 세력에 미치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해볼 만한 수준은 되겠지. 이쪽에는 내가 있으니까. 아, 그 숲그림자라는 놈들이 좀 문제가 되겠군.”
무팔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숲그림자는 정말 까다로운 조직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는데, 이제 그들의 강함까지 더해져 계산하니 더 어려운 상대가 되어 버렸다.
무팔룬은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그 숲그림자들의 정체가 뭐요? 그들이 숲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소?”
당연히 심안을 통해서 확인했다. 숲그림자는 물론이고 무팔룬까지 말이다.
[무팔룬-메디나툰의 대전사. 숲의 선택을 받은 천 명의 전사 중 한 명. 숲의 시험을 끝까지 버텨내 대전사의 호칭을 얻었다. 대전사에게만 주어지는 숲의 무예를 익혔다.]
이것이 심안을 통해 확인한 무팔룬의 정보였다. 물론 스탯이나 타이틀에 대한 설명이 더 있지만 현석에게 별 의미 없는 정보였다.
그리고 숲그림자에 대한 정보는 무팔룬보다 조금 더 특이했다.
[32번째 숲그림자-비밀조직 숲그림자의 일원. 숲의 선택을 받은 천 명의 전사 중 한 명. 숲의 시험은 버텨내지 못했지만, 강제 각성을 통해 잠재력으로 녹아든 숲의 힘을 일깨워냈다.]
이 정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 숲그림자라는 조직에는 숲의 선택을 받은 전사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전사를 강제로 각성시켜 잠재력을 일시에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만일 정말로 그 천 명의 전사를 모두 모아서 강제로 각성시켰다면, 숲그림자야말로 메디나툰은 물론이고 숲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조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전사를 다 갖다 썼을 리 없지.’
천 명이나 되는 전사를 뽑아 그들을 세뇌하고 훈련시켜 조직원으로 키워내는 데에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 노력이 들어간다.
게다가 거기에 들어가는 인력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위에서부터 어느 정도 수준까지 뽑아내고 나머지는 쳐낼 수밖에 없다.
‘100명쯤? 많아봐야 300명.’
현석이 생각한 한계인원이 그 정도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었다.
가장 신빙성 있는 계산은 50명을 숲그림자로 써먹고, 100명 정도의 예비 전사를 추려내 차근차근 훈련시켜 언제든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정도였다.
물론 그들에 대한 지원은 상당히 열악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현석은 눈을 빛내며 무팔룬을 쳐다봤다.
“숲의 선택을 받은 전사들을 찾아서 잠재력을 일깨워주면 네가 가진 숲의 무예를 가르쳐줄 수 있나?”
현석의 물음에 무팔룬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자신이 숲의 무예를 익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실 도시의 선택을 받아 대전사가 되고, 대전사만 들어갈 수 있는 석실에 들어가 뭔가 힘을 얻어 나온다는 건 메디나툰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익히는 것이 정확히 숲의 무예라는 사실을 아는 건 오직 대전사인 무팔룬뿐이었다.
실제로는 숲의 선택을 받을 때 힘을 얻고, 그 힘을 이용할 효율적인 방법을 배운다는 사실도 무팔룬만이 알고 있었다.
한데 그걸 아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대체 정체가 뭐요? 혹시…….”
무팔룬은 혹시 현석이 전대 대전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현석의 모습이 너무 어려 보였다.
그리고 전대 대전사는 분명히 죽었다. 장례까지 성대히 치렀고, 그가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걸 무팔룬도 똑똑히 확인했다.
그렇다면 대체 정체가 뭘까? 혹시 자신과 동시에 숲의 선택을 받고, 시험을 끝까지 버텨낸 전사일까?
“그냥 그런 걸 잘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넘어가면 편하니까 그렇게 해. 어쨌든 대답은?”
무팔룬은 순간 멈칫했다. 그건 대전사에게만 허락된 무예였다. 한데 과연 그걸 다른 전사에게 가르쳐도 될까?
결정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무팔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라일라와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전사의 마음가짐이다.
“좋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한데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현석이 씨익 웃었다.
안 될 게 뭐 있겠는가. 이곳 메디나툰에는 그걸 가능하게 할 만한 거대한 마법진까지 있는데 말이다.
현석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무팔룬과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현석을 따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숲의 왕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