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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0화 (270/326)
  • < 메디나툰의 대전사 3 >

    무팔룬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특이한 기운을 느꼈다.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이건 뭐지?”

    무팔룬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흩어놓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마음먹고 탐색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만일 적의가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그랬겠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까.

    “일단 용건부터 해결한 다음에 보지.”

    무팔룬은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며 안에서 라일라가 천천히 나왔다.

    무팔룬은 정중히 라일라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라일라님.”

    “무팔룬님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무팔룬이 씨익 웃었다.

    “저야 남는 게 건강과 힘뿐이잖습니까. 그보다 요즘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던데 괜찮으십니까?”

    라일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도 마침 좋은 분들이 도와주셔서요.”

    “좋은 분들을 만나 다행입니다. 그 좋은 분들, 저도 꼭 한 번 뵙고 싶군요.”

    “네. 소개해드릴게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우리 밥부터 먹죠.”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현석 일행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착착 세팅되는 중이었다.

    무팔룬은 현석 일행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까 느꼈던 그 특이한 기운의 주인들이 바로 여기 있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우리 메디나툰의 대전사이신 무팔룬님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절 위험에서 구해주신 분들이고요.”

    무팔룬은 현석 일행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신경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사람은 단연 라이언이었다.

    라이언도 무팔룬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호승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계속 바라봤다.

    여기서 이런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는데, 둘 사이에서 마치 불꽃이라도 튀는 듯했다.

    물론 적의를 가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호의에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호적수를 만난 기쁨도 적당히 섞여 있었다.

    “자, 일단 배고프실 테니 식사부터 하시지요.”

    라일라의 말에 무팔룬과 라이언은 그제야 시선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식사가 시작되었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식사 분위기는 시종일관 묘한 긴장감이 넘쳤다.

    무팔룬은 계속 라이언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라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계속되니 식사 자리가 편안할 리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사실 라일라와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들밖에 없었다.

    라이언의 성향을 잘 아는 일행은 다들 태연하게 식사에 집중했고, 현석은 애초에 이런 분위기에 휩쓸릴 사람이 아니었다.

    무팔룬도 언제까지 라이언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차츰 시야가 넓어져 결국 라이언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선이 닿았다.

    ‘이상한 자들이다.’

    그것이 현석 일행을 보고 무팔룬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가 보기에 라이언이 가장 강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보다 못했다. 한데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저들 중 두 사람이 함께 덤비면 아마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여자들도 그 정도로 강한 느낌을 주었다.

    여자 전사는 솔직히 만나기 쉽지 않았다. 숲의 부족들은 여자를 전사로 키우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까.

    ‘저런 강한 전사들이 대체 어디 있다가 이렇게 우수수 나타난 거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팔룬은 도시의 선택을 받아 숲의 힘을 이어받았다.

    그러니 강한 것이 당연했다. 한데 그런 무팔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가 존재하다니.

    게다가 그에 버금가는 강자가 이렇게 많이 있을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숲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인간이 저 정도로 강해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무팔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상식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앞에 나타났다.

    “혹시 숲의 힘을 이어받으셨소?”

    무팔룬이 뜬금없이 라이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라이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숲의 힘? 그게 뭐지? 처음 듣는 말이오만…….”

    무팔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장 가능성 높던 추측 하나가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면 저들은 스스로의 수련으로 저 정도로 강해졌단 말인가?

    대충 식사가 끝나갔다. 라일라는 그걸 확인하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간단히 술이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술을 마셔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라일라는 모두의 기대어린 시선에 빙긋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제가 아주 귀한 술을 준비해 뒀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자리는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 * *

    라일라가 장담한 대로 술은 정말 기가 막혔다. 향도 향이지만 목넘김도 굉장히 좋았고, 특히 먹자마자 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불길은 강한 중독성까지 갖고 있었다.

    독한 술이 좀 들어가자 다들 기분이 살짝 풀어졌다. 당연히 긴장감도 많이 완화되었다.

    라일라는 그 때를 기다렸다가 슬쩍 얘기를 꺼냈다.

    “저도 이번에 왕을 결정하는 자리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라일라의 말에 무팔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라일라가 무팔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무팔룬 님.”

    무팔룬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 그 어느 귀족의 손도 잡지 않을 겁니다. 대전사가 귀족과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역사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무팔룬은 그렇게 말하고는 현석 일행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분들과 함께 있으시면서 저까지 탐내시는 건 욕심 같습니다.”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분들은 이제 곧 여길 떠나실 거예요.”

    “떠난다고요?”

    무팔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시선이 잠시 라이언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라이언과 한 번 겨뤄보고 싶은 욕망이 잠시 그의 눈에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라일라가 다시 한 번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러니 부디 저와 함께 해주세요. 이 숲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우리 터전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보실 생각인가요?”

    무팔룬이 입을 다물고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라일라의 말에 좀 끌리긴 했다. 굳이 그녀의 아래에 있을 필요도 없다. 그저 대등한 관계로 손만 잡아도 된다.

    그녀를 왕으로 만들어도 대전사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왕은 인간이 뽑지만 대전사는 도시가, 숲이 뽑는 존재니까.

    하지만 그동안 지켜온 엄격한 기준을 갑자기 어길 수가 없었다. 왠지 자신의 신념을 그냥 꺾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무팔룬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라일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게 있나요? 아니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말에 무팔룬이 라이언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그 복잡한 생각 중에서 가장 높이 치고 올라간 건 욕심과 호승심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무팔룬이 결심했다는 듯 라일라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제 신념을 꺾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아시지요?”

    “네. 하지만 숲의 평화를 누구보다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절…….”

    무팔룬은 라이언을 슬쩍 쳐다봤다. 라이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니 왠지 웃음이 났다.

    “절 압도적으로 꺾어보십시오.”

    “예?”

    라일라가 놀란 눈으로 무팔룬을 바라봤다. 하지만 무팔룬은 그런 라일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연기가 서투시군요. 애초에 이러시려고 절 부른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제안을 할지도 다 예상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팔룬의 말에 라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더없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기만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아,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는 해주셔야 왕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테니까요. 왕이 된다는 거…… 절대 쉽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라일라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각오도 되어 있고요.”

    무팔룬이 빙긋 웃으며 라이언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바로 시작할까요?”

    사실 무팔룬도 이렇게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라이언이 자신을 압도적으로 누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라이언과 무팔룬의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욕심을 채우고도 어쩌면 굳이 라일라와 손을 잡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했다.

    아니, 지더라도 압도적이지 않다고 우긴다면 얼마든지 몸을 뺄 수 있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라도 자신이 진다면 라일라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말을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무팔룬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싸울 수는 없으니 정원으로 나가는 게 어떻소?”

    무팔룬의 말에 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현석을 바라봤다. 라이언의 눈빛에는 한 판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라이언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압도적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이 싸움은 자신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욕심 많은 머저리.”

    라이언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모든 일행이 저택의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전사들이 대련이나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터에 도착한 무팔룬은 가볍게 몸을 풀며 공터를 슥 훑어봤다.

    싸움에서 변수가 될 만한 것을 미리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라이언과의 싸움은 아주 작은 것이 작용해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았다.

    미세한 체력의 차이나, 아니면 작은 실수라거나.

    그런 모든 걸 미연에 방지하고 승률을 높이기 위해 주변을 확인하고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싸움의 기본이었다.

    그렇게 무팔룬이 공터 한가운데 서서 적과 환경을 파악하고 있을 때, 공터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나머지 사람들은 공터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싸움 구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팔룬은 당연히 공터로 나온 사람이 라이언이라 생각했다. 한데 막상 확인해보니 너무 의외의 사람인지라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팔룬이 고개를 돌려 라이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라이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공터로 나선 현석을 향해 턱짓을 했다.

    “보다시피 우리 대장님이 직접 나서시는 바람에. 솔직히 나도 싸우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니 좀 봐주쇼.”

    “대장님?”

    무팔룬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의 얼굴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마치 싸움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서서 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강자 특유의 날선 느낌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풍기는 그 느낌, 심지어 라일라마저도 갖고 있는 전사의 향기가 없었다.

    ‘응? 없어? 아예 없다고? 그게 말이 돼?’

    무팔룬은 그제야 앞에 선 상대가 제대로 보였다. 아니,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까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었어. 아니, 못 썼다고 해야 옳겠지. 내 감각 안에 없었으니까.’

    저렇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 눈앞에 서 있는데도 눈을 깜빡일 때마다 현석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걸 반복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무팔룬은 지금 자신이 인생 최대의 상대를 만났다는 걸 깨달았다.

    “후우우. 어쨌든 꼬리를 말 수는 없지.”

    무팔룬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꽉 쥐었다. 웬만한 성인의 키만 한 대검이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걸 천천히 빼냈다.

    반면 현석은 양 손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그런 무팔룬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팔룬은 그런 현석을 보면서도 절대 방심하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저래도 될 자격이 있는 자였으니까.

    대검을 쥔 무팔룬의 손과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리고 양 다리와 발목, 발가락에도 강렬한 힘과 주술력이 쫘악 스며들어갔다.

    “흐아압”

    꽈앙!

    무팔룬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현석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 메디나툰의 대전사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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