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수의 정체 >
현석은 화이트홀에 들어오자마자 마력을 내뿜었다.
사실 이제 현석의 수준은 고작 이런 마수의 위액에 피해를 입을 정도로 낮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건 현석 혼자가 아니니 이 정도 조치는 필요했다.
현석이 뿜어낸 마력이 투명한 막처럼 변해 화이트홀 주변을 빈틈없이 감쌌다.
뒤이어 화이트홀에서 라이언과 추광열이 들어왔고, 팀 메인퀘스트도 들어왔다.
“일단 조금 더 이동하지.”
현석은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심안과 마력 감지 능력을 이용해 마수의 위장 내부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해 두었다.
역시나 이곳에도 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마수의 정체도 알아냈다.
이 마수의 정체는 젤리웜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킹 젤리웜이었다.
젤리웜은 따로 입이 있는 마수가 아니라 온몸으로 먹이를 흡수한 다음, 내부에서 녹여 몸으로 흡수해 버린다.
지금 현석 일행이 있는 곳이 바로 그 먹이를 저장해 흡수하는 공간이었다.
현석은 젤리웜의 몸체가 모두 균일한 젤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젤리의 점도가 약한 부분이 바로 약점이 되는 것이다.
“진짜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류지혜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현석의 몸뿐이었다.
그나마도 현석이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켜서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아무것도 안 보였을 것이다.
현석은 일행을 이끌고 위장의 끝부분으로 이동했다. 그곳이 가장 약한 점도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물론 그 부분만 약하지 거기서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들면 다시 점도가 강해진다.
하지만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서 방향을 바꾸면 되니까.
현석은 젤리웜의 몸을 뚫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이제 여길 뚫고 나갈 거다. 뒤쳐지면 갇혀서 죽는다고 보면 되니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현석은 그렇게 일행에게 경고한 다음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검으로 바꿨다.
우우웅!
검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석은 그렇게 마력을 가득 담은 검을 가볍게 찔렀다.
푸욱!
검이 위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검에 담겨 있던 마력이 일제히 방출되며 크게 회전했다.
위이잉!
순식간에 깊고 커다란 동굴이 뚫렸다.
현석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뚫렸던 위벽이 스르륵 메워지기 시작했다.
대단한 복원력이었다. 가장 바깥쪽부터 메워지기 시작해 빠르게 동굴이 사라져갔다.
현석은 동굴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가장 약한 벽을 찾아 또 검을 찔렀다.
푸욱! 위이잉!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새로운 동굴을 뚫었다. 방금 전에 뚫었던 동굴보다 좀 좁고 얕았다.
하지만 현석 일행이 지나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세 번째 동굴은 두 번째보다는 좀 더 깊고 넓었다.
그렇게 현석은 계속 반복해서 동굴을 뚫었다. 매번 방향을 바꿨고, 동굴의 크기나 깊이도 매번 달랐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자, 따라가는 일행들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현석이 검에 쏟는 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러다가 마력이 바닥나기라도 하면 이대로 이 안에 갇혀 버리는 게 아닐까?
‘갇히면 그냥 죽는 거라고 했지?’
‘우리도 나서야 하는 거 아닐까?’
일행들은 각자 마음의 준비를 했다. 현석이 지쳐 나가떨어지면 자신이 나서서 굴을 뚫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얼마나 반복해서 굴을 뚫을 수 있을지, 또 얼마나 깊고 넓은 굴을 뚫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막상 현석은 조금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검을 찔러 굴을 뚫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슬슬 지칠 법도 한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제야 일행들은 자신이 현석에 대해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파악했다는 걸 깨달았다.
현석은 이미 그들이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경외감이 들었다.
현석을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이 조금 더 달라졌다.
푹! 위이잉!
기계적으로 들려온 소리와 함께 넓고 깊은 굴이 새롭게 뚫렸다.
현석과 일행은 그 굴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대련삼룡은 화이트홀에 들어가자마자 사방의 기척을 살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대화를 주고받으면 들킬 염려가 있기에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들었던 것보다 더 지독한데?’
사방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코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후각세포가 조금씩 손상되고 있었다.
이곳은 마력을 이용해 냄새조차 막아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련삼룡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최대한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어 주변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저쪽?’
대련삼룡 중 한 명이 기이한 느낌을 받고 한 쪽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희미한 빛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일행들을 툭툭 쳐서 자신에게 집중시킨 다음 빛이 보이는 쪽을 가리켰다.
나머지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쪽을 유심히 보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빛이 점점 확실히 보였다. 그들은 현석 일행이 분명했다.
대련삼룡은 현석을 비웃었다.
‘어설픈 놈. 날 찾아달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잖아.’
대련삼룡은 좀 더 빠르게 빛으로 다가갔다. 더 가까이 가니 현석 일행의 모습이 더욱 확실히 보였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들은 현석이 위벽에 검을 꽂는 광경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알기로 여긴 어떤 거대한 마수의 위장이다. 한데 저렇게 자극하면 여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저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멍청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경에 대련삼룡은 눈을 부릅떴다.
‘뭐야! 저렇게 뚫고 나가겠다고?’
현석이 위벽에 굴을 뻥 뚫어버리는 광경은 정말로 놀라웠다.
대련삼룡은 현석 일행이 그곳으로 들어가고도 한동안 충격에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어도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들키지 않고 현석 일행을 쫓아가기만 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한다.
현석 일행이 굴로 들어가자 빛이 사라져 버렸다. 대련삼룡은 그제야 황급히 현석 일행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애초에 그곳에는 동굴따위 없었던 것처럼 구멍이 사라져 버렸다.
굴이 막혔으니 이제 대화를 나눠도 상관없게 되었다.
“어쩌지?”
“어쩌긴. 우리도 뚫고 들어가야지. 저놈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건 또 뭔데?”
“그야 그렇지. 그런데 뭘 하든 빨리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굴을 뚫고 가서 그런지 위장의 상태가 좀 더 위험해졌다. 흐르는 위액의 양이 좀 더 늘어났다. 그리고 위장 자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거대한 동공 같았는데, 이젠 진짜 마수의 위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복원력이 상당한 것 같으니까 날카로운 스킬을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대련삼룡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날카로운 스킬을 떠올렸다.
“번갈아 하는 걸로 하지. 어쨌든 우리는 세 명만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뚫으면 되니까.”
일룡이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뽑았다. 말을 꺼낸 김에 자신이 먼저 하는 게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준비한 스킬을 검에 담았다. 그리고 검을 위벽에 푹 찔러 넣었다.
꽈득!
일룡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파고들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르게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200레벨에 가까운 강자였다. 어떻게든 검을 끝까지 밀어 넣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압!”
일룡은 검을 깊이 꽂은 상태에서 스킬을 펼쳤다. 그의 검에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 수천 개가 쏟아져 나갔다.
퍼엉!
“크윽!”
일룡은 갑자기 일어난 폭발에 뒤로 훅 날아가 버렸다.
바람의 칼날이 제대로 마수의 몸체를 뚫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그 안에서 응축되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일룡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자세를 잡았다. 온몸에 산성액이 잔뜩 묻어 버렸다.
“크으으윽!”
황급히 힐링포션을 꺼내서 마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남은 힐링포션을 온몸에 들이 부어 산성액을 씻어냈다. 하지만 완벽하게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체력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허억! 허억!”
일룡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만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의 얼굴 가득 실망감이 떠올랐다.
“고작…….”
고작 작은 구덩이 하나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막대한 힘을 쏟았는데 나온 결과가 이러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대체 그놈은 여기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은 거야?’
일룡은 현석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현석은 가볍게 검을 꽂아 깊고 넓은 통로를 만들어냈다.
‘차이가 좀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룡이 머뭇거리는 사이 벽에 난 구덩이가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룡이 황급히 거기에 검을 내질렀다. 일룡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옆에서 봤기에 좀 떨어진 곳에서 스킬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슈가가가가각!
일룡과 똑같은 스킬이었다. 수천 개의 바람칼이 쏟아져 나가 일룡이 만든 구덩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구덩이가 살짝 더 깊어졌다.
이룡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스킬을 한 번 더 썼다.
쉬이잉!
마력으로 이루어진 바람이 드릴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콰가가가각!
구덩이가 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이룡이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삼룡이 나서서 스킬을 쏟아냈다.
그렇게 일곱 번 반복하고 나니 셋 다 나가 떨어져 버렸다. 반면 구덩이는 고작 5미터 정도 깊이였다.
원래는 더 깊게 팠는데, 중간에 계속 회복되는 바람에 이 정도에 그쳤다.
그들은 더 이상 여기서 현석 일행을 쫓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사방 벽과 바닥이 꿀렁꿀렁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물결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쏟아내는 산성액의 양이 훨씬 많아졌다.
“먼저 뚫고 간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 같은데?”
“나가자고.”
대련삼룡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안 보이니 어디에 출구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일단 출구부터 찾아야 한다. 한데 공간이 워낙 넓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련삼룡은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일단 출구는 그저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사방을 돌아다니다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구 달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
“산성비다!”
“일단 막아!”
이곳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이 바로 이 산성비였다.
어찌나 지독한지 제대로 막아내지 않으면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
위에서 쏟아지는 비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을 때, 밑에서 산성액이 간헐천이 터지듯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푸확!
“으아악!”
세 사람 모두 분수처럼 솟구친 산성액을 아래에서부터 맞아 버렸다.
다들 사타구니를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닥을 구르면서 온몸에 산성액을 다 처바르고 있었지만 그딴 건 아예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출구! 출구부터 찾아야 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다.
대련삼룡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고생을 몇 번 더 겪은 이후에야 간신히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그나마 외부에서 잡혀 들어온 마수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 그런 마수라도 있었다면 살아서 나가는 게 불가능했을 테니까.
* * *
푸확!
거대한 킹 젤리웜의 피부가 툭 터져 나가며 구멍이 뻥 뚫렸다.
그 구멍을 통해 현석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나머지 일행이 차례대로 나왔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킹 젤리웜의 꼭대기였다.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류지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바닥을 살짝 살짝 밟아봤는데,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괜찮을 리 없지.”
지금은 현석이 마력을 깔아서 젤리웜의 인식을 방해하고 있기에 괜찮을 뿐이었다.
인식방해 마력을 치우면 대번에 무수한 창이 일행을 향해 쏟아질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바닥이 파도처럼 일어나 일행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리고 숨이 막힌 채로 내부를 통과해 아까 그곳, 젤리웜의 위장으로 돌아가겠지.
거기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다. 거대한 압력 때문에 가는 도중 압사를 당할 테니까.
물론 현석쯤 되면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압력을 막아내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현석 덕분에 안전했다. 그리고 서둘러 여길 빠져나가지 않으면 언제 킹 젤리웜에게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현석은 일단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방향부터 정했다.
“저쪽이군.”
방향을 정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이 킹 젤리웜은 거대한 산만 했다. 그러니 꼭대기에 있으면 이 근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좁은 통로에 꽉 끼어 있었기 때문에 킹 젤리웜을 넘지 않고는 여길 지나갈 수 없었다.
현석이 확인한 건, 언데드 군단의 땅에 나타나는 죽음의 마력이었다.
죽음의 마력이 짙은 곳으로 가봐야 원래 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나머지 한 군데도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이어진 곳이 있을 거야. 거길 잇는다.’
현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용을 불렀다. 여기서 달려가는 건 바보짓이었다. 날아가야 한다. 그것도 마력으로 기척을 완벽하게 감추고서 말이다.
잠시 후, 현석 일행은 용과 함께 날아올랐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 킹 젤리웜의 몸에서 무수한 젤리의 창이 용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물론 그때는 이미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 버려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 마수의 정체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