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260화 (260/326)
  • < 숲의 부족들 2 >

    ‘이런 미친!’

    파쑨은 쿠다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연했다. 쿠다툰이 안내하는 방향에는 디룬 족이 없었으니까. 그쪽은 디룬 족이 아니라 하툰 족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하툰 족은 디룬 족과 오랫동안 싸워온 부족이기도 했다.

    하툰 족과 디룬 족의 전력은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 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차례에 걸친 쿠다툰의 미친 짓 때문에 디룬 족이 살짝 밀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쿠다툰이 계속 말썽을 부리면 디룬 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쿠다툰이 하려는 짓은 그동안 해온 미친 짓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쑨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니, 말리지 않았다.

    미친 짓이긴 하지만 잘만 되면 그동안 조금씩 밀리던 기세를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파쑨의 생각은 그렇게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부리고 부족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쿠다툰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를 죽게 내벼려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쿠다툰은 족장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었으니까.

    아마 족장이 나중에 권력을 승계할 때, 쿠다툰의 몫을 상당히 신경 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쿠다툰과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대로 성과만 내면 부족을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된다.

    머릿속으로 한 차례 차분히 계획을 점검한 파쑨은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파쑨의 말에 현석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쿠다툰은 파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 걸 확인하고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자신이 하는 것보다는 파쑨이 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클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파쑨은 누구보다 하툰 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어느 방향으로 진입해서 어떤 공격을 해야 적을 제대로 도발할 수 있는지, 또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하툰 족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쿠다툰은 파쑨이 나선 순간부터 아예 눈을 감고 쉬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바로 알아차려서 다행이야.’

    쿠다툰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맺혔다. 현석 일행이 자고 있을 때, 푸른 가루를 모닥불에 넣게 할 때 보였던 바로 그 미소였다.

    파쑨은 쿠다툰이 안내하던 길과 약간 다른 길로 일행을 데려갔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쿠다툰이 길을 안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룬 족 사람들은 쿠다툰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다들 알아차렸다.

    그러니 파쑨이 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툰 족의 식량 저장고 쪽이었다.

    ‘확실히…… 그쪽부터 공략하는 게 효과가 크긴 하지.’

    하지만 식량 저장고는 무기 저장고와 붙어 있기에 거기까지 아무 방해도 없이 그냥 갈 수는 없다.

    그게 파쑨의 진짜 계획이었다.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하툰 족의 전사들을 공격하면서 상황을 혼란으로 이끌어 나가고, 파쑨은 부족의 전사들을 데리고 식량 저장고와 무기 저장고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쿠다툰도 풀어주고 말이다.

    딱 거기까지만 되면 아주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보아하니 현석 일행은 엄청나게 강해서 아무리 하툰 족이라 해도 쉽게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파쑨이 계획한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현석 일행만 남겨두고 그곳을 모두 쏙 빠져나오면 끝이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파쑨은 과감히 부족의 전사 일부를 미끼로 넘겨줄 계획까지 세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파쑨은 가벼운 긴장감을 유지하며 부족의 전사들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선공은 자신이 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석 일행을 싸움에 휘말리게 할 작정이었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미리 진형을 맞춰왔으니까.

    하툰 족을 만나면 이대로 진형을 유지하면서 싸우기만 하면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현석 일행을 디룬 족처럼 보이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아마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상황을 혼란스럽게 끌어가면 돼.’

    그 뒤로는 물 흐르듯 하나하나 풀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먼저 쿠다툰부터 풀어주고, 전사 일부를 이끌고 식량 저장고로 달려가서 박살을 낸다.’

    식량 저장고의 방비도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전사 중 20명만 뽑아서 데려가고 거기에 쿠다툰과 그의 전사 몇 명이 힘을 보탠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그 인원들만 데리고 빠져나가면 끝이다.

    파쑨은 그 계획을 속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시뮬레이션을 했다.

    적의 진형을 몇 가지나 가정했고, 그에 맞는 적절한 공격법을 구상했다.

    ‘무조건 성공한다.’

    속으로 성공을 자신하며 걸음을 옮기던 파쑨은 갑자기 변하는 주변 분위기에 더욱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드디어 하툰 족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전사들이 가지는 특유의 힘이 느껴졌다. 벌써 주변에 하툰 족 전사들이 포진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현석은 계속 파쑨이 안내하는 대로 걸어가면서 피식 웃었다.

    찐득찐득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투기와 살기가 섞인 마력이었다.

    아마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걸 마력이라고 느끼진 못할 것이다.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진 마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변형되더라도 결국 마력은 마력이다. 마력의 주인인 현석의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마력의 흐름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제 곧 적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양이었다.

    현석은 사실 파쑨이 나섰을 때부터 그가 다른 꿍꿍이를 가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몸 주변에 흐르던 마력의 기질이 달라졌으니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건 당연했다.

    한데 그 뒤로 쿠다툰의 상태가 급격히 안정되는 걸 보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과연 이들의 꿍꿍이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의외로 답을 도출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부릴 수 있을 만한 수작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결론을 내린 현석은 적당한 시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 순간이었다.

    일촉즉발,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바로 지금 말이다.

    그 시기를 찾는 건 마력에 민감한 현석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석은 마력의 흐름이 바뀌자마자 일행에게 한국어로 말했다.

    “싸우지 말고 피할 거야. 날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

    그 말에 다들 눈을 빛내며 현석을 바라봤다. 라이언도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제국어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한국어까지 공부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추광열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 일단 마음을 먹고 나니 금세 실력이 늘었다.

    어쨌든 현석의 말을 알아들은 일행은 묵묵히 걸으면서 온 신경을 현석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파쑨은 알 수 없는 말을 한 현석을 보며 전사들에게 또 신호를 보냈다.

    절대 진형을 흐트리지 말고 현석 일행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으라고 말이다.

    파쑨은 그 순간 뭔가 계획이 살짝 비틀리는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아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지금!”

    현석이 그렇게 외치며 갑자기 뒤로 슥 빠졌다.

    디룬 족 전사들이 현석을 막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현석의 움직임은 마치 실체 없는 유령이 흐느적 거리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뒤로 빠져나온 현석에 이어 나머지 일행도 훌쩍 훌쩍 몸을 날렸다.

    그것 역시 막을 수가 없었다. 뗏목에 싣고 온 쿠다툰 일당을 이용하면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각자 쿠다툰 일당을 한 명씩 들고 근처에 있는 전사에게 휙 던져 빈틈을 만들고 빠져나간 것이다.

    사실 그냥 빠져 나갔어도 현석 일행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빠져나가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선 지금 쓴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현석이 사라지기 전에 쫓아가려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현석은 그들에게 절대 자신을 놓치지 말고 쫓아오라고 했다.

    일행은 현석의 지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현석 일행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툰 족 전사들이 흉흉한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파쑨은 암담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도끼를 뽑았다.

    어쨌든 최후의 발악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을 땐 죽더라도 최소한 하툰 족 전사 두세 놈은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건 나머지 디룬 족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눈에 독기를 가득 머금고 무기를 뽑았다.

    쿠다툰은 허탈한 표정으로 뗏목에 그냥 누워 버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기는 싫었다. 하지만 이미 끝났다. 현석을 너무 쉽게 여긴 대가였다.

    양측이 막 격돌한 순간, 파쑨의 결심을 방해하는 일이 또 벌어졌다.

    현석 일행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작정하고 움직인 현석과 팀 메인퀘스트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디룬 족 전사들을 제압해버렸다. 그 와중에 하툰 족의 공격도 좀 받긴 했지만 너무나도 간단히 그 공격들을 모조리 흘려버렸다.

    하툰 족 전사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현석 일행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디룬 족 전사들은 현석 일행 뒤쪽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권혁찬과 추광열, 라이언이 서둘러 그들을 로프로 칭칭 묶고 있었다.

    현석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하툰 족 전사의 지휘자로 보이는 사내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너희가 저놈들과 함께 있는 걸 봤다.”

    사내, 싸이프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절대 믿지 않겠다는 의미가 표정과 어조에 들어 있었다.

    “그럼 계속 같이 있었다면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잘 알겠군.”

    현석의 말에 싸이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지켜봤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싸우는 걸 봤으니 만일 진짜 싸웠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도 알겠군.”

    싸이프가 이를 갈며 현석을 노려봤다.

    “우리가 진다는 뜻이냐?”

    당연하다. 하지만 현석은 굳이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괜히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이곳 하툰 족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이놈들 계획이 성공했을 거란 뜻이지.”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엎어져 있는 쿠다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걸 본 싸이프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제법 오랫동안 지켜봤기에 쿠다툰이 처음부터 저렇게 묶여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그놈을 한패라고 지칭하니 조금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같은 편을 제압해 적을 기만하는 수작이야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누군지 모르겠어? 얼굴만 봐도 알아차릴 줄 알았더니.”

    “뭐?”

    싸이프는 그 말에 다시 한 번 현석이 가리킨 사람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쿠다툰!”

    그가 어찌 쿠다툰을 모르겠는가. 디룬 족 족장이 가장 아끼는 그의 막내아들이자, 온갖 분란을 몰고 다니는 미친놈을.

    쿠다툰에게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하툰 족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된다.

    쿠다툰은 하툰 족을 상대할 때는 상당히 교묘한 방법을 썼다. 그래서 그때마다 하툰 족이 할 수 있었던 건 디룬 족에게 항의를 하는 정도가 다였다.

    디룬 족과는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이라서 오히려 더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사실 그건 디룬 족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거기 얽매이지 않는 유일한 놈이 바로 쿠다툰이었다.

    그 쿠다툰이 이렇게 칭칭 묶여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석 일행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높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쿠다툰을 미끼로 써먹을 리는 없었으니까.

    ‘쿠다툰을 디룬 족에서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랬을 리가 없다. 디룬 족의 동향에 대해 가장 장 파악하고 있는 부족이 바로 하툰 족이었다.

    족장이 보여주는 쿠다툰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 며칠 사이에 그걸 뒤집을 만한 사건이 벌어진 적도 없었다.

    싸이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신뢰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거점과 정보가 필요하다.”

    “거점과 정보? 필요한 건 그게 전부인가?”

    현석이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쿠다툰을 가리켰다.

    “원래는 저쪽에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뒤통수를 때리더라고. 두 번이나.”

    말을 마무리하며 파쑨을 힐끗 쳐다보는 걸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했다.

    싸이프는 충분히 현석의 말을 알아들었다. 물론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감시한다면 부족에 거점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부족에 들이건 정보를 주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일단 따라와라.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싸이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툰 족 전사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겉으로 드러난 수의 세 배나 되는 전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석 일행은 모두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슬슬 현석이 아닌 나머지 일행도 이곳의 비틀린 마력에 약간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현석은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마력에 대한 타이틀을 얻거나 갱신할 가능성이 높아지겠군.’

    그리고 현석도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신의 파편 퀘스트의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하툰 족 전사들이 묶인 디룬 족 전사들을 하나씩 들었다.

    “따라와라.”

    싸이프는 현석 일행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금 잠깐의 전투를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파악했다.

    여기서 저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더라도 당당히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걸음에 힘이 실렸다.

    < 숲의 부족들 2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