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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65화 (265/326)
  • < 지하수로 2 >

    밖으로 나온 현석은 거침없이 어딘가로 걸어갔다. 마치 이 근방 지리를 아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물론 그럴 리는 추호도 없었다. 현석은 이곳 메디나툰에 오자마자 여관에 틀어 박혀서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비록 하루지만 정보를 얻겠다고 온통 쏘다녔던 나머지 일행이 훨씬 더 근방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거침없이 걸어가니 혹시 예전에 여기 와 봤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현석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러니 의심이 더 짙어졌다. 대로도 아닌 이런 복잡한 골목은 길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된다.

    현대 지구의 잘 발달되고 제대로 정비된 도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곳의 골목은 말 그대로 미로나 다름없었다.

    현석은 그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라가던 일행들도 현석이 이 골목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걸음에 너무나 거침이 없었다. 길을 알지 못하면 저렇게 자신 있게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한데 그게 아니라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어? 여기 아까 지났던 길 같은데요?”

    일행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류혜연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나머지 일행의 시선이 의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현석은 전혀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걸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긴가민가한 의심의 시선은 결국 명확한 황당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같은 길을 세 번이나 지나가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이제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지? 우리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건데?”

    결국 라이언이 나서서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석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현석은 눈을 빛내며 방향을 바꿨다.

    “찾았다.”

    일행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현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시 현석의 뒤를 따라가던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터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복잡한 골목 사이에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실 공터라기보다는 공원이나 정원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장소였다.

    바닥에는 온갖 풀과 꽂이 가득했고, 길을 따라 평평한 돌이 박혀 있었다.

    그 길의 끝에는 제법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서 있었다. 담장이 높지 않아 안이 훤히 보였는데, 저택 안에도 이와 비슷한 정원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오시려던 데가 여기인가요? 정말…… 예쁜 집이네요.”

    옆으로 다가온 류혜연의 말에 다들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예쁜 집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다른 부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예? 여기에요?”

    다들 멍하니 현석과 집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다른 부족 사람들이 이런 집에 왜 모여 있단 말인가.

    “그리고…….”

    현석이 주변을 슥 둘러봤다. 공터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건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이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밖으로 이어진 골목이 보였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부족 사람들이다.”

    “예? 정말요?”

    다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만일 저기 보이는 작은 집들에 다른 부족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그 수가 정말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그리고 다른 부족 사람들은 또 왜 여기 모여서 살고 있고?”

    라이언이 답답한 얼굴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현석은 대답 대신 저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답답했지만 라이언과 일행은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안에 들어가면 다 알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말이다.

    현석 일행이 저택 앞에 도착하자, 문이 저절로 천천히 열렸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당연히 나머지 일행도 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걸음에도 역시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모두 들어가자 저택 문이 저절로 닫혔다.

    현석은 안쪽 건물이 있는 곳까지 멈추지 않고 쭉 걸어갔다.

    그러자 건물에서 상당히 세련된 옷을 갖춰 입은 노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현석 일행을 향해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주인님께서 안으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노인, 저택의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봤다.

    사실 내부는 평범했다. 아마 이 저택이 크락실리아에 있었다면 일행이 이렇게 호기심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곳 메디나툰의 분위기는 사실 이 저택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다른 저택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보통 거리에 있는 다른 집이나 여관만 봐도 분위기가 이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쨌든 집사는 현석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크락실리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저택과 아주 흡사한 구조였다. 심지어 응접실도 그랬다.

    소파에 앉은 일행은 응접실 안을 슥 둘러본 다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저택이 특이한 거 맞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여관만 해도 분위기가 이거랑은 전혀 다르잖아요.”

    “맞아요. 이곳 분위기는 뭐랄까, 좀…… 동양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나요?”

    “이걸 동양적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런데…… 기와집이 있거나 그런 건 또 아니잖아?”

    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동양적이라고 하는 편이 맞긴 했다.

    그렇게 잠시 저택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응접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 사람에게 꽂혔다. 다들 눈이 반짝였다.

    들어온 사람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젊고 아름다운.

    “우리 집에 손님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라일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라일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확 보였다.

    현석 일행도 저마다 인사를 했다. 최대한 정중함을 잃지 않으려 다들 애썼다.

    그렇게 잠시 인사의 시간이 오갔다. 라일라의 시선은 일행을 분주하게 오갔지만, 사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모든 신경은 현석에게 가 있었다.

    “자, 이제 인사는 많이 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라일라는 분위기를 한 차례 환기한 다음 일행을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대체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현석이 라일라를 똑바로 보며 반문했다.

    “다른 부족 사람들을 모으는 이유가 뭐지?”

    현석의 질문에 라일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 버렸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현석이 피식 웃었다.

    “티가 나니까.”

    “티가…… 난다고요?”

    현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웬만큼 힘 있는 귀족 가문에서는 이 장소를 다 알고 있을걸?”

    “그럴 리 없어요.”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신중하게 준비했고, 또 얼마나 관리를 철저히 했는데 그걸 들킨단 말인가.

    “분위기를 보니 정말로 모르는 모양이군.”

    “뭘 모른단 말이죠?”

    “메디나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면, 이 도시에 들어오는 순간 몸에 낙인이 찍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낙인이 찍힌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현석은 왜 그냥 여기로 들어왔단 말인가.

    하지만 일행의 놀람은 라일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일라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그럴 리 없어요!”

    현석은 라일라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이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었군.”

    현석은 처음 메디나툰에 들어올 때, 도시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한 구체로부터 나온 특별한 주술력이 몸에 파고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본능적으로 그걸 분석해 파훼했다. 당연히 일행의 몸에 파고드는 주술력도 다 흩어 놓았다.

    그러면서 그 주술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낙인이었다.

    나중에 언제든 집어낼 수 있고, 배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표적을 심어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위 귀족들은 거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다. 한데 라일라는 아예 짐작조차 못한 모양이었다.

    “별로 높은 귀족은 아닌가보지?”

    “흥. 무슨 소릴. 이래 봬도 메디나툰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귀족이랍니다.”

    현석은 그 말에 확신했다. 아직 그것에 대해 아는 귀족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아무도 모를 수도 있고.’

    어쨌든 현석은 그걸 이용해서 여길 찾아왔다. 낙인찍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우글거리는 곳은 여관을 제외하면 이곳뿐이었으니까.

    “어쨌든 왜 다른 부족 사람들을 모으는 거지? 전쟁이라도 벌이려고?”

    “틀려요! 전쟁을 막으려는 거예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초보적인 유도심문에 걸려들다니, 이게 다 낙인이라는 말에 흥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분해진 안색으로 현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현석 뒤에 서서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을 한 차례 훑어봤다.

    “전쟁이 벌어지는 걸 막으려는 거예요. 숲의 평화가 깨지지 않게 하려는 거라고요.”

    현석은 고개를 돌려 일행을 쳐다봤다. 마치 이제 답이 되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류혜연이 멍하니 라일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애쓰는 분이 계셨네요. 안심이에요.”

    류혜연의 말에 라일라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봤다.

    “혹시 절 도와주러 오신 분들인가요? 어느 부족에서 오셨죠?”

    현석은 그 질문에 전혀 엉뚱한 답을 해 주었다.

    “그래도 전쟁은 일어날 거다.”

    라일라가 발끈해서 현석을 노려봤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예요.”

    “무슨 수로?”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대안이 없었다. 아니,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좀 모자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전쟁을 억제할 순 있을 것이다.

    현석이 그녀의 표정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왕이 되려고?”

    라일라가 화들짝 놀라 현석을 바라봤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른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걸 본 현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확인했으니 됐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다들 당황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냥 가시게요?”

    류혜연의 물음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다음 일을 확인한 뒤로 미루지.”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몇 걸음 걷다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돌아섰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일행과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너희는 당분간 여기 남아 있어라. 어쩌면…… 힘을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여기 남으라고요?”

    류지혜가 황당과 당황이 뒤섞인 표정으로 현석과 라일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남고 싶다고 그냥 남을 수가 있나? 집 주인인 라일라가 허락을 해야 가능한 일이지.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분간 다들 여기서 지내세요. 불편함 없이 대접해 드리죠. 어쨌든…… 오랜만에 오신 손님이니까요.”

    현석은 라일라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마 나중엔 고마워하게 될 거다.”

    “과연 그럴까요?”

    현석은 피식 웃고는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어?”

    라이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현석이 나간 응접실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도 덕분에 여관보다 훨씬 좋은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잖아요. 안 그래요?”

    류혜연이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라이언이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처음에는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어서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현석이 아무 이유 없이 이들을 이곳에서 머물라고 했을 리 있겠는가.

    ‘힘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까는 워낙 황당하고 당황해서 상황이 얼른 머릿속에 안 들어왔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현석의 조치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위험할 수도 있긴 하겠네.’

    류지혜는 라일라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라일라의 물음에 류지혜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당분간 잘 부탁드려요.”

    라일라는 멍하니 류지혜를 바라봤다.

    “아마 고마워하실 날이 곧 올 거예요.”

    그 말에 라일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 * *

    밖으로 나온 현석은 지하에 흐르는 주술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사실 원래는 라일라의 저택에서 현석도 잠시 머물 생각이었다.

    한데 이렇게 밖으로 나온 건 그 안에서 이 주술력의 흐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아주 명확한 흐름이었다. 저택의 위치가 아주 절묘했다.

    아마 여길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흐름을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흐름이 아주 약해졌으니까.

    어쨌든 희미한 느낌에 집중해서 그 흐름을 따라 걸어갔다.

    어느새 현석은 메디나툰을 벗어났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긴가?”

    현석은 나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리고 강하게 힘주어 밀었다.

    뿌드득!

    그 거대한 나무가 그대로 뽑혀 쓰러졌다.

    뽑힌 나무 아래로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 지하수로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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