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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43화 (243/326)
  • < 다시 황궁으로 >

    칼슨은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뭐가 어떻게 됐다고?”

    래리는 이것이 보고를 다시 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저 가만히 칼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온 놈이 예전에 온 놈이랑 같은 놈이란 말이로군. 그렇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두 번이나 같은 용이 나왔으니까요.”

    “그놈은 소환수 계열의 플레이어일 확률이 높고 말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소환수 계열의 플레이어가 나타난 적이 없긴 하지만 그것도 맞을 겁니다.”

    칼슨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 굴 하나를 아예 못 쓰게 망가뜨리고?”

    그건 마요트가 한 일이다. 마요트는 그 일을 하고 죽었으니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그 책임을 물으려면 마요트를 여기로 데려온 미카엘에게 해야 하는데, 아무리 칼슨이라도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미카엘이 데려온 아프리카 플레이어들은? 용을 상대하려면 제법 피해를 입었을 텐데?”

    래리는 그 부분에 대한 보고가 약간 미진했다는 걸 깨닫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용의 목표가 플레이어와의 싸움이 아니라 오직 건물의 파괴에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래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키우던 플레이어들은 피해를 좀 입었습니다.”

    “우리 애들만 다쳤다고?”

    “건물을 부수는 용 근처에 다가갔다가 용이 뿜어내는 전격에 휘말려서 다친 사람이 많습니다.”

    몇 명은 죽기도 했지만 굳이 그 얘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보고서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는 얘기였으니까.

    칼슨이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볼텍스 놈들이 확실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가 필요해? 어차피 볼텍스나 엠페러나 불법 암시장인 건 마찬가지야. 그냥…… 그냥 싹 쓸어버리면 되는 일이지.”

    “일단 이쪽의 피해를 수습하는 게 먼저입니다.”

    칼슨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일단 수습부터 해야 병력을 모아 볼텍스를 치든 말든 할 테니까.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지난번에도 같은 놈이 들어와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엠페러타워의 오픈이 미뤄졌다.

    그리고 그 틈을 볼텍스 암시장이 치고 들어와 원래 엠페러타워가 가졌어야 할 지분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둔다면 볼텍스 암시장은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암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볼텍스 암시장이 페레인 엑기스와 비슷한 무언가를 하나 턱 내놓기만 한다면 세계 제일의 암시장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싹을 밟아놔야 한다. 엠페러타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이쪽도 비슷한 수준의 보답이 필요치 않겠는가.

    “한 가지 문제는 제3의 세력이 존재할 경우입니다.”

    “그런 세력이 지금까지 전혀 조짐도 없이 숨어 있을 수 있을까?”

    “볼텍스 암시장이 그랬고 미래산업이 그랬습니다.”

    칼슨은 할 말이 없었다. 진짜 그랬으니까.

    볼텍스 암시장도 그렇고 미래산업도 그렇고 말 그대로 뜬금없이 툭 튀어나왔다.

    “조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

    “예. 하지만 그 정도 조짐이야 세계 곳곳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칼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흑시 쪽이 좀 의심스럽긴 했다. 최근 흑시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흩뿌리고 다닌다.

    그들의 잠재력은 칼슨도 인정하는 바였다. 만일 그들이 그 잠재력을 엉뚱한 데 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능성이 있어. 일단 흑시 쪽을 한 번 뒤집어 봐.”

    “예.”

    래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두 말 않고 대답했다.

    “볼텍스 암시장을 치는 것도 차질 없이 준비하고.”

    “물론입니다.”

    그쪽이 가장 의심스러우니 일단 응징은 필요했다. 설사 그쪽이 벌인 일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이곳 뉴욕에 우뚝 설 암시장은 엠페러타워 하나로 족하니까.

    ‘슬슬 정리할 때가 되긴 했지.’

    물론 그 와중에 볼텍스 암시장이 가진 기술과 인맥, 그리고 아티팩트들을 싹 흡수할 것이다.

    볼텍스 암시장은 초기에 페레인 엑기스의 판매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의 판매를 음지에서 도맡아 했다.

    그로인해 만들어진 영향력이 상당했다.

    그런 영향력과 인맥까지 싹 쓸어 담아야 진짜 제대로 정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일을 계획하는 래리와 칼슨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위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물씬 풍겼다.

    * * *

    황궁으로 가는 투명던전에 들어온 현석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봤다. 그리고 사방으로 마력을 안개처럼 흩뿌렸다.

    예전에 한 차례 정리를 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마수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곳의 마수는 대부분 언데드였다. 그러니 어설프게 없애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현석이 예전에 그놈들을 없앨 때, 워낙 철저히 박살을 내서 부활했다 하더라도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방에 죽음의 마력이 아주 옅게 깔려있긴 하네.”

    이 죽음의 마력이 이곳에 있는 모든 걸 언데드로 만든 모양이었다. 차근차근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솔직히 황궁으로 가는 길 외에는 가보지 않아서 거기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 없앤 언데드보다 훨씬 많은 수의 언데드나 마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지금 그놈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놈들이 이쪽으로 몰려오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럴 때는 용을 타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현석의 용은 한 차례 엠페러타워에서 난리를 피우며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렸다.

    지금은 차분히 시간을 들여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소환수의 장점은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소환만 하지 않으면 결국 다 회복된다는 점이었다.

    당분간 용을 쓸 수 없긴 했지만 충분히 원하는 성과를 얻었으니 상관없었다.

    아마 엠페러타워는 다시 문을 열기 위해 아무리 빡세게 공사를 해도 족히 몇 달은 필요할 것이다.

    현석이 굳이 용을 다시 쓴 이유는 그곳에 잔뜩 깔린 전자장비 때문이었다.

    현석의 용은 숨결조차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숨만 쉬고 있어도 주변 전자 장비를 단숨에 망가뜨린다.

    그런 용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날뛰었으니 그곳의 전자 장비가 남아날 리 없었다.

    중앙에서 각 굴을 향해 뇌전의 브레스를 한 방씩 쏴주는 것만으로 모든 전자 장비를 망가뜨렸다.

    용이 이룬 성과를 잠시 떠올리던 현석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한다.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좀 아쉽긴 하네.’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 미지의 플레이어를 만나 한 번 싸워보고 싶었는데, 엠페러타워에는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 나가면 볼 수 있을까?’

    현석은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 * *

    황궁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평온했다. 예전에 제법 철저히 언데드들을 부순 모양이었다. 단 하나도 부활하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물론 부활했어도 상관없었다. 이제 현석은 예전과는 다르다. 그 모든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최근에 얻은 마탑이 가장 대단했다. 마탑의 지식이 모두 현석 안에 있었고, 바벨의 증표는 현석에게 거대한 힘을 주었다. 게다가 이젠 레벨도 상상을 초월한다.

    예전에 용을 얻을 때의 시험에 등장한 그 용기사, 메겔루가 나타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속도를 계속 높이기만 하니 황궁까지 도착하는 것도 정말 금방이었다.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일단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때는 황궁에 들어갈 자격도 있었고, 분명한 용건도 있었다.

    한데 지금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과연 안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지가 궁금했다.

    “음?”

    현석은 멀리 황궁이 보이는 자리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졌다.

    어쩌면 그때도 저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걸 볼 수 없었다.

    사방에 뿌려진 죽음의 마력이 조금씩 황궁을 갉아먹고 있었다. 안으로 침투 중이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마력이 그것을 계속 밀어내는 중이었다.

    죽음과 순백의 전쟁 같은 광경이었다.

    현석은 직감적으로 황궁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 찾아온 게 정답이었을 수도 있군.’

    아마 더 늦었다면 황궁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기운에 뒤덮인 거대한 죽음의 궁만 남기고서 말이다.

    현석은 황궁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이익!

    예전과 다름없는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기름칠은 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정원을 가득 메운 인기척들이 예전보다 훨씬 명확하게 느껴졌다.

    ‘음? 저건 장난 아닌데?’

    예전엔 없던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이 움직였다.

    [샤텐]

    이름이 보였다. 이름이 보인 게 문제가 아니라 이름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다.

    다른 기척의 이름은 통일성이 있었으니까. 현석은 정원을 슥 둘러봤다.

    [그림자1호], [그림자2호],[그림자39호],…….

    다들 그림자와 숫자를 이름으로 갖고 있었다. 그 말은 그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아마 오래전부터 숫자로만 불렸을 것이다.

    ‘저 사람이 이들을 이끌고 있는 모양이네.’

    예전에는 이름조차 못 봤다. 즉, 당시의 현석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컸다는 뜻이었다.

    메겔루도 처음 봤을 때는 아무것도 못 보지 않았던가. 나중에 그가 흥분하고서야 레벨을 확인했다.

    그러니 샤텐도 비슷한 경우이리라.

    샤텐과 그림자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마력에 여기가 다 먹히면 저들도 결국 언데드가 되겠지.’

    지금은 어떤 힘으로 살아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석이 보기에 저들도 그냥 단순히 살아있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 저들의 모습은 황제와 비슷하지 않을까? 검은 형체로 이루어진 사람, 그림자가 뭉쳐져 사람 형상을 만들어낸 듯한 모습 말이다.

    어쨌든 현석은 정원을 지나쳐 황궁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홀이 보였다. 그리고 그 홀의 끝에 화려한 옥좌가 있었고, 그 옥좌에 앉은 황제가 보였다.

    황제는 현석이 들어오자 가볍게 시선을 던졌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현석의 몸을 짓눌렀다. 예전보다 더 강력한 압력이 분명했다.

    현석은 그 압력을 견디며 황제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못 보던 새에 아주 달라졌구나. 기대한 보람이 있었어.

    황제의 말과 함께 현석의 몸에 가해지던 압력이 몇 배 더 늘어났다.

    하지만 현석은 그 엄청난 압력을 그저 견뎌냈다. 점점 버거워졌지만, 고작 이 정도로 무릎 꿇을 정도로 여리지 않았다. 육체도 정신도 말이다.

    황제 앞에 당당히 선 현석은 담담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요.”

    현석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지.

    말은 안타깝다고 하는데, 왠지 현석은 전혀 그렇지 않게 느껴졌다. 말투도 그렇고 그림자로 이루어진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그랬다.

    -그나저나 그게 보이는 걸 보니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한 모양이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황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황제의 몸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아마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 보였으니까.

    -네 다음 목표는 황제인가?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도 정확히 뭘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았으니까.

    -네게 왕의 기품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건 갖고 싶다고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아주 자연스럽게 얻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말이지.

    현석은 그 말의 진의를 몰라 황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바벨의 증표를 보여준 것이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알지. 아주 잘 알지. 우리 선조의 유품이니까. 기행을 일삼으셨던 제국의 세 번째 주인께서 남기신 유품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황제의 얼굴은 왠지 웃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홀가분함도 보였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게 되어 다행이라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역시 신은 신이야.

    현석이 의아한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뜬금없이 저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럼 잘 부탁하네.

    황제는 뜻 모를 말과 함께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파아아앗!

    그림자로 이루어진 황제의 몸이 폭발해 사방으로 검은 안개를 쏟아냈다.

    그걸 보는 현석의 눈이 커다래졌다.

    < 다시 황궁으로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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