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의 부족들 3 >
싸이프가 데려간 곳은 일행이 싸운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금방 찾기는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빽빽한 나무가 하툰 부족으로 가는 길 곳곳을 마치 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일부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일부는 하툰 부족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벽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다 같다고 여겼는데 계속 반복해서 보다 보니 조금씩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구분하든 말든 별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그것보다는 여기까지 오는 길을 외우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나무로 이루어진 벽을 따라 걷다보니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일 정도로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싸이프는 공터 안으로 쑥 들어갔다.
곳곳에 나무로 만든 집들이 보였다. 제법 커다란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십여 명의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싸이프를 맞아주었다.
“싸이프! 무슨 일이야? 아직 순찰을 돌고 있을 때잖아. 어? 뒤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지?”
모여든 전사들은 싸이프 뒤에 있는 현석 일행을 발견하고 긴장했다.
은밀히 마을 안쪽에 신호도 보냈다. 만일 적이 들어온 거라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이쪽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현석 일행의 뒤를 따라 들어온 동료들이 하나씩 들고 오는 칭칭 묶인 자들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쿠다툰을 발견했다.
“어? 쿠다툰이다!”
“뭐? 쿠다툰?”
“어디! 어? 정말이네!”
“파쑨도 있어!”
다들 깜짝 놀라 잡혀온 디룬 족 전사들과 싸이프를 번갈아 바라봤다.
싸이프는 뭔가 설명을 좀 해주려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족장님부터 뵙고 나중에 얘기해주지.”
싸이프가 먼저 움직이자,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 * *
하툰 족 족장은 싸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각보다 젊은 사내였다.
싸킨은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를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도 마치 노려보는 것 같았다.
싸이프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정확히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보고했다. 예상이나 추측은 족장인 싸킨이 해야지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설명을 끝낸 싸이프는 마지막으로 현석의 요구를 덧붙였다.
“이들이 거점과 정보를 요구했습니다.”
싸킨은 싸이프의 얘기를 모두 듣고는 현석 일행을 슬쩍 바라봤다.
“거점을 제공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우린 친구에겐 무엇이든 제공하니까. 하지만 너희는 아직 우리 친구가 아니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현석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풀어가야 한다.
“어떤 대가를 원하지?”
“글쎄…….”
싸킨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사실 안전만 확보된다면 거점을 제공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부족 내에는 빈 집이 여러 채 있었다. 그 중 감시하기 편한 집을 한 채 내주면 된다.
나머지야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말이다.
현석은 머리를 굴리는 싸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금괴 몇 개를 꺼내 휙 던졌다.
투두둑.
바닥에 금괴들이 떨어졌다. 그걸 본 싸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면 대가가 될까?”
“그거 진짜 금인가?”
“확인해보든가.”
싸킨은 옆에 서 있는 싸이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싸이프가 금괴들을 집어 이리저리 살폈다.
전사의 시선을 통해 살피면 된다. 전사의 힘은 이것이 진짜 금인지, 또 안에 불순물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으니까.
현석은 싸이프가 금을 살피는 걸 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 싸이프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마력을 통해 금을 구분해내고 있어.’
이런 식으로 마력을 이용하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생소하진 않았다.
“진짜입니다. 불순물도 거의 없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정제된 금입니다.”
싸킨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맺혔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집을 제공해줄 테니 싸이프를 따라가도록.”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집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안전한 장소에 있는 공터만 내줬으면 좋겠군.”
“집을 짓겠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뭐, 좋을 대로 해.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빈집이 몇 채 있으니까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까.”
싸킨은 그렇게 말하고 현석과 싸이프를 내보냈다.
“씨하암. 네가 보기엔 어떻지? 저놈 믿어도 될까?”
싸킨의 물음에 장막 뒤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절대 저자를 적대해선 안 됩니다. 최대한 호의를 보여주십시오.”
“호의를 보이라고?”
씨하암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직이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방안에 씨하암의 나직한 주문이 가득 찼다. 그가 일으킨 주술의 힘이 크게 일렁였다.
싸킨은 그 힘을 느끼며 크게 감탄했다. 역시 씨하암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그가 보기에 모든 숲의 부족을 다 통틀어도 씨하암보다 뛰어난 주술사는 없었다.
이내 주문이 끝났다. 일렁이던 주술의 힘이 씨하암의 지팡이에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허억! 허억!”
씨하암이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지팡이를 공손히 내밀었다.
싸킨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았다.
주술력이 모조리 싸킨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그것은 팔을 타고 위로 올라가더니 싸킨의 머리를 장악했다.
싸킨은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씨하암이 그런 싸킨의 모습을 무저갱처럼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여긴 우리 부족의 중심이기도 해. 근처에 전사의 훈련장도 있으니 안전으로는 여기가 최고지.”
현석은 싸이프가 안내해준 장소를 슥 둘러봤다.
상당히 넓은 공터였다. 근처에 집이 몇 개 있긴 했는데, 다들 비어 있었다.
“저쪽이 전사의 훈련장이고, 이쪽으로 가면 전사들 숙소가 있어. 외부인을 보면 다들 경계하기 마련이니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싸이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정말로 집을 내주지 않아도 되겠어? 집을 지어본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 부족 주변 숲은 다른 곳과는 좀 달라. 아주 위험하다고.”
“내가 알아서 하지.”
“뭐…… 그럼 그렇게 해. 그럼 좀 쉬라고. 난 부족 회의에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싸이프가 말을 이었다.
“정보에 대한 건 나중에 와서 알려주지. 일단 집부터 짓고 있어. 숲으로 나가는 길은 알지? 기억 안 나면 저쪽에 있는 녀석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싸이프는 그 말을 남기고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제 어쩔 거야? 설마 정말로 숲에 가서 나무를 잘라와야 하는 건 아니지?”
라이언의 물음에 현석은 아공간을 여는 걸로 답을 대신해 주었다.
순식간에 공터 한가운데 아주 멋진 집 한 채가 나타났다.
그걸 보고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랫동안 여길 거점으로 이용하려면 이런 번듯한 집이 있어야 편하다.
“그럼…… 일단 좀 쉬어볼까?”
라이언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집에 들어갔다. 그러자 다들 빙긋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역시 편안히 쉬려면 좋은 집이 있어야 한다.
현석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 멀리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던 전사를 힐끗 쳐다봤다.
입이 쩍 벌어져서 침이 주륵 흐르고 있는데도 모르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집을 마련할 줄은 몰랐으리라.
현석은 집으로 들어가며 이곳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했다.
왠지 여기서도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하툰 족 족장의 집에서 부족회의가 열렸다.
부족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두 명의 큰어른과 전사들을 아우르는 대전사, 그리고 부족의 순찰을 담당하는 싸이프가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싸이프는 여기서도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설명해야 했다. 두 번째 하는 거라 그런지 훨씬 더 조리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족장인 싸킨이 좌중을 슥 둘러봤다.
“이제 어떻게 할지 각자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대전사가 대뜸 나섰다.
“일단 잡아온 놈들부터 처리해야지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싹 죽여 버리면 됩니다. 디룬 족의 전력을 제대로 깎아낼 기회 아닙니까.”
쿠다툰도 그렇고 파쑨도 그렇고 디룬 족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였다.
게다가 그들이 이끄는 전사들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만으로도 디룬 족의 전력을 대폭 깎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안 될 소리. 그렇게 죽이면 전쟁을 피할 수 없네. 이겨도 남는 게 없는 전쟁이 될 텐데,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큰어른 중 하나가 눈을 부릅뜨고 대전사를 바라봤다.
대전사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놈들을 그냥 풀어주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그동안 당한 우리 부족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그럼 그때는 왜 전쟁을 안 일으켰습니까?”
대전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사킨을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듯이 말이다.
“저들도 함부로 전쟁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싸킨의 말에 큰어른들이 대번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족장님. 그렇게 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쿠다툰은 디룬 족 족장이 가장 아끼는 아들입니다. 눈이 뒤집혀서 전쟁을 벌일 충분한 이유가 된단 말입니다!”
“디룬 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족장이 모든 걸 좌지우지 하지 못하는 부족입니다. 아마 다들 반대할 겁니다. 부족이 망하는 길로 이끄는 큰어른은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큰어른이 또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싸킨이 손을 들어 그 말을 막았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소하다고요? 부족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사소한 일이라니요!”
싸킨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은은한 하얀 빛이 맺힌 지팡이였다.
그걸 본 두 큰어른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팡이의 빛이 의미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계, 계시가……!”
“대체 언제 계시를 받으신 겁니까?”
싸킨이 씨익 웃으며 좌중을 다시 한 번 슥 훑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요. 계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어, 어서 확인을…….”
싸킨이 두 큰어른 사이에 지팡이를 내려 놓았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었다.
“허억!”
두 사람의 고개가 뒤로 휙 꺾였다. 부릅뜬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렇게 몇 차례 몸을 뒤틀던 두 사람이 이내 지팡이를 던지듯 놓았다.
“허억! 허억! 허억!”
이렇게 힘들게 받아들인 계시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두려운 눈으로 지팡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대전사와 족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분도 확인하시지요.”
싸킨이 빙긋 웃으며 대전사를 바라봤다.
“난 벌써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 남았으니 같이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싸킨의 말에 대전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지팡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싸이프도 조심스럽게 지팡이에 다가가 대전사와 동시에 그것을 잡았다.
싸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지켜봤다.
* * *
현석은 자신이 아공간에서 꺼낸 집 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족장인 싸킨과 부족의 큰어른이라는 두 사람, 그리고 대전사와 싸이프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말고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곳이 아닌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석은 그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이 담긴 시선이었으니까.
즉, 스킬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현석은 오히려 이곳에 있는 사람들보다 멀리서 지켜보는 그 사람이 더 신경 쓰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을 보유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그가 마음먹으면 이 정도 부족 하나 날려 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이리라.
현석이 그러고 있을 때, 싸킨이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뭔가를 내밀었다.
“일단 이걸 받으시지요.”
싸킨의 말투는 정중함을 넘어서 공손하기까지 했다. 그가 내민 것은 한 뭉치의 서류였다.
현석은 그것을 받아 대충 확인해봤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 몰라 저희 부족이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현석은 이채를 띠고 서류와 싸킨 일행, 그리고 숨어서 지켜보는 시선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숨어있는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냈다.
“잡아오신 쿠다툰을 비롯한 디룬 족 일당의 처분은 어떻게 할까요?”
현석은 싸킨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체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싸킨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잡아오신 분에게 처리할 권한이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킨 뒤에 있는 사람들을 슥 훑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싸이프를 지목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현석은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싸이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전사와 두 큰어른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양쪽에서 압력이 막 들어오려는 찰나, 집에 들어갔던 현석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다들 흠칫 놀라 현석을 바라봤다.
“정확히 네 마음 가는대로 해. 주변 다른 사람 말 듣지 말고. 나중에 내가 확인할 테니까. 어떻게 확인할지는 보면 알아.”
현석이 씨익 웃고는 다시 들어갔다.
대전사와 큰어른들은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분위기를 보니 자신들이 영향을 미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역시…… 그분이다.’
그것이 세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 숲의 부족들 3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