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백의 알 >
“흐음. 복면을 쓴 걸 보면 뒤가 아주 구린 놈들인가 본데?”
라이언이 담장 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슥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있었다. 복장은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그 안에서도 묘한 통일감이 느껴졌다.
아마 같은 조직인데 일부러 복장을 다르게 한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구분할 명확한 뭔가가 있을 텐데 정말 잘 가렸네요.”
류지혜의 말에 라이언이 손가락을 들어 한 놈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더 정밀하게 확인하면 그자의 몸통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몸통에 자기들한테만 보이는 띠를 감았어.”
“자기들만 볼 수 있다고요?”
라이언은 대답 대신 류혜연을 바라봤다.
류혜연은 일행의 시선이 모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자기들만 보이는 끈을 몸통에 칭칭 감고 있어요.”
양세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대체 그걸 어떻게 볼 수 있는 건데?”
류지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슬슬 적응이 되고 있거든요.”
“적응?”
류혜연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마력이요. 아니, 여기선 이걸 주술력이라고 하나요?”
그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주술력을 감지할 수 있단 말이야?”
“마력만큼 능숙하게는 못 해요. 그래도 저 정도로 조잡한 물건을 꿰뚫어볼 정도는 돼요.”
다들 멍하니 류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저탹을 포위한 적을 노려봤다.
류혜연도 했고 라이언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언젠간 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저놈들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공격 준비를 하는 건가요? 당장 달려들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대체 저놈들 목적이 뭐지? 여길 칠 거면 그냥 달려들어서 다 죽여 버리면 될 텐데 말이야.”
“그렇게 하기엔 뭔가 걸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 아닐까요?”
“걸리는 거?”
“예를 들면…… 이 저택 주인, 라일라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커서 함부로 죽일 수 없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에요.”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그럼 이렇게 포위하고 위협하는 건 괜찮고?”
“이 정도야 나중에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다고 보는 거겠죠.”
“나중에 수습한다고?”
류지혜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을 뽑고 전쟁을 시작한 다음에요.”
그 말에 라이언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일단 전쟁을 시작하고 나면 아무리 라일라가 반대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한데 그렇게 할 정도로 라일라의 영향력이 크다면 그녀가 없는 채로 전쟁을 결정하기 어렵지 않을까?
“협박은 이쪽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라이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류지혜와 포위한 적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나중에 분열해서 제대로 뭘 해보지도 못할 텐데? 굳이 숲을 통일시켜서 하나로 만들어 놓고 둘로 쪼개질지도 모를 일을 한다고?”
“그거야 나중 일이잖아요. 전쟁 이후의 일.”
그제야 라이언은 류지혜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머리 좀 쓰네?”
류지혜가 쑥스럽게 웃었다.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대충 추측만 해본 거예요. 그게 아닐 수도 있어요.”
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맞을 거 같아.”
그렇게 말한 라이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어느새 그는 저택을 포위한 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해야 할지는 너무 뻔하지?”
박승희가 말없이 활을 당겼다. 활에는 화살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활줄을 당긴 다음 그것을 가볍게 놓았다.
슈슈슈슈슈슉!
무수한 마력의 화살이 쏟아져나갔다. 그녀가 최근 얻은 스킬 화살비였다.
“막아!”
“피해!”
마력의 화살이었지만 눈에 훤히 보였기에 적들이 그것을 막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방패를 가진 사람은 서둘러 방패를 들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급히 몸을 피했다.
라이언은 그 모습을 보며 한껏 몸을 웅크렸다.
이내 화살비가 적진에 내리 꽂혔다.
꽈과과과과광!
바닥이나 방패에 꽂힌 화살이 큰 폭발을 일으켰다.
모든 화살이 폭발한 건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폭발형 화살이 섞여 있었다.
박승희가 워낙 그것을 잘 퍼트려 배치해서 거의 적진 전체에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라이언이 웅크렸던 몸을 쫙 펴며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그 뒤를 바로 이어 추광열이 날아가듯 쫓아갔다.
“우리도 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류지혜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팀 메인퀘스트가 완벽한 진형을 갖춘 채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대체 이 알의 정체가 뭐지?’
현석은 감각에 걸려든 순백의 알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좀처럼 분석할 수가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거니와 알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마치 현석의 감각을 차단하기라도 하듯 모든 이질적인 마력이나 힘을 다 튕겨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주술력은 대부분 저 알에 공급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궁금했다. 이 알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막대한 주술력을 공급하는 마법진을 만든 건지.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 마법진은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규모나 정교함을 보건대 절대 평범한 존재가 만든 건 아니었을 것이다.
‘최소 마탑주.’
최소한 마탑을 만든 바벨 정도는 되어야 이런 규모의 마법진을 만들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바벨이라도 마법진의 규모가 너무 컸다.
수백 개의 부족이 살고 있는 거대한 숲을 모두 아우를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정교한 마법진인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지하 수로를 이용한 거겠지만.’
아마 지상에 만들었다면 이 정교함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숲에는 지하에 마법진을 훼손할 만한 요소가 아예 없었다.
작은 벌레나 지렁이 하나 없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역시 마법진의 효용 중 하나였다. 특이한 파장을 가진 주술력을 끊임없이 뿜어내 땅속에 사는 생명체를 모조리 쫓아내고 있었다.
어쨌든 현석은 이대로는 순백의 알에 대해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저기로 직접 가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거기로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순백의 알은 정말 깊은 땅속에 있었는데, 거기까지 구멍이 뚫려있는 게 아니라 그냥 동떨어진 동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땅을 파고들면서 가야 한다는 건데…….’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불가능에 가깝다.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현석은 서서히 눈을 떴다. 일단 여기서 알아볼 건 다 알아봤다.
“그럼 이젠…….”
다음 할 일을 정해야 한다. 순간 현석의 뇌리에 하툰 부족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은밀한 시선의 주인이 떠올랐다.
왠지 이번 일과 그 사람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 있던 강.’
이 지하수로로 이루어진 마법진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강이었다.
강은 마법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진의 일부인 건 분명했다.
그건 왜 밖으로 드러나 있을까?
애초에 마법진을 디자인할 때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다. 즉, 뭔가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돌아가야겠군.”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로에서 나왔다.
수로에서 나와 다시 위로 올라가는 현석의 뇌리에서 순백의 알이 점점 또렷하게 형체를 잡아갔다.
그저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으로만 확인했기 때문에 사실 순백이라는 느낌만 받았고, 모양만 파악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기에 명확한 모양을 잡아내진 못했었다.
한데 지금은 마치 진짜 그 알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로 또렷하고 명확하게 순백의 알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이내 순백의 알 표면에 난 세밀한 문양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가 잡혀 버렸다.
‘이건 마치…… 자신을 얼른 데리러 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군.’
현석은 묘한 기분에 휩싸여 처음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단숨에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거대한 숲에 어둠이 서서히 드리워져갔다.
* * *
“뭐?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메디나툰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세력을 가진 세 귀족 중 하나인 말리쿤은 보고하는 수하 전사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수하 전사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는지라 눈동자 한 번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다시 대답했다.
“투입한 부대가 전멸했습니다.”
“전멸? 300명이나 보냈는데 전멸했다고?”
“아무래도 진짜 전사가 아닌 수준이 떨어지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는지라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모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리쿤이 와락 역정을 냈다.
그러자 수하 전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실 그도 이렇게 보고하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휘하던 30명은 진짜 전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놈들도 아직 전사라 칭하기엔 부족해도 충분히 제 한몫은 해낼만한 힘을 가졌어.”
말리쿤은 말하다보니 조금 흥분이 가라앉는지 말투가 점점 차분해졌다.
“그리고 라일라의 저택에는 고작 20명 정도 되는 전사밖에 없었고. 제법 강력한 전사이긴 하지만 라일라를 지키면서 싸워야하고, 수가 모자라니 그들만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었을 터.”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사의 말에 말리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번득였다.
“아주 확실히 알아봐라. 어쩌면……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을 수도 있으니까.”
“예. 곧 결과를 들고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리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정말 질긴 여자로구나.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더니 이번에도 또 빠져나갔어.”
“당분간은 손쓰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힘들지. 그 여자를 따르는 멍청한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말리쿤이 그렇게 말하며 수하 전사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비밀이 드러날 만한 흔적은 싹 지웠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완벽합니다.”
“그래. 믿겠다.”
애초에 이런 일을 가장 잘하는 수하이기에 그에게 시킨 것이다.
사실 이번 일은 이들과 직접 작전에 참여한 300명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
애초에 그 300명은 버릴 작정이었다.
일이 모두 끝났을 때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들도 싹 죽일 계획이었다.
물론 그 시점은 전쟁에 들어간 뒤였다. 그 300명을 이끄는 자도 따로 준비해뒀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눈치채지 못하게 충분히 준비를 했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말리쿤은 설마 이번 작전이 실패할 거라고는 요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후, 젊은 전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말리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조력자?”
말리쿤이 수하 전사를 바라봤다. 대체 그런 조력자가 있는데 왜 모르고 있었느냐는 추궁의 눈빛으로.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이건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우연이 여러 번 겹쳐 이루어진 변수였다.
그 조력자들은 정말 뜬금없이 나타났다고 한다. 알아보니 라일라와도 별다른 접점이 없는 자들이었다.
물론 라일라가 그동안 준비한 비밀 전사들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라일라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이번 전투로 그 조력자들도 많이 다쳤다고 합니다.”
마지막 보고에 말리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력자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파악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큰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수하 전사가 다급히 말했다.
“그들도 전사입니다. 아마 회복이 굉장히 빠를 겁니다.”
“그래. 그러니 최상의 상태를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지.”
“당분간은 손대기 힘듭니다.”
아까 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지금은 라일라를 건드려선 안 된다.
말리쿤이 수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더없이 음험하고 잔인한 미소였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왠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어.”
수하 전사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감 얘기가 나오면 말리쿤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그 예감이 틀렸던 적이 거의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이 불길한 예감은 또 뭐지?’
수하 전사는 묘한 불길함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 순백의 알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