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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59화 (259/326)
  • < 숲의 부족들 1 >

    어느새 강이 나왔다.

    강을 건너는 건 아주 간단했다. 쿠다툰 일당을 태운 나무판에 현석 일행이 올라타기만 하면 됐으니까.

    강폭이 상당했다. 그리고 굉장히 깊었다.

    물에 잠기는 걸 싫어하는 마수들을 막아줄 만한 강이었다.

    현석은 강을 건너며 물이 흘러가는 곳을 쳐다봤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마 저 끝 어딘가에 이 세상을 구분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공허의 산맥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여기도 공허의 산맥이 있을지도 모르지.’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쿠다툰을 보며 물었다.

    “이 강의 끝에 가봤나?”

    쿠다툰이 고개를 저었다.

    “거긴 아무도 못 간다.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이 강의 끝이 세상의 끝이라던데.”

    쿠다툰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모르지. 세상을 끝장낼 만한 위험한 마수가 살고 있을지도.”

    현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 말에 상당한 진실이 섞여 있을 것이다. 이 강을 따라 끝까지 가면 세상의 끝에 도착할 것이다.

    굳이 가볼 생각은 없었다. 거기 가지 않아도 막힌 세상의 끝을 뚫어낼 방법이 있을 테니까.

    이전 세상에서는 마수왕의 탑이 그 역할을 했다. 이곳에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것부터 찾아야지.’

    현석은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현석의 목표는 이 세상의 벽을 다 허무는 것이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세상에 큰 변화가 한 차례 닥칠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그 변화는 어차피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한없이 느렸다. 그래서 현석이 죽기 직전까지도 변화의 조짐 자체가 거의 없었다.

    아니면 변화하고 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그랬겠지. 변하지 않았을 리 없어.’

    물론 느린 건 확실하다. 그건 현석이 각 투명 던전을 돌면서 분명히 느꼈다.

    회귀 전의 투명 던전과 지금의 투명 던전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투명 던전에서 마계로 이어지는 화이트홀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 얘기는 언제든 화이트홀이 깨지고 거기서 마족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마 마족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저렇게 조각조각 찢어진 마계가 아닌, 진짜 마계와 이어진 화이트홀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화이트홀 역시 많이 불안정해졌을 것이다.

    ‘그나마 투명 던전이 완충 작용을 해서 다행인가?’

    아무리 마족이라도 투명 던전에서 빠져나오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투명 던전을 이용하려면 고도의 마력 감지 능력과 마력 컨트롤 능력이 필요하다.

    마족의 종류가 무수히 많고, 어떤 마족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투명 던전을 발견하고 거기 걸린 마력패턴을 풀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중요한 화이트홀을 막고 있을 투명 던전이 보통 던전일 리 없으니까.’

    아마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마력패턴이 적용되어 있을 것이다. 마력 패턴이 복잡하고 난해하면, 그걸 감지하는 것도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현석이 그렇게 투명 던전과 마족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이, 뗏목이 건너편 강가에 닿았다.

    드디어 강을 건넌 것이다.

    “다 왔군.”

    여기까지 오니 굳이 쿠다툰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현석의 감각에 벌써 수많은 사람의 기척과 특유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쿠다툰의 부족이 강을 건너는 현석 일행을 먼저 발견하고 포위망까지 구축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현석은 일단 모르는 척 뗏목에서 내렸다. 그러자 일행들도 따라 내렸다. 다들 표정이 묘한 걸 보니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석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일행의 수준이 정말 많이 올라갔다. 조만간 각자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팀 메인퀘스트만 보내면 불안하니 라이언과 추광열을 붙여줘야겠지만 말이다.

    뗏목에서 내린 일행은 뗏목을 뭍으로 끌어냈다. 그 위에는 쿠다툰 일당이 온몸이 포박당한 채 누워 있었다.

    현석은 직접 뗏목으로 다가가 그것을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 뗏목이 어지간한 순간에도 강으로 떠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끌어낸 것이다.

    저 강은 보통 강이 아니었다. 사실 양산형 용들이 물에 잠기는 걸 싫어하긴 해도 그게 만일 저 강이 아닌 다른 물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다.

    저 강은 세상의 끝에 닿아있다. 그리고 그곳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저 강에 빠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기한 건, 막상 이 강의 물을 퍼 올리면 그건 그냥 평범한 물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강은 강으로 존재할 때에만 그 특별함이 유지된다.

    아마 그건 쿠다툰의 부족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쿠다툰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굳이 얘기해주지 않았을 뿐.

    현석은 뗏목을 등지고 일행을 배치했다. 굳이 뒤를 살필 필요가 없게 위치를 맞췄기에 앞만 상대하면 된다.

    “슬슬 나와도 될 것 같은데? 우린 준비가 끝났으니까.”

    현석의 말에 수풀 위로 사람 얼굴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수풀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현석을 노려봤다.

    그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가슴에 철판을 덧댄 가죽갑옷을 입은 사내였는데, 등에 매단 거대한 도끼를 언제든 뽑을 수 있게 손으로 쥐고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사내가 인상을 팍 썼다. 어조는 위협적이었지만, 당장 달려들 것 같진 않았다.

    척 봐도 쿠다툰 일당을 상당히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현석이 사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디룬 족 영역이다. 지나가고 싶으면 네놈들 정체부터 밝혀라.”

    사내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힐끗 돌려 쿠다툰을 쳐다봤다. 쿠다툰의 시선과 사내의 시선이 잠깐 마주치며 빛나는 걸 확인했다.

    현석은 피식 웃으며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놈들이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줄 아주 잘 아는 모양이군.”

    그 말에 사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여간…… 왜 저놈만 저리 말썽인지. 쓸데없는 욕심만 안 부리면 정말 뛰어난 놈인데.’

    도끼를 멘 사내, 파쑨은 현석 뒤에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쿠다툰을 보며 인상을 한 번 찌푸렸다.

    벌써 쿠다툰 때문에 관계가 틀어진 부족이 몇 개나 되는지 모른다.

    그뿐 아니라 드러나진 않았지만 도시 쪽에서 온 모험가를 습격한 일도 수두룩했다.

    그 때문에 최근 도시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실 도시라고 해봐야 어차피 숲에 위치해 있기에 규모가 큰 부족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규모라는 게 보통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파쑨은 현석 일행을 도시 쪽에서 온 모험가라고 판단했다.

    도시의 분위기는 다른 여타 부족과는 좀 다르기 때문에 저런 특이한 복장이나 장비를 갖춘 사람이라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일단 이놈들이 우리한테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겠는데?”

    현석의 말에 파쑨이 이를 갈며 현석을 노려봤다.

    “원하는 게 뭐냐?”

    그 말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쿠다툰이 버럭 소리를 질었다.

    “이런 멍청한! 끝까지 잡아뗐어야지! 그래야 몸값을 낮추든가 할 거 아냐!”

    쿠다툰의 외침에 파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멍청한 놈. 나라고 그걸 모를 줄 알아?’

    하지만 이미 들켜버렸다. 이럴 때는 상대의 성향을 파악해 거기에 맞춰 나가는 게 훨씬 나았다.

    “보아하니 저놈이 네 위에 있는 모양이지? 멍청한 놈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겠어.”

    현석의 말에 파쑨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보아하니 나이도 네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저놈은 족장 아들쯤 되나?”

    파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황인데 뭘 더 속이고 잡아 뗀단 말인가.

    현석은 파쑨과 그 뒤에 있는 사내들의 표정과 마력의 흐름, 그리고 심안을 통해 나타난 정보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해 나갈 수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던지고 반응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사방에 깔린 모든 마력이 현석의 마음에 반응해 움직이고 정보를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후계자 감은 아닌 것 같고…… 막내 아들쯤 되는 모양이군. 말썽만 피우고 족장의 총애는 받고 있고…… 말썽만 없으면 나름 써먹을 구석은 많고. 맞지?”

    파쑨은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뭐야, 이놈은? 꼭 내 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 같잖아!’

    실제로 쿠다툰은 족장의 막내아들이었다. 족장이 어찌나 아끼는지 그렇게 말썽을 피워도 여전히 오냐오냐였다.

    “이놈이 우리한테 하려던 짓을 그대로 해줄까 고민 중이야.”

    현석의 말에 쿠다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파쑨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 디룬 족의 원수가 될 거다. 족장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 테니까.”

    현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걸 두려워해야 하나?”

    순간 짙은 마력이 주변을 꽉 내리 눌렀다.

    “크윽!”

    파쑨은 경악어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지독한 압박은 처음 겪어봤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투두두둑!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파쑨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와 함께 온 수하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해 무릎이 결국 꺾인 것이다. 버틴 사람은 오직 파쑨뿐이었다.

    ‘두려울 사람이 없겠군.’

    파쑨은 질린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저 정도 힘을 갖고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대체 정체가 뭐지?’

    저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면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각 부족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다.

    그리고 각 부족들 간에는 깊이 교류하는 부족들이 최소 대여섯 군데는 있다.

    그런 식으로 거미줄처럼 부족과 부족이 얽혀 있기에 저 정도 강자가 등장하면 그 소문이 전 부족으로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정말 특이한 일이었다.

    파쑨은 이를 악물고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미 기세에서 눌려 버렸다.

    “그러니까…… 원하는 게 뭐냐니까?”

    파쑨의 물음에 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희 부족으로 안내해라.”

    “내가 그렇게 할 것 같으냐? 차라리 죽여라.”

    파쑨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현석이 디룬 족으로 쳐들어가 모조리 쓸어버리면 어쩌겠는가.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설사 부족의 힘으로 현석을 막아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지금 현석이 보여준 힘을 생각하면 과연 부족의 전사들이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저 기세만으로 무릎을 꿇리다니, 이게 가능한 사람이 대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메디나툰의 대전사쯤 되면 가능할까?’

    메디나툰은 다들 도시라 부르는 거대 부족의 이름이었다. 그곳의 대전사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메디나툰의 대전사가 눈앞의 현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메디나툰의 대전사가 홀로 부족에 쳐들어온다면 과연 그를 막을 수 있을까?

    파쑨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불가능하다.

    한데 그보다 더 강해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부족으로 끌어들이겠는가.

    물론 실제로 겪어보지 않아서 진짜 그 정도로 강한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왜? 무섭나?”

    현석의 도발에 파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 넘어간 것은 쿠다툰이었다.

    “네놈이 무섭긴 뭐가 무섭단 말이냐! 우리 부족으로 가면 너 따위는 끝장이야!”

    쿠다툰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내가 안내하마! 당장 가자!”

    이미 쿠다툰의 머릿속에는 이 결정으로 인해 부족이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이놈들을 죽이는 데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된 모양이었다.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파쑨의 얼굴에 허탈함이 떠올랐다.

    고작 이런 도발에 넘어가다니. 허탈한 눈으로 쿠다툰을 바라본 파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쿠다툰의 눈빛이 너무 담담했다. 저건 절대 도발에 넘어간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꾸미고 있어. 대체 뭐지?’

    현석 일행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쑨은 부족의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현석 일행을 넓게 포위해 따라가도록 지시를 내렸다.

    쿠다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짓을 받았지만 일단은 무시했다.

    솔직히 쿠다툰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보고 싶었다.

    < 숲의 부족들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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