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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69화 (269/326)
  • < 메디나툰의 대전사 2 >

    현석이 석실에서 나가자 라일라는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손님이라니요?”

    라일라는 현석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이곳 석실은 저택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장소였다. 외부로부터의 시야는 물론이고 소리까지 제대로 차단된 곳이었기 때문에 근처에 누가 다가와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한데 지금 현석의 행동은 마치 이 저택에 손님이 왔다는 것 같지 않은가.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라일라에게 알렸을 것이다.

    한데 라일라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석실에서 나온 지금도 그런 연락을 위해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 때부터 희한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몇 번 더 마주치다보니 고작 그런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손님이 왔다는 거죠?”

    라일라는 현석 옆으로 바짝 붙으며 다시 물었다.

    현석은 대답없이 계속 걷기만 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이내 긴 복도가 나타났다. 이 복도를 지나면 넓은 홀이 나타난다. 그 홀에서 나가면 정원이었다.

    “설마 밖에 나가시려고요? 왔다는 손님이 저택 밖에 있는 건 아니겠죠?”

    라일라는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점점 가느다래졌다.

    이런 식이면 미리 약속한 사람을 밖에 세워두고 안에서 손님 어쩌고 하며서 자신을 속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물론 현석이 그럴 리 없긴 했다. 그래도 그런 의심이 한 번쯤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의심이나 걱정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현석은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나요?”

    현석은 라일라의 질문을 들으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이 제법 높았다.

    라일라도 현석을 따라 천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체 왜 거길 보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내렸다.

    현석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었기에 라일라는 다시 천장을 봤다가 현석을 보는 일을 반복했다.

    ‘뭐 하는 거지?’

    그녀의 의문은 당연했다. 손님 얘기를 하더니 난데없이 복도 중간에 서서 왜 천장을 보고 있단 말인가.

    라일라의 의문은 바로 풀렸다. 갑자기 현석이 위로 손을 쑥 올렸기 때문이다.

    현석은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냅다 팔을 내리며 바닥에 무언가를 패대기쳤다.

    콰광!

    “크윽!”

    라일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생겨나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멍하니 현석과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시커먼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이게…….”

    현석은 그 사람의 가슴을 발로 한 번 꾹 밟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뒤로 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갔다.

    라일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고는 현석을 따라갔다.

    시커먼 사람은 죽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저 사람은 중간에 발견한 사람에게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된다.

    지금은 현석이 또 어디로 가서 뭘 하는지 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 * *

    콰득!

    바닥에 나동그라진 검은 사내의 가슴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물론 진짜 부서진 건 아니었고 그저 강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게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은 현석이 아니면 다시 깨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녀는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이게 마지막 손님이다.”

    “아, 예. 그, 그렇군요.”

    라일라는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이제 쓰러진 사람을 확인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저들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파악해 냈으니까.

    현석이 제압한 자들은 모두 커다란 방에 모아뒀다. 그들은 주술력이 엉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현석이 그들을 제압할 때 주술력을 꼬아놓았기 때문이다.

    주술력에 대한 이해나 컨트롤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걸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잡힌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아니, 아마 그런 사람은 메디나툰을 다 뒤져도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주술력을 꼬아 놓은 현석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니까.

    현석 입장에서는 그저 가볍게 밟으며 마력을 흘려 넣어 주술력을 꼬아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어쨌든 그렇게 제압한 자들을 가둔 다음, 배후를 캐냈다.

    라일라가 아무리 온순한 성향을 가진 귀족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도 단호함을 버릴 정도로 무르지는 않았다.

    강도 높은 심문을 지시했고, 차근차근 정보를 뽑아내고 있었다.

    사실 거기에도 현석이 꼬아 놓은 주술력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이런 일에 대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그렇기에 고문이나 심문에 절대 입을 열지 않는 법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의지력도 높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석이 주술력을 꼬아놓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이 뒤틀리고 말았다.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작은 뒤틀림에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다.

    그들의 균형이 뒤틀리며 그동안 차곡차곡 쌓았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 빈틈을 찌르며 심문하면 큰 어려움 없이 정보를 뽑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들은 메디나툰, 아니, 숲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암살, 정보조직인 숲그림자였다.

    라일라의 저택에 숨어 들어온 숲그림자의 수는 무려 20명이나 됐다.

    숲그림자는 한 명을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돈이 50골드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비싼 의뢰비를 자랑했다.

    한데 무려 20명이라니. 소문으로만 판단해도 1000골드나 썼다는 뜻 아닌가.

    문제는 숲그림자는 잡았지만 그들을 움직인 배후는 못 찾았다는 점이다.

    당연했다. 의뢰를 받은 숲그림자의 수뇌부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였으니까.

    현석이 라일라를 쳐다봤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라일라는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왕이 되어야겠어요. 아니면 왕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자신은 있고?”

    현석의 물음에 라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현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절대 안 되겠죠.”

    절망적인 말을 꺼내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라일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현석에게 물었다.

    “얼마나 강하신가요?”

    현석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얼른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숙련된 전사 백 명을 홀로 대적하실 수 있나요?”

    라일라는 현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다음 질문을 했다.

    “메디나툰의 대전사와 싸워 이기실 수 있나요?”

    현석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단정해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긴 했다. 메디나툰의 대전사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으니까.

    “그가 숙련된 전사 100명을 동시에 상대했나?”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게 그의 전부라고 어떻게 단정하지? 그리고 다수를 상대하는 것과 한 명의 강자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라일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석은 그런 라일라를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싸운다면 내가 이기겠지.”

    현석의 말에 어린 자신감을 읽은 라일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현석이 그렇게 말한 건 어느 정도 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메디나툰에 만일 현석을 이길 만한 강자가 있다면 들어오자마자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하 수로에 들어가 숲 전체를 조망했을 때 분명히 그 존재가 감각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한데 전혀 없었다. 숲 전체를 통틀어 현석을 긴장시킬 만한 강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이 사람이건 마수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라일라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도와주세요.”

    현석은 그런 라일라를 담담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일을 이렇게 정리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메디나툰의 대전사는 모든 숲을 통틀어 가장 강한 자로 일컬어진다.

    실제로도 그랬다.

    현 메디나툰의 대전사 무팔룬은 일반적인 부족의 대전사 열 명과 동시에 싸워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강자였다.

    지금까지 메디나툰의 대전사는 언제나 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메디나툰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메디나툰은 숲 전체를 아우르는 마법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또한 메디나툰을 방어하는 탑과 구체에 공급되는 막대한 주술력이 흐르는 길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곳에 모이는 주술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 막대한 주술력이 흐르는 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자가 된다.

    게다가 메디나툰에서는 대전사로 선택되면 특별한 과정을 통해 압도적인 강자로 올라서게 된다.

    그것은 오직 대전사에게만 허락되어 있었다. 대전사로 선출되는 과정 자체가 누군가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 메디나툰이라는 도시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중간쯤 가던 전사가 대전사로 선택되어 단숨에 최강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일도 흔히 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대전사를 뽑는 과정이나 그가 특별한 과정을 거쳐 최강자로 거듭나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아직도 수많은 가문에서는 도시가 대전사를 선택하는 조건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시원하게 그걸 밝혀내지 못했다.

    심지어 전사가 아닌 사람이 대전사로 선택된 경우도 있기에 그저 강하기만 해서는 절대 대전사가 될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어쨌든 이번 대전사인 무팔룬도 그런 과정을 통해 대전사가 되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대전사로 선택되던 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도 강렬하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숲 전체가 불타오르는 환상을 봤다. 그것도 하늘 꼭대기에서.

    그 숲의 불이 하나로 모이더니 자신의 머릿속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그 화끈한 고통과 충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무팔룬은 그걸 끝까지 견뎌냈다. 정신을 잃지 않고 버텨낸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있다. 당시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무수히 많고, 그 중에서 그걸 가장 오래 버텨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그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도.

    그 경험에 비하면 솔직히 대전사를 위해 마련된 특수한 과정이라는 것은 정말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말 그대로 대전사만을 위해 마련된 석실에 들어가 그곳에서 알려주는 무예를 수련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실제로 자신이 가진 강한 힘은 숲의 불을 견뎌낸 그날 생겨났으니까.

    대전사의 과정은 그 힘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아주 중요한 과정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과 경험을 들이면 결국 언젠가는 오를 수 있는 경지이기도 했다.

    대전사의 과정은 그 시간을 대폭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만은 없었다. 아니, 아주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곳 메디나툰에, 그리고 메디나툰을 품고 있는 이 거대한 숲 전체에.

    무팔룬은 어느새 대로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을 지나 커다란 공터에 도착했다.

    공터라기보다는 공원에 가까운 아름다운 곳, 라일라의 저택이 있는 장소에 말이다.

    “여긴가?”

    무팔룬은 얼마 전 말리쿤으로부터 라일라가 위험할 뻔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라일라는 메디나툰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귀족이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닌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전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찾았다.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아주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일이지.”

    메디나툰의 그 오랜 역사 동안 대전사가 하나의 귀족가문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상 그 끝은 비참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무팔룬은 절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메디나툰에 있는 귀족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라일라의 손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그저 홀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중에 왕이 선출되면 어떻게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될 문제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왕이 되겠다는 귀족을 지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만일 정말로 내 생각이 맞다면, 좀 의외이긴 하군. 다른 귀족은 몰라도 라일라는 끝까지 왕의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무팔룬은 피식 웃었다.

    “하긴, 전쟁을 막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 그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택 앞으로 걸어갔다. 그 역시 전쟁을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라일라를 지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전쟁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과연 전쟁이 벌어지면 내가 거기 참여하게 될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무팔룬은 상념을 접고 걸음을 빨리했다.

    정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무팔룬은 성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 메디나툰의 대전사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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