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시작 >
사방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황제가 폭발하며 내뿜은 검은 안개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그 안개는 황궁을 몽땅 감싸 안았다.
현석은 그 한가운데 서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두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저 대마법사나 한 번 봤으면 하고 왔을 뿐이었다.
아니, 사실 이끌렸다. 왠지 여기 한 번 꼭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황궁의 수명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좀 더 늦었다면 황제를 다시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은 과연 이렇게 황제를 만난 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말이다.
현석은 일단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여긴 중심이 될 테니까.
뒤로 천천히 물러난 현석이 결국 황궁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 나오니 검은 안개가 상당히 옅었다.
그리고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예상대로 그들 역시 몸이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샤텐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가죽갑옷에 단검을 양 허리춤에 꽂고 있었는데, 그 수가 50명에 달했다.
하나하나의 수준은 아르포르 기사단보다 더 대단했다.
하지만 만일 집단전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샤텐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황궁에서 시작된 검은 안개는 서서히 사방을 장악해 나갔다. 정원도 서서히 안개가 짙어졌다.
현석은 대체 이게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애썼다. 마력 흐름도 확인해 보고 특별한 패턴이 있지 않은지도 알아봤다.
하지만 아직 현석의 수준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긴 하지만 아직 모른다는 건 확실했다.
모호한 안개가 감각의 눈을 가린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다들 황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석은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럴 때는 감을 따라야 한다. 회귀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배신당한 적 없으니까.
현석은 서둘러 황궁에서 아예 나갔다. 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냥 뛰어넘어서 황궁을 벗어났다.
황궁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결국 그 안에 있던 그림자들과 샤텐도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물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안개가 훨씬 더 짙어졌을 뿐이다.
검은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 광경은 괴기스럽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그 안개가 황궁만 감싸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 하나가 내리꽂혔다.
콰우우!
굉음과 함께 내리꽂힌 빛줄기가 황궁의 거대한 어둠을 바닥으로 콱 찍어 눌렀다.
마치 망치로 튀어나온 못을 때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둠이 바닥에 납작 찌그러졌다.
빛줄기는 여전히 어둠을 내리 누르고 있었는데, 어둠이 그걸 밀어내려는 듯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현석이 보기에는 꼭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검은 안개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빛의 기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콰아아아아!
검은 안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데 그 성장이 사방으로 균일하게 진짜 폭발하듯 하는 게 아니라 위로만 성장했다. 마치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탑을 쭉 뽑아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현석은 고개를 들고 위로 쭉쭉 올라가는 검은 안개의 탑을 쳐다봤다.
정말로 안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탑이었다.
뭉게뭉게 움직이는 검은 연기가 벽을 이루고 있었다.
더 중요한 건 그런 검은 연기가 특별한 패턴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정 패턴을 이루고 그 패턴을 연기가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거대한 마력패턴의 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현석은 탑에 가까이 다가갔다.
황궁은 이미 박살이 나서 사라진 뒤였다. 저 안에 있던 대마법사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좀 아깝긴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검은 안개의 탑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림자들은 정말 전부 사라진 걸까?’
그랬다면 정말 아깝긴 했다. 그들의 능력은 정말 대단해 보였으니까.
그들은 요인 암살이나 보호에 특화된 부대였다. 아마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써먹을 일이 정말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없어졌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석은 깔끔하게 미련을 접고 탑으로 다가갔다.
탑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황궁이 있던 자리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넓었고, 위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넓이는 좀 모자랐지만 높이는 예전에 봤던 근원의 나무보다도 훨씬 높은 듯했다.
아마 체적으로 따지면 이쪽이 더 클 것이다.
현석은 가까이 다가가서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마력패턴을 찬찬히 살폈다.
“세밀하게도 그렸네.”
연기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한 패턴이었다. 심지어 안으로도 전부 패턴이 이어져있었다.
즉, 입체적으로 구성된 마력패턴이라는 뜻이다.
“보아하니 아직 완성되진 않은 모양이네.”
그 얘기는 아직도 위로 쭉쭉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멈출까?
문득 현석은 이곳의 하늘이 유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유한한 하늘에는 벌써 닿고도 남지 않았을까?
현석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분명히 실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하늘이 쫙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현석은 그게 가짜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도 정말 많이 달라지긴 했어.”
예전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 멀리 있는 하늘을 구분해 내는 것이니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별로 어렵지 않게 구분이 가능했다. 그리고 저렇게 높이 있는 데도 세세히 모든 걸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였다.
그 순간 검은 안개의 탑이 완성되었다. 현석은 그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탑으로부터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후우웅!
현석은 놀란 눈으로 탑을 쳐다봤다. 이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주던 건 지금까지 딱 한 종류밖에 없었다.
현석의 심안이 탑의 이름을 확인했다.
[신의 파편]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 * *
쿠구구구구.
바닥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엠페러타워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기겁을 했다.
“지진이다!”
“디들 피해!”
인부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곳은 엠페러타워의 부속 공간 중 한 곳이었기에 일단 다들 중앙으로 도망쳤다.
우르르르르!
인부들이 도망쳤지만 그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인부들을 감시하던 플레이어들은 더 먼저 도망쳤으니까.
그리고 회사에서 나온 책임자들도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달리고 있었다.
엠페러타워는 지하에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무너지면 그냥 다 죽는다.
워낙 깊은 곳이었기에 일단 갇히면 아무도 못 구해준다고 보면 된다.
모든 사람이 사라진 공간에 검은 연기가 바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공간을 꽉 채웠다. 그리고 중앙으로 뚫린 굴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한 뒤에야 성장이 멈췄다.
그렇게 모든 공간을 장악한 검은 연기는 서서히 형체를 이뤄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세밀한 입체 마법진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 * *
현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검은 안개의 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정말로 연기로 이루어졌는지라 현석이 안으로 들어가는 데 막아서는 이질감이나 저항이 전혀 없었다.
‘특이하군.’
생각해보면 신의 파편은 근본적인 건 다 비슷했지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재질은 다 제각각이었다.
각자 당시 가장 쓸 만한 것들을 가지고 파편이 구성된다.
어쩌면 이 신의 파편이라는 것도 사실은 겉모습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검은 연기는 사람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진짜 연기와 똑같았다.
그런데도 그 안에 마력이 흐르고 있었고, 현석이 몸으로 그걸 흩어 놓는다 해도 마력의 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일단 한 번 형성된 마력패턴이라서 그런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먹고 이걸 흩어버리겠다고 작정하면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신의 파편도 다 마찬가지였다.
‘일단…… 활성화부터.’
신의 파편이 생성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작동하는 건 아니다. 이걸 활성화시켜야 진짜 신의 파편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현석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
일단 마력 컨트롤 능력이 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력패턴에 대한 이해도가 큰 폭으로 늘어난다.
더구나 지금은 마법에 대해서도 제법 알고 있기에 그 활용도와 이해도는 예전과는 확연이 다를 것이다.
현석은 심호흡을 한 다음 신의 파편 한가운데에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연기의 마력패턴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석은 주변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마력패턴을 몸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며 자신의 마력을 거기에 조금씩 동조시켰다.
신의 파편을 깨우는 일은 벌써 네 번째다. 파편 자체는 다섯 개째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를 한꺼번에 깨웠기 때문에 실제로 파편을 깨우는 건 네 번째였다.
그리고 이걸 깨우고 나면 남은 신의 파편은 세 개가 된다.
우우우웅!
현석이 집중하기 시작하자 현석을 중심으로 검은 연기가 좀 더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회색빛을 띠게 된 것이다.
검회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났다. 현석은 아예 눈까지 감고 신의 파편을 깨우는 일에 집중했다.
벌써 네 번째니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이번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어려웠다.
이유는 마력패턴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마력의 컨트롤이 조금만 급격하면 연기가 흔들려 마력패턴 자체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그냥 패턴을 작동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여기에 정확히 동조해야 하는 현석의 입장에서는 아주 큰 문제였다.
당연히 더욱 섬세하게 마력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검회색의 비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석이 집중한 끝에 감을 잡은 것이다.
검은 안개의 기둥이 아래에서부터 검회색 안개 기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치 하얀 물감에 검은 스펀지를 담가 그것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아래에서부터 쭉우욱 위로 색이 변해갔다.
그렇게 변해가던 색은 이내 위로 쭉쭉 올라가 하늘을 뚫고 지나갔다.
현석은 그 순간 신의 파편과 완벽하게 동조했다.
한순간에 시야가 위로 쭉 올라갔다.
황궁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투명던전의 크기는 정말 거대했다.
만일 길잡이가 없었다면 여기 들어와서도 황궁을 쉽게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거의 찾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남은 마수가, 아니 남은 언데드가 엄청났다.
현석은 그저 황궁까지 가는 길에 있는 언데드만 처리한 것에 불과했다.
그 수천 배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사방에 바글거렸다.
번쩍!
검회색 안개 기둥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섬광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콰콰콰콰콰!
신의 파편을 깨울 때마다 얻었던 보상이 이제 시작되었다. 세상에 남은 모든 마수가 가루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곳 던전을 꽉 채우고 있던 희미한 죽음의 마력도 모조리 소멸되고 있었다.
현석의 시야가 더 위로 올라갔다.
‘엠페러타워?’
현석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동조가 풀릴 뻔했다. 여긴 엠페러타워였다. 그것도 투명던전이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을 꽉 메우고 있던 검은 안개 역시 검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현석의 시야는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갔다.
뉴욕 시가 한눈에 보였다.
번쩍!
섬광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섬광은 현석에게만 보이는 섬광이었다.
그것은 섬광이라기보다는 고도로 응축된 마력이었다.
세상에 마력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현석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신의 파편이 지구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이미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지 않았던가. 근원의 나무에서 말이다.
신의 파편이 지구에 딱히 뭔가 한 일은 없다. 그저 순수한 마력을 잔뜩 풀어놨을 뿐이었다.
현석은 어쩌면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 던전이라는 것들은 대체 뭘까? 제국은 또 뭐고, 신은 뭐지?’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 현석의 뇌리에 단단히 자리잡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현석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신의 파편에서 나왔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밖으로 나오니 누군가가 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샤텐?”
사텐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다.
< 변화의 시작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