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퀸급 화이트홀 1 >
“중국?”
일행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자마자 들은 뜬금없는 얘기에 잠시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중국 쪽은 한 번 돌지 않았나? 내 기억에는 그런 것 같은데?”
라이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투명 던전을 처리한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서 정확히 어디어디를 갔는지 정리하라고 하면 고개를 젓겠지만, 이렇게 특정한 나라를 하나 딱 집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의 기억에 중국은 분명히 다녀온 곳 중 하나였다. 기억에서 지우기엔 너무 많은 고생을 한 나라였다.
‘너무 커서 이동하느라 애먹었지.’
중국에서 고생한 이유는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땅 덩어리가 넓어서 던전과 던전 사이를 이동할 때 걸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다.
투명 던전 자체의 난이도로 힘든 건 이번에 해결한 아프리카 쪽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마족과 언데드 군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광경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싸움도 무시무시했다.
아마 보통 플레이어가 그걸 처음 본다면 기절하거나 지리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경험할 것이다.
“중국에 새로운 투명 던전이라도 발견한 건가?”
라이언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투명 던전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현석이 유일했다.
한데 자신들과 지금까지 함께 있었던 현석이 어떻게 새로운 투명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화이트홀에 간다.”
“화이트홀?”
라이언이 눈을 빛냈다. 누구보다 화이트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 바로 라이언이었다.
현석을 제외하면 화이트홀의 특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라이언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화이트홀을 먼저 발견해 모험을 해 왔고 말이다.
물론 그로 인해서 그림자들에게 잡혀 모진 고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위험이 현저히 낮았다. 현석이 함께 있으니까.
“중국에서 화이트홀이 발견된 건가?”
그렇게 묻던 라이언은 문득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낯선 분위기는 뭐지? 뭔가…… 나만 붕 떠 있는 것 같은데?”
라이언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일행을 찬찬히 둘러봤다.
“이건 마치…… 다들 아는 곳에 가는 분위기인데? 나만 모르는 화이트홀이 있었나?”
다들 라이언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아. 라이언은 아직 모르나?”
“글쎄. 알고 있지 않나?”
라이언이 일행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결국 폭발했다.
“대체 뭔데? 내가 뭘 모르고, 뭘 아는데?”
“퀸급 던전 생성지역. 몰라요?”
“퀸급 던전도 있었나?”
라이언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류지혜가 환하게 웃으며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 쳤다.
“아하. 생각해보니 아직 거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네요.”
라이언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하지만 류지혜의 시선이 현석에게로 향하는 걸 보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긴. 저 괴물의 허락도 없이 뭐든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라이언은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젠장. 이게 대체 뭐라고 두근거려?’
그저 퀸급 던전 생성지역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화이트홀의 정보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고, 결국은 거기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고작 그 얘기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으니.
‘이건 뭐 어린애가 된 것도 아니고.’
라이언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고, 류지혜가 얘기를 시작했다.
설명은 정말 별 거 없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정말로 흥미진진하게 그 얘기를 들었다.
“그런 곳이 있다니 정말 재미있군. 한데 어쨌든 던전 생성지역이라는 거 아닌가?”
“그렇죠. 블랙홀이 끊임없이 생겨나니까요. 뭐…… 순서에 맞춰서 클리어해야 하긴 하지만.”
“킹급 던전도 결국은 생성지역 안에서 등장하거든. 킹급만 따로 모이는 생성지역은 없지만 말이야.”
“저도 알아요.”
팀 메인퀘스트도 훈련의 일환으로 킹급 블랙홀을 몇 번이나 클리어해봤다. 하지만 오히려 퀸급 블랙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킹급에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어쨌든 거기도 화이트홀이 있거든.”
“들어가 보셨나요?”
“당연하지. 난 화이트홀에 미친놈인데.”
라이언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류지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화이트홀을 겪은 사람이라면 화이트홀에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쪽 화이트홀도 똑같았어. 다른 화이트홀이랑 다를 게 없다는 뜻이지.”
“그랬군요.”
류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이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대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긴 좀 다를 거예요.”
“다르다고? 뭐가?”
“그건…… 저도 모르죠.”
류지혜가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라이언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게 진실인 걸 어쩌겠는가. 아직 팀 메인퀘스트는 퀸급 화이트홀에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흑시 에서도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갔을 거예요. 듣기로 한 번 시도했다가 호된 꼴을 당했다고 하니까요.”
“시도했었다고?”
“예. 당시 상당한 레벨의 플레이어 30명이 들어갔다가 한 명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라이언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이제야 좀 진짜 화이트홀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은가.
“하면…… 우리가 가는 걸 흑시 쪽에서 반기지 않을 수도 있겠군.”
류지혜의 표정이 굳었다.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물론 현석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중국에 도착했다.
* * *
“감시의 눈길이 좀 느껴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
류지혜의 물음에 라이언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감시가 따라붙었어. 아미 흑시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 모양이야.”
중국에는 흑시 말고도 무수한 플레이어 조직이 있었다. 그 중에서 흑시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이권이 얽혀 있으면 어떤 조직이든 목숨을 내던지듯 달려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중국이었다.
그리고 아마 흑시 자체도 세력이 나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우리를 감시하는 놈들을 지켜보는 조직도 있을 거다.”
라이언의 말에 류지혜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더욱 더 세심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몇 있어요.”
류지혜는 대번에 감시자의 감시자를 파악해냈다.
이제 일반인 중에는 류지혜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플레이어 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류지혜를 비롯한 팀 메인퀘스트의 팀원들은 이제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그 사실은 라이언도 잘 알고 있었다. 라이언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자신의 감각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웬만한 특수요원들은 라이언의 감각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전자장비가 문제로군.”
그저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전자장비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건 그저 경험과 조심성에 의존해 걸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류지혜가 현석을 보며 물었다. 현석은 대답대신 한 쪽을 쳐다봤다.
저 멀리서 커다란 버스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레드드래곤 길드의 버스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버스 외관에 붉은 드래곤이 크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아…… 저걸 타고 가야 하는 건가요?”
류지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드드래곤은 정말 좋은 동반자 중 하나였지만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자신의 취향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내렸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오명국이었다.
레드드래곤 길드의 2인자이자, 실질적 길드의 운영자인 오명국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는 건 흑시와 화이트홀에 관한 문제가 생각보다 그리 작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안 그래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선 지 오래라서요.”
현석이 그 말에 오명국을 보며 말했다.
“굳이 막을 필요 없다고 전하지 않았나?”
“안 막았습니다. 한데 그놈들이 이젠 우리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쪽을 아예 빼앗길 게 확실합니다. 작정을 한 것 같으니까요.”
오명국의 말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맥없이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보자마자 엄살이 너무 심하군.”
오명국이 씨익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잠깐 웃은 다음 오명국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퀸급 던전 생성지역 자체를 집어 삼키려고 나선 쪽은 대련방입니다. 퀸급 던전 생성지역 때문에 흑시에 영입된 조직인데, 지금은 목소리 좀 내는 편입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방은 처음 이곳 중국에서 던전 생성지역을 찾을 때부터 엮였던 조직이다.
그때는 그저 흑시와 손을 잡은 정도였는데, 이젠 아예 흑시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대련방의 힘과 영향력만 보면 흑시에서도 손꼽힐 정도입니다. 하지만 흑시와 역사를 함께하는 가문들이 보기엔 그저 굴러온 돌일 뿐 아니겠습니까?”
즉, 기존 흑시의 중심을 이루는 가문들을 들쑤셔서 대련방을 견제했다는 뜻이다.
“한데 이제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대련방에서 화이트홀에 들어갔다가 제법 쓸 만한 아티팩트를 찾아왔거든요.”
오명국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흑시 자체가 탐욕스러운 자들이 이룬 세력이었다. 그러니 중국의 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서두르는 게 좋겠는데? 이제 레벨 높은 플레이어들이 제법 많아졌을 텐데 그들이 잔뜩 투입되면 화이트홀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라이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일행이 가려던 화이트홀이 만일 그가 경험한 것과 똑같은 화이트홀이라면, 그 안에도 작은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흑시의 그 탐욕스러운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그냥 둘 리 없다.
라이언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도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현석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쪽에도 강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많지 않지.”
라이언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현석이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화이트홀을 이쪽 플레이어들만 쓸 수 있나?”
그 말에 라이언이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그런 쪽으로는 아직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그쪽으로 이어지고 나니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켄드릭이 이쪽으로 넘어온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즉, 저쪽 세상의 플레이어도 공평하게 화이트홀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데 지금까지 화이트홀에서 나타난 사람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쪽에서 넘어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얘기가 있었을 것이다. 라이언이나 추광열은 그쪽으로 정보력이 상당히 예민한 사람들이었다.
한데 그 두 사람이 몰랐다는 건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라이언이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놀람이 가득했다.
현석이 라이언을 보며 말했다.
“이미 경험했잖아.”
“뭐? 경험?”
라이언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림자…….”
라이언의 화이트홀에서는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이어지는 길목에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림자를 넘지 못했다.
만일 모든 세상의 길목에 그림자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 누구도 그곳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라이언은 현석을 힐끗 쳐다봤다.
‘저런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하지.’
다시 생각하니 먼저 들어간 흑시의 플레이어들이 불쌍해졌다.
만일 그곳을 막고 있는 괴물들이 그저 그림자들이라면 그저 잡혀서 마력만 갈취당할 테니 그나마 낫다. 라이언과 추광열은 마력을 갈취당하면서 제법 많은 성장을 했으니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길목마다 그림자가 있을까?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 어떤 괴물이 있을지 누가 알아?’
아마 지나가는 사람을 싹 죽여버리는 죽음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문제다.
어느 쪽이든 현석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이언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밥이라도 먹고 가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여유를 되찾은 라이언의 태도에 오명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일행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맛있는 거 먹고 가요. 요즘 훈련 때문에 통 맛있는 걸 못 먹었더니 없던 식탐이 생길 지경이라니까요.”
류지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반색하며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물론 안내는 오명국이 해야 했다.
오명국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렇게 현석 일행이 중국 운남에 도착했다.
< 퀸급 화이트홀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