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245화 (245/326)

< 샤텐 >

샤텐은 흑발의 중년인이었다. 아마 젊을 때는 여자 깨나 울렸을 것이다. 중년이 되었는데도 얼굴에서 풍기는 멋과 분위기가 아주 철철 넘쳤으니까.

그가 입은 옷과 장비가 아까와는 전혀 달라졌다.

마치 아까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와서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분명히 샤텐이었다. 심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샤텐은 현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신의 파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현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샤텐을 쳐다봤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샤텐이 신의 파편 안에서 뭔가를 쑥 꺼낸 것이다.

그것은 커다란 그림자 덩어리였다. 파편을 이룬 안개와 같은 검회색 그림자 덩어리였는데, 그걸 뒤로 휙 던지고 다시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현석은 샤텐이 던진 그림자 덩어리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것은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사람 형체로 변했다.

‘그림자1호?’

놀랍게도 그것은 아까 폭발과 함께 사라졌던 그림자였다.

그 뒤로 쑥쑥 날아온 검회색 덩어리가 모두 그림자로 변했다.

아까 사라졌던 50개의 그림자가 모두 부활했다. 물론 아까와는 상태가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의 주인인 샤텐이 다시 현석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공손히 조아렸다.

“폐하의 영원한 그림자 샤텐이 인사드립니다.”

현석은 샤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 * *

“젠장! 악재가 계속 겹치고 있어!”

칼슨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래리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조사대를 파견하긴 했는데, 아무도 근처에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출입을 거부하는 것 같다고 했던가?”

“예. 강력한 마력장을 통해 들어가려는 사람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 무리해서 들어가려고 하면 살상력을 발휘하고?”

“예. 정확합니다. 벌써 다섯이 죽고 일곱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칼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엠페러타워를 열려고만 하면 일이 터지는군. 아무리 누군가 작정하고 노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심해. 안 그런가?”

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에는 답하면 안 된다. 이런 일을 결정하는 데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개입되면 안 된다.

칼슨도 그걸 알기에 래리의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엠페러타워를……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고심 끝에 나온 답이었다. 만일 재건이 다시 끝난 다음 이번과 같은 일이 한 번 더 벌어지면 그때는 누적된 피해 때문에 렉스턴 에너지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금전적 문제가 아니라 칼슨의 지배구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외부의 요인보다는 내분이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특히나 렉스턴 에너지처럼 거대한 조직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쯤에서 접는 게 올바른 판단이리라.

“정리는 네게 맡기지. 깔끔하게 싹 처분해. 그리고…… 건물과 공간은 다 파묻어버려.”

“예.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차라리 이게 낫다. 칼슨은 갑자기 생겨난 그 검은 안개가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그러니 묻어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반쯤은 기분에 의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칼슨의 눈빛이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그리고…… 날 이렇게 몰아붙인 그놈들한테는 제대로 된 대가를 선물해 줘야겠지.”

칼슨이 섬뜩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 * *

현석은 샤텐의 몸으로 쏙쏙 스며드는 그림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샤텐은 제국의 초대 황제가 남긴 유산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제국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충신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충신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드러나지 않은 충신이었다.

사텐은 처음 제국이 세워질 때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그저 황제의 곁을 지키는 걸로 만족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걸고 신과의 거래에 응했다.

‘신의 파편은 황제의 몸에 숨겨져 있던 게 아니었어.’

진짜 신의 파편은 샤텐이 갖고 있었다. 황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제가 그렇게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샤텐 덕분이었다.

이 황궁 자체가 샤텐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샤텐은 신의 파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씌워진 굴레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생전에 이루었던 그 강대한 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샤텐은 영혼이 없는 존재였다. 그는 고도의 인공지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뇌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그 인공지능이었다. 하지만 보통 인공지능이 아니다. 무려 신의 힘이 개입된 인공지능인 것이다.

그는 일말의 감정도 없이 그저 황제를 모시는 것 하나만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현석의 물음에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가 아는 것 자체가 그리 많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샤텐은 황제를 보필하는 존재지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중요하고 인상적인 것 몇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현재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딱 하나, 새로운 황제인 현석을 보필하는 것뿐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말이다.

샤텐은 현석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다음 바닥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는 지금 현석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진 스킬 [그림자숨기]의 힘이었다.

[그림자숨기-지정한 사람의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다. 그림자에 들어가면 모든 기척과 마력이 사라지는 대신, 평소의 10%에 해당하는 힘밖에 쓸 수 없다.]

굉장한 스킬이었다.

그림자에 숨은 채로 공격이 가능하다는 건 그 어떤 패널티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메울 수 있을 정도의 강점이었다.

샤텐의 힘 자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고작 10%라고 해도 웬만한 플레이어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특히 샤텐은 그 패털티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스킬 하나를 갖고 있었다.

[암격-기습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적 일격을 가한다. 1시간에 1회 사용가능. 추가 데미지+500%]

그야말로 암살에 특화된 자라 할 수 있었다. 그림자에 숨어 10%로 줄어든 능력치에 500%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면 실제로는 절반의 힘으로 공격하게 된다.

샤텐의 무지막지한 힘을 생각하면 절반의 공격력이라 하더라도 웬만한 존재는 일격에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현석은 이곳에서 정말 큰 힘을 얻었다. 이제 다시 나갈 때가 되었다.

‘왠지…… 저 안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신의 파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현석의 몸이 위로 쭉 올라갔다.

이번 신의 파편은 엠페러타워에 이어져있었다. 그렇게 올라가고 나니 정말로 지구의 엠페러타워에 도착했다.

현석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정말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정말로 왔다. 현석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그럼…… 가볼까?”

혹시 어떤 놈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물론 이번에 늘어난 레벨 덕분에 또 강해져서 어떤 놈들이 막고 있건 별로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막 현석이 움직이려는 순간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우르르르르르르!

현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 진동 전에 폭발음을 들은 것 같아서였다.

“설마 여길 포기한 건가?”

그것 외에는 방금 그 소리와 지금의 진동을 설명할 수 없다. 여길 날려버리기 위해 폭발물을 쓴 것이다.

콰과과과광!

희미한 폭음이 또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진동이 바닥과 벽을 타고 현석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곳은 무너지지 않았다.

‘정말 굉장한 힘이야.’

신의 파편이라는 건 신이 가진 힘의 일부라는 뜻이리라. 고작 일부인데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현석은 서두르지 않았다. 상황은 이미 늦었다. 가봐야 괜히 폭발에 휘말리고 쏟아지는 토사물에 뒤덮일 뿐이다.

그리고 그 폭발의 영향은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니 폭발이 끝나고 엠페러타워가 완벽하게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

우르르르르!

끊임없이 진동이 느껴졌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했기에 현석은 상당히 먼 곳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용케 잘 잡아냈다.

이내 모든 진동이 멈췄다.

‘그나저나 여기 뉴욕 한가운데 아냐?’

현석은 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지하 깊은 곳이라지만 뉴욕 한가운데에서 이런 폭발을 일으키다니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물론 충분히 방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향을 과연 완벽하게 차단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분간 뉴욕은 이번 폭발로 인해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노후한 시설은 아마 벌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내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거의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거대한 시설을 박살 냈을 리 없다.

이곳 엠페러타워는 렉스턴 에너지에서 땅을 파내고 만든 게 아니라 원래부터 지하에 있던 공간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결정을 쉽게 내렸을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들어간 공과 돈이 덜할 테니까.

어쨌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만큼 현석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이 컸다는 뜻이리라.

현석은 다시 한 번 소리와 진동을 체크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검회색 안개로 이루어진 신의 파편 안을 모두 돌아다닌 결과, 이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완벽하게 무너져서 막혔다는 걸 확인했다.

이대로는 계속 굴을 파고 올라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공간이동 스킬을 쓰거나.

물론 현석에게는 공간이동 스킬이 없다.

사실 땅을 파면서 올라가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이쪽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아마 위쪽에도 제법 곳곳에 공간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현석의 힘과 체력이라면 며칠 걸리지 않아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현석은 그렇게 하는 대신 신의 파편을 유심히 살폈다.

애초에 엠페러타워로 돌아온 것도 신의 파편을 이용해서였다. 그러니 이걸 또 이용하면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석은 신의 파편, 검회색 안개 기둥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뇌리를 가득 채웠다.

아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석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 그걸로만 머릿속을 꽉 채우는 것쯤이야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현석의 몸과 의식이 위로 쭉 올라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까 황궁에서 엠페러타워로 올라갈 때와 똑같았다.

그때도 눈앞이 순간 캄캄해진 다음 다시 환해졌을 때, 어느새 이동이 끝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눈앞이 환해지면서 이동이 끝났다.

현석은 반사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창 폐쇄중인 건물 안이었다. 원래는 적당한 규모의 쇼핑몰이 있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정리도 다 끝나가고 있었다. 현석이 보기에 건물 상태도 시원치 않았다.

‘하긴, 지하에서 그 정도 폭발을 일으켰으니 위에 있던 건물이 남아날 리 없지.’

아마 이 건물뿐 아니라 이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다 손상되었을 것이다.

현석은 문득 다시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궁금하면 해보면 된다. 현석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처음 신의 파편이 시작된 황궁까지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곳 건물 안에서 바로 황궁이 있던 곳까지 내려갈 수도 있었다.

‘뭐…… 큰 쓸모는 없을 것 같지만.’

다시 거기에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제 얻을 건 다 얻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샤텐도 함께 따라왔을까?’

현석이 그런 의문을 가진 순간 그림자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현석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마치 그림자까지 감각이 연결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림자 안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냥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도 가능한가?’

이것이 마법의 힘인지 아니면 신의 힘인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건 분명했다.

현석은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이제 여기서 구한 아티팩트로 아르포르 기사단을 무장시킬 차례다.

왠지 진득한 전쟁의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 같았다.

현석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 샤텐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