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나툰으로 2 >
현석은 한참을 걸어가다가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자 일행이 모여들어 지도를 기웃거렸다.
“제법 많네?”
라이언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지도에 그려진 부족의 위치가 100개를 훨씬 넘었다.
각각 규모도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작은 규모의 부족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툰 족은 중급 규모의 부족이었는데, 그 정도 규모의 부족도 수십 군데가 넘었다.
대규모로 표시된 부족은 모두 7개가 있었고, 메디나툰은 도시라고 적혀 있었다.
대충 규모를 추정해 보니, 대규모 부족 7개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듯했다.
“이렇게 보니 메디나툰인지 뭔지가 정말 대단해 보이는데?”
메디나툰과 다른 부족들을 비교하면 도시와 마을보다 차이가 더 컸다.
“거의 나라가 하나 있는 거나 다름없겠는데요?”
7개의 대규모 부족을 보면 인구가 각각 20만 정도였다. 굉장한 수였다.
말이 20만이지 그 정도면 커다란 도시 규모의 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부족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메디나툰은 작은 왕국 정도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숲이 굉장히 크네요.”
지도는 제법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기준으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로 큰 물체를 이용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큰 샘물이나, 거대한 바위, 혹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높은 나무 같은 것들 말이다.
거리에 대한 비율도 제대로 맞춰져 있었다. 그냥 대충 그린 지도가 아니라 누군가 직접 발로 뛰면서 그린 것이다. 아니면 하늘 높이 올라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렸거나.
“그나저나 여기 꼭 가야 하나? 너무 먼데?”
라이언의 말 대로 하툰 족이 있는 곳과 메디나툰이 있는 곳은 거의 극과 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숲을 전부 돌아다녀 본 건가? 이 표시 숲의 끝이라는 거 같지 않아? 그리고 여기 이 거대한 산은 킹 젤리웜이고.”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지도를 봤을 때부터 확인한 부분이었다.
문득 하툰 족에 있었을 때 느껴진 그 시선이 떠올랐다.
‘그 사람일지도.’
왠지 그 시선의 주인이 이 지도를 만든 장본인 같았다.
현석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접고 걸음을 옮겼다.
지도에 나온 대로 표시된 부족을 따라 메디나툰까지 이동하는 것이 먼저였다.
사실 지도가 있으니 그냥 메디나툰까지 직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가장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석은 지도에 표시된 대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 이유가 있겠지.’
이것이 싸킨의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아마 그 시선의 주인이 원하는 일이리라.
그리고 현석의 감이 그 시선에 담긴 호의를 정확히 포착했다.
‘뭐…… 그렇게 많이 차이 날 것 같지도 않고.’
현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가장 가까이 표시된 부족, 아드미 족을 향해서.
* * *
“그 목걸이의 위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은데요?”
류지혜가 현석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말했다.
현석 일행이 아드미 부족에 도착했을 때, 부족 입구를 지키던 전사가 현석을 발견하자마자 부족 전체를 깨웠다.
현석은 이곳에서 그야말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물론 그저 들렀다가 그냥 지나치는 부족이었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그들의 정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부족을 떠날 때는 족장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어찌나 아쉬워하는지 현석 일행은 순간 여기서 하루 정도는 머물렀다가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아드미 족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나는 모든 부족에서 현석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중간에 자고 갈 일이라도 생기면 다들 어찌나 반가워하고 좋아하는지 대체 이들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푹 쉬고 아침 일찍 부족을 떠난 현석 일행은 아주 가뿐한 몸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극진히 대접을 해주니 편해서 좋긴 하지만 왠지 좀 이상했다.
고작 목걸이 하나 있다고 모든 부족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툰 족과 가까이 있는 부족이야 그렇다 쳐도 이제는 단순히 왕래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왔는데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지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현석 일행은 그냥 대충 부족에 들렀다가 밥만 먹고 잠만 자고 떠나지는 않았다.
각 부족에서 최대한 정보를 얻으려 애썼다.
당연히 하툰 족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봤다. 하툰 족에서 받은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정보의 양을 늘려가고 그걸 정리하면서 메디나툰이나 이곳 거대한 숲의 정체를 조금씩 파악해 가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 들른 부족에서는 하툰 족에 대해 아예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현석 일행이 쓰는 지도는 정말 굉장한 보물이었다. 어느 부족에서도 이런 지도를 만들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심지어 메디나툰에 가더라도 이런 지도는 구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보물인가.
류지혜는 그걸 현석이 차고 있는 목걸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냥 목걸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우릴 너무 숭배하는 거 같지 않아?”
“예? 숭배라고요?”
류지혜는 라이언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극진히 대접해준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숭배라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류지혜를 비롯한 모든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민가한 것이다.
이럴 때 답을 구할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다들 일제히 현석을 바라봤다.
물론 현석은 이런 걸 차분히 설명해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현석은 지도를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봤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있어서 아차하는 순간 걸려 넘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현석은 앞도 보지 않고서 잘도 걸어갔다. 지도를 보면서 걷는데도 전혀 흔들림도 없었고, 길을 잘못 찾지도 않았다.
아주 정확히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현석이 이렇게 계속 지도를 파고드는 이유는 이 지도를 만든 존재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분명히 지도에 뭔가 특별한 표식을 남겼을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거의 틀린 법이 없기에 현석은 반쯤 확신을 갖고 지도를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좀처럼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도 일행은 차근차근 메디나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중국의 퀸급 던전 생성지역은 다시 원래의 체제로 돌아갔다. 대련방주의 야욕이 한풀 꺾인 것이다.
대련방주는 반으로 줄어든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던전 생성지역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립각을 유지하던 레드드래곤 길드에 인원이 보강되면서 다시 관리체계가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한 번 흐트러졌던 사람의 마음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소정화는 그 부분이 정말 불안했다. 대련방주의 섣부른 행동이 분열의 씨앗을 심은 셈이 되었다.
만일 레드드래곤 길드나 피라밋 암시장이 대련방이 한 일에 앙심을 품고 나서기로 작정하면 정말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을 빌미로 대련방이 흑시에서 퇴출될 위험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흑시라 해도 이 지역에서 대련방을 배제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정화는 이대로 잘 마무리만 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장춘은 생각보다 융통성도 있고, 분란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소정화가 중간에서 잘하면 얼마든지 관계를 예전으로 돌릴 수 있었다.
사실 자신도 있었다. 그녀는 이와 비슷한 일을 처리한 경험이 많았다.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중재를 마무리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문제는 대련방주였다.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돌아갈 때 대련방주의 표정이나 눈빛이 소정화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절대 포기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대련방주가 또 움직일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과감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설 수가 없어.’
아무리 나서서 관계를 회복시키면 뭐 하겠는가. 결국 이들의 뒤통수를 한 번 더 후려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원망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소정화는 굳이 자신이 모든 짐을 지기 싫었다.
‘그리고…… 왠지 방주님의 다음 계획도…… 성공할 것 같지가 않아.’
그녀의 눈에 이번에 추가 파견된 레드드래곤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왠지 다들 심상치 않아 보였다. 레드드래곤 길드에서 작정하고 실력자들을 보낸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길드나 조직이 끼어들었거나.’
* * *
“여기가 메디나툰이로군요. 진짜 크긴 크네요.”
메디나툰은 다른 부족들과는 많이 달랐다. 입구를 지키는 전사가 없었다.
누구나 원하면 메디나툰에 들어올 수 있었고,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인구가 엄청났다. 메디나툰에 들락거리는 사람들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였다.
류지혜는 눈을 빛내며 메디나툰으로 들어섰다. 사방을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 옆에 슬며시 따라붙은 라이언이 말했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 복장이나 장비를 보면 대부분 전사들이야. 이렇게 전사가 많이 들락거리니 입구를 지킬 필요가 없지.”
보통 부족의 입구를 지키는 전사의 역할은 혹시 올지 모르는 마수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대적인 부족이 오면 안쪽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메디나툰의 경우 이곳을 적대할 만한 부족이 아예 없었다.
메디나툰 자체가 가진 힘이 워낙 대단해서 숲의 모든 부족이 힘을 모아 달려들지 않는 한, 생채기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마 밤에는 여길 지키는 전사가 수십 명 정도 나오지 않을까?”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모은 메디나툰에 대한 정보 중에 이곳의 입구를 지키는 전사가 없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일제히 현석을 바라봤다. 그건 그냥 본능적인, 아니,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대부분의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답을 들은 적은 많지 않지만 말이다.
일행은 현석이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의 고개가 현석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현석은 메디나툰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첨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첨탑의 꼭대기에는 커다란 구체가 떠 있었다. 가까이 있긴 하지만, 첨탑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분명히 허공에 떠 있었다.
“저게 메디나툰의 수호신이야.”
그 말에 다들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현석을 바라봤다.
“수호신이라고요?”
현석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저 첨탑과 구체로부터 굉장한 힘이 느껴졌다. 마력이긴 하지만 비틀린 마력, 주술이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비틀려 있어서 그 힘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았다.
아마 현석 일행 중에서 그 힘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주술의 힘을 다루는 사람들도 저 첨탑과 구체에 깃든 주술력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교묘하고 은밀했다.
힘이 워낙 거대했기에 현석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흐름과 구조를 쉽게 분석할 수 있었다.
애초에 흐름과 구조가 복잡하지 않았다. 기능 자체도 아주 단순했다.
말 그대로 이 도시, 메디나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메디나툰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다가오는 적을 감지는 것이 첨탑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구체는 그것을 공격한다. 강력한 주술력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저 첨탑과 구체의 영향력은 이곳 메디나툰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하긴, 저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모으고 컨트롤 하려면 보통 규모의 마법진으로는 어림도 없지.’
마법진 자체가 도시 규모로 거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메디나툰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저 마력이 다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건데…….’
주술을 이용해 감시망을 항상 발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마력이 필요하다. 마력의 원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저 첨탑과 구체는 마력을 빨아들이고 쓰기만 하지 모으는 기능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마력의 원천이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현석은 그 부분에 관심이 갔다.
‘어쩌면…….’
현석의 눈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찾던 무언가가 이곳 메디나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쉴 곳부터 정할까요?”
류지혜의 말에 현석은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곳 메디나툰은 다른 부족과 달리 현석 일행에게 다가와 숭배하듯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류지혜가 앞장서서 걸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여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향하는 류지혜의 뒤를 현석 일행이 따라갔다.
그리고 현석은 그 와중에도 도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주술력의 흐름을 차근차근 파악하고 분석해 나갔다.
< 메디나툰으로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